#127화
이내 바네사는 우아하고도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로베르트 메닝엔을 찾아 달라 부탁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나?”
바네사의 태도에서 라모나는 그녀가 자신을 도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역시 예감이 좋지 않다.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바네사에게 되물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로베르트가 실종된 일을 제 탓으로 돌리고 계시는군요.”
라모나의 말에 바네사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로베르트, 라……. 그래, 그런 사이던가.”
이내 그녀가 무덤덤한 눈으로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제법 우스운 말을 하는군. 내가 이제 와 자네 탓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메닝엔 공작은 이미 목숨을 잃은 것을.”
로베르트가 죽었다 확언하는 바네사의 말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로베르트가 살아 있다면요?”
“그럴 리 없지. 미련하군. 황태자 전하의 곁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견디고도 그가 그렇게 일을 허투루 처리하리라고 기대하다니.”
바네사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 아니면 그러기를 바라는 건가?”
이내 그녀는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자네가 무엇으로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 자리를 손에 넣었는지 짐작은 가네.”
“지금 그게 무슨…….”
“하지만 내 충고하지. 지금이라도 황태자 전하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이 아마 남은 삶을 가장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일 걸세.”
그녀가 라모나를 업신여기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또 애먼 사람 죽게 만들지 말고.”
로베르트의 죽음을 확신하는 바네사의 말에 라모나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내 라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사람을 잘못 판단한 것 같네요.”
“그런가? 안타까운 일이군.”
바네사는 재미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 대화였다.
* * *
“표정이 왜 그래요?”
돌아가는 마차 안, 로지나의 질문에 라모나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런 얼굴이 아닌데?”
“……그냥 로베르트가 생각나서요.”
“아.”
로지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슬그머니 라모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서툰 위로였다.
라모나는 그런 로지나를 향해 옅게 웃어 준 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해.’
처음에는 바네사가 로베르트와의 결혼 동맹이 깨진 일로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 여겼다.
그런데 오늘의 만남으로 그 추측은 깨어졌다.
정말 바네사가 그 이유로 라모나를 적대시하는 것이라면 로베르트의 실종에 저렇게 태연해서는 안 된다.
‘나야 푸른빛이 있다지만…….’
그녀는 대체 왜?
‘설마 선대 공작 각하가 이미 로베르트를 발견한 것인가.’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진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손목에 푸른빛이 또다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 * *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레이디 애커만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비까지 오네.”
하여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레헨트에서 수도로 돌아오는 마차 안이었다. 가뜩이나 레헨트까지 다녀오는 길이 피곤했는데, 비까지 오다니 정말 짜증스러운 하루였다.
‘언제까지 내가 이 짓을 해야 하려나.’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벤트하임을 배신하고 나선 그때.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잡았다.
그러나 미카엘라는 너무나 까다로웠고, 또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지시하곤 했다.
이번 일도 그랬다.
‘고작 사생아 시신이 잘 묻혔나 확인하는 일을 왜 나에게 시키는 거야? 내가 진짜 무슨 하녀라도 되는 줄 아나.’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시신이 진짜로 사라졌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레이디 애커만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배배 꼬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히 나를 또 레헨트로 보낼 거란 말이야…….’
그냥 시체는 잘 있다고 거짓말을 할까. 어차피 진짜 확인하러 오지도 않을 텐데. 레이디 애커만이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였다.
“아, 아가씨.”
얼굴이 창백한 하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레이디 애커만이 짜증스레 되물었다.
“또?”
“죄송해요…….”
울상이 된 하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레이디 애커만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아. 알겠어. 대신 얼른 다녀와.”
“네, 네!”
똑똑.
한숨을 내쉰 레이디 애커만이 마차 벽을 두드렸다. 마차가 멈추고, 하녀는 부리나케 풀숲으로 뛰어갔다.
“대체 뭘 주워 먹고 다녔기에 저렇게 배탈이 난 거야.”
지체되는 일정에 짜증이 난 레이디 애커만이 또다시 머리를 배배 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슬슬 배가 아프기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아.”
정말 짜증 나네. 레이디 애커만이 신경질적으로 마차 의자를 걷어찼다.
* * *
레헨트의 어느 으슥한 건물.
“저…… 화장실 좀…….”
얼굴이 하얗게 변한 채 발을 동동 구르는 벤의 모습에 보초를 서던 한 남자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더럽게.”
이내 화장실을 다녀온 벤이 기진맥진한 채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눕자, 남자가 다가와 벤을 발로 툭툭 쳤다.
“으, 으윽…….”
벤이 신음을 흘리자 남자는 안심한 듯 자리를 떴다. 벤은 남몰래 이를 꽉 깨물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의 목표가 뭐지.’
벤이 납치당한 후 꽤 시간이 흘렀다.
자신을 납치한 남자들의 무장을 보고 나서야 벤은 지난번 라모나를 납치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모임이었는지를 실감했다.
평민인 그를 납치하는 것에도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는데,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를 그리 쉽게 납치하려 들 리 없다.
벤은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은 벤을 해코지하지 않았다. 고문으로 정보를 얻어 내지도 않았다.
간혹 가다 자기들끼리 확인용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용도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죽겠네. 나는 청어도 안 먹었는데.’
또다시 올라오는 아랫배의 통증에 벤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힐끔, 그런 벤을 살핀 남자의 동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거 잘 살려 두라 했는데, 의사라도 붙여야 하는 거 아냐?”
“의사를 붙여서 뭐 해. 똥싸개라고 봐 달라 해?”
남자가 상스럽게 킬킬대며 웃던 때였다.
벌컥.
문을 열고 데미안이 들어섰다. 깜짝 놀란 보초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오셨습니까!”
“상태는.”
“멀쩡합니다.”
“그런 얼굴이 아닌데.”
“아! 뭘 잘못 먹었는지 화장실을 들락날락합니다.”
말씀하신대로군.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이내 그가 벤을 향해 고갯짓했다.
“명이 내려왔다. 저걸 수도로 옮기도록.”
나를 다시 수도로? 데미안의 말을 훔쳐 들은 벤이 기함했다.
* * *
냇가를 떠나 얼마나 걸었을까. 나무 그림자로 방향을 가늠해 보던 로베르트가 다시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목에서는 여전히 푸른빛이 빛나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 푸른빛을 보고 있노라니 슬그머니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나?’
흠. 로베르트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손목에 대고 중얼거렸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위험한 일을 하지 않는다.”
푸른빛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로베르트의 손목 위를 뛰놀았다.
손목을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안전한 곳에서 머무른다? 음,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
말하고 보니 다 라모나의 안전에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로베르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건 뭐, 중증이군.’
새삼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클레멘스와 갈등을 겪었던 그 날 이후, 로베르트는 클레멘스가 라모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
바뀐 클레멘스의 태도는 묘하게 익숙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트는 클레멘스가 마리안느를 대하는 것을 질리도록 봤으니까.
또다시 엉망이 되어 있던 창고가 떠올랐다. 마리안느의 흔적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집어 던지고, 찢어 놓은 꼴이란.
‘할아버님이 그런 짓을 했다고 해도 우스운 일이군.’
로베르트가 혀를 찼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그런 일을 한 것일까.
메닝엔의 창고에 접근이 가능하며, 마리안느의 흔적을 훼손할 만큼 그녀를 증오하고, 신의 성물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대체 클레멘스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쪽지는 또 무슨 일인지.’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상황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잠깐.’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왜 클레멘스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가.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에 많은 단서가 스쳐 지나갔다.
7년간 시달리던 악몽, 그리고 라모나가 자신의 과거라고 말하던 꿈, 자신의 필체로 된 쪽지.
그리고 사라진 시간의 신의 성물까지.
그제야 로베르트는 깨달았다.
어쩌면 시간을 되돌린 사람은 바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