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라모나와 알폰조의 대화가 끝나고.
“하아.”
알폰조가 로베르트를 찾는 일을 돕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로지나가 곤란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이 일을 베르나딘 황자 전하가 아시면…… 하, 나도 모르겠다 이제.”
자포자기의 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내 로지나는 냅킨에 로베르트가 실종된 지점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 바로 이 지점에서 산사태가 일어났어요. 그리고 마차는…….”
미간을 찡그린 로지나가 로베르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 매몰되어 있고요.”
로지나의 지도를 유심히 살피던 알폰조가 물었다.
“이 아래는 절벽인가?”
“절벽이라기보다는 협곡이죠. 워낙 깊고 돌이 뾰족해서 탈출로로는 적합하지 않아요.”
“그럼 적들이 이곳은 훑어보지 않았겠군. 메닝엔 공작도 그 사실을 잘 알 테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탈출로로 적합하지 않아요.”
“그는 훌륭한 검사지, 훌륭한 계략가이기도 하고. 말은 좀 많지만.”
로베르트의 칭찬만 하자니 불편했는지 한마디 덧붙인 알폰조가 어깨를 으쓱했다.
로지나와 알폰조 사이에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보다 못한 멜리사가 중얼거렸다.
“그냥 일단 출발하는 게 낫지 않나?”
다행히도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한다는 점에는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티 하우스를 나서기 전, 다시 로브를 뒤집어쓴 라모나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정찰병들과 함께 움직이고 싶은데요.”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
잘 서 있던 로지나가 갑자기 다리를 삐끗하며 넘어졌다. 그녀가 라모나의 어깨를 붙잡은 덕에 라모나도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
“미안해요!”
로지나가 황급히 사과하며 라모나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요?”
“……예.”
라모나는 어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징조가 영 좋지 않은데, 그냥 라모나는 수도에 있는 게 좋겠어요.”
“동의하는 바야.”
알폰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라모나는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으나.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푸른빛이…….”
“예?”
멜리사의 되물음에 라모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헛소리였어요. 그게 낫겠네요. 사실 가 봤자 제 마음만 편하지 짐이 될 테니까요.”
“오,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라모나의 자아 성찰에 멜리사가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로지나는 라모나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뭐, 우리는 또 가 봐야 할 곳이 있으니까요.”
이상하게 로지나가 더 피곤한 얼굴이었다.
* * *
쾅!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산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미 이 장면을 꿈에서 너무 많이 본 덕분일까? 로베르트는 패닉에 빠지는 대신 빠르게 흙더미를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젠장할.’
그렇다고 무사히 피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목숨을 구할 정도는 되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흙더미를 파헤치고 나온 로베르트가 입에 들어간 흙을 뱉었다.
“퉤.”
나뭇가지에 긁힌 그의 뺨에서 피가 흘렀다.
‘마차 안에 있었으면 영락없이 죽었겠군.’
역시 평범한 꿈은 아니었던 걸까. 창고에서 발견한 쪽지를 떠올린 로베르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산 위에서 폭약을 터뜨리던 자들의 생사 여부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 추격자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좋겠군.’
하지만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 로베르트가 고민하던 때였다.
‘응?’
손목에서 빛나는 푸른빛을 발견한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이게 지금?’
푸른빛은 마치 고삐라도 풀린 듯 그의 손목 위를 신나게 뛰놀았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 다행이지만…….’
상태가 달라진 지금도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온통 변수투성이군.’
고민 끝에 로베르트는 결국 절벽에 매달려 암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졸졸졸.
한참을 암벽에 바짝 붙어 이동하던 로베르트의 귓가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후.”
그제야 로베르트는 한숨을 돌렸다. 목을 축인 그가 물가에 비친 얼굴을 살피며 미간을 찡그렸다.
‘봐줄 만한 건 얼굴밖에 없다 했는데. 상처가 난 건 아쉽군.’
라모나가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지만 로베르트는 이미 그렇게 받아들인 후였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혀를 찼다.
“쯧. 뭐, 내 매력은 얼굴이 전부가 아니니.”
자존감을 잃지 않은 그가 품 안의 총을 확인했다.
총 여섯 발의 총알이 있었건만 벌써 끈질기게 그의 뒤를 따라붙던 자객에게 한 발, 멧돼지에게 두 발을 쏘았다.
‘세 발 남았군.’
이 이상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한번 나타난 푸른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군단 말이지.’
시간의 신이 깨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손목을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무사히 나와 다시 만난다.”
여전히 푸른빛은 그의 손목에 맴돌고 있었다.
‘하필 떠올린 말이라고는.’
로베르트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머릿속이 온통 창고에서 발견한 쪽지로 가득한 탓이었다.
아무튼 갈 길이 멀다. 생각에 잠기기엔 이르다는 뜻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삼긴 로베르트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크레모라 백작저.
바네사는 베르나딘과는 달리 황궁이 아닌 크레모라 백작 부인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려는 손님들로 크레모라 백작저가 항상 붐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바네사가 허리를 곧게 편 채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윽고.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바네사가 맞은편에 앉은 로지나에게 말을 걸었다.
“바텐베르크의 살롱 연주회를 다녀왔다고?”
“예.”
“그래. 후작 부인의 연주자를 고르는 안목은 탁월하지. 좋은 연주회였겠어.”
매끄러운 미소를 지은 로지나가 힐끔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래.”
로지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네사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눈동자가 로지나를 향했다.
“내 침실로 들라 하도록. 다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띄지 않게 주의하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로지나는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저렇게 태연하니까 더 미치겠네.’
<레이디 클라이스트. 부탁 하나만 할게요.>
라모나는 바네사 황녀와 독대하고 싶다고 했다.
제 발로 호랑이 굴에 기어들어 가겠다니! 로지나로서는 라모나가 도대체 왜 저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공작 각하한테 그런 제안을 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 뒤통수나 후려쳐야지. 로지나가 짜증스레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도 바네사 황녀가 순순히 라모나를 만나겠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인지는 까 봐야 알겠지만.’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모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황녀 전하께서 보통 분은 아니시라 혼자 상대하기는 좀 버거울 텐데.”
“예.”
로브를 뒤집어쓴 라모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잘 알고 있어요.”
이윽고.
똑똑.
“황녀 전하. 말씀드린 보석 상인을 데려왔습니다.”
로지나의 목소리에 바네사의 침실 문이 열렸다.
* * *
“오랜만이군.”
바네사의 인사에 라모나가 로브를 벗었다.
“황실 무도회로부터 오랜만이라는 말씀이실까요.”
라모나의 말에 바네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나도 알고 있지 않은가.”
회귀를 암시하는 그녀의 말에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지난 생 악연으로 엮인 만큼 당연히 좋은 감정으로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유독 날카로웠다.
선을 먼저 넘은 것은 바네사였다.
“이상한 일이야. 왜 자네가 메닝엔 공작을 택했을까. 황태자의 정부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기가 막힌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그야 당연히 두 번이나 사형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왜 자네의 사형이 황태자 전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바네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황태자 전하의 정부가 되어 미카엘라 벤트하임을 처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자네가 그런 어려운 길을 갔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라모나가 요하네스의 곁에서 당했던 모든 수모를 없는 일로 치부하는 바네사의 태도에 라모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