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바텐베르크 후작저의 살롱. 피아니스트는 땀까지 흘려가며 격정적으로 건반을 내려쳤다. 그의 얼굴에는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살롱 연주회에는 부적합한 선곡이었다. 특히나 직전에 연주하던 가슴을 간질거리는 왈츠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의아한 선곡에 참석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멜리사만이 피아니스트의 파격적인 선곡에 동요하지 않았다. 대화 내용을 감추기 위해 그녀가 시킨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멜리사는 알폰조를 보고 싱긋 웃었다.
“제 손님 목록에 황자 전하는 없었는데 말이죠.”
이런 자리가 어색한지 알폰조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만나고 싶은데.”
“그 정도야 물론 해 드려야죠. 그런데 무슨 상황인지는 아세요?”
“……?”
알폰조의 반응에 멜리사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녀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메닝엔 공작이 실종됐어요.”
“뭐?”
알폰조의 눈이 커졌다. 멜리사가 쿡,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표정 좀 관리하세요. 도리스가 이쪽을 자꾸 훔쳐보잖아요.”
“도리스가 누구지?”
“노란 사람이요.”
“아.”
도리스를 한 번에 찾은 알폰조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었다. 멜리사는 코웃음을 쳤다.
“늦으시네요. 아직도 이 소식을 못 들으셨을 줄이야. 앞으로 좀 분발하셔야겠어요.”
이내 멜리사가 살롱 구석을 응시하며 말했다.
“제가 라모나를 만나게는 해 드릴 텐데. 황자 전하께서 직접 라모나를 찾으셔야 할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알폰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멜리사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조건이 하나 있어요.”
“기가 막히는군.”
“무슨 일로 라모나를 찾으시는지 모르겠지만 라모나가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 해 주세요.”
멜리사의 부탁에 알폰조의 눈이 커졌다. 멜리사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만큼은 부탁드릴게요.”
멜리사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알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좋네요.”
때마침 연주가 끝났다. 우아하게 손을 들어 박수를 친 멜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살롱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붉은 머리의 레이디에게 웃으며 다가갔다. 알폰조는 의아한 얼굴로 그런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요, 레이디 클라이스트.”
로지나는 제법 다정하게 멜리사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게요. 보고 싶었어요. 레이디 바텐베르크.”
“어머, 우리가 서로 보고 싶어 할 만한 사이였나요?”
두 사람이 벌이는 팽팽한 신경전에 살롱에 초대된 사람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멜리사와 로지나. 둘 다 한 성격 하기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괜히 불똥을 맞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도리스는 언제든 멜리사를 도울 수 있도록 주먹을 불끈 쥐고 로지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피식.
그런 도리스와 눈이 마주친 로지나는 비스듬히 웃고는 멜리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녀가 당신을 만나고 오라는데, 보고 싶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로지나가 라모나의 이야기를 전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멜리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래요? 그거 잘됐네요.”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아 알폰조를 바라보았다.
“마침 황자 전하께서도 레이디 클라이스트와 차 한잔하고 싶다 하시던데.”
* * *
바텐베르크 후작가의 소유인 티하우스. 점장의 시선이 로지나의 뒤에 선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에게 머물렀다.
멜리사는 차가운 목소리로 점장에게 명령했다.
“귀중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2층에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
“예, 아가씨.”
그녀의 명령에 점장이 고개를 숙였다.
저벅, 저벅.
멜리사와 일행들이 2층에 들어서고, 점장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쩝, 뭐, 못 알아보는 게 나을 수도.’
수도에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고, 그런 일은 엮이지 않을수록 신상에 이로웠다.
“약을 파는 상인인가? 별 사고만 없었으면 좋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점장이 이내 자리를 떴다.
* * *
“괜찮아요, 라모나?”
“아직까지는요.”
멜리사의 걱정에 라모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녀는 멜리사와 로지나를 향해 말했다.
“황자 전하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건 조금 곤란…….”
로지나가 반발하고 나서자 멜리사가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좋아요.”
“레이디 바텐베르크?”
로지나가 눈을 치켜떴지만, 멜리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제가 보고 싶었다면서요.”
“와, 미치겠네. 진짜.”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긴 로지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멜리사의 뒤를 따랐다.
맹렬한 신경전을 펼친 두 사람이 창가에 앉았다. 반대로 알폰조와 라모나는 가장 깊숙한 구석에 자리했다.
두 사람과 충분히 떨어지자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소식은 들으셨죠?”
그녀의 질문에 알폰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소식 말이지. 요하네스? 아니면 메닝엔 공작?”
따지고 보면 둘 다 같은 이야기다. 라모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빨라. 분명 메닝엔 공작의 죽음은 1년 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죠.”
라모나의 대답에 알폰조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아마도……. 아냐, 아닐세.”
라모나는 알폰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못 알아들은 척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는 저와 같이 시간을 거슬러 오셨지만 저와는 원하는 것이 다른 분이시죠. 제가 지난 생과 다른 삶을 살고자 했다면, 황자 전하께서는 지난 생과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하시니까요.”
지난 생과 같은 삶이라. 알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아.”
“그러나 저희가 원하는 삶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결국 같다면, 저희는 목표가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라모나의 결연한 얼굴에 알폰조가 눈을 감았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했네.”
한참을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뜻에 동의해.”
알폰조는 눈을 떴다. 그의 붉은 눈이 과거에 대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자를 제거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인가?”
“아뇨.”
라모나가 고개를 가로젓자 알폰조가 눈썹을 꿈틀했다.
“로베르트를 찾아 주세요. 슈타이덴 백작가에 전하께서 특별히 훈련시켜 둔 정찰병들이 있지 않나요?”
정찰병의 존재는 기밀이건만, 지난 생의 라모나에게 이미 들킨 모양이었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가 바쁜 이때에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저는 가장 완벽한 복수를 원합니다. 그자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을 빼앗고, 짓밟고, 다시는 그쪽으로 고개 들 엄두조차 못 내는 비참한 삶을 살게 하는 일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군.”
“로베르트를 찾는다면 지금의 황자 전하께 가장 부족한 정치력을 메울 수 있겠죠. 그 정도면 충분한 대가 아닌가요?”
“그럼 그가 이미 죽었다면, 그렇다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이지?”
알폰조의 되물음에 라모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겠습니다.”
“……!”
“정부가 되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목을 가져다드리죠.”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벌떡.
경악한 알폰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소리에 놀란 로지나와 멜리사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아차 싶었던 알폰조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으르렁거리듯 라모나에게 되물었다.
“진심인가?”
“예.”
라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 없이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요.”
“……미치겠군.”
알폰조가 당혹스러운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라모나는 오히려 그에게 반문했다.
“레이디 슈타이덴을 지키기 위해서 서부 경계로 가신 전하께서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닐 텐데요.”
“후.”
깊은 한숨을 내쉰 알폰조가 자리에 앉았다.
목이 탄 그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지.”
“말씀하세요.”
“메닝엔 공작도 그대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나?”
“…….”
알폰조의 질문에 라모나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쯧. 그럴 만도 하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알폰조가 혀를 차던 때였다.
갑자기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이상함을 감지한 알폰조가 그녀를 불렀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라모나는 무엇이라도 발견한 듯 그녀의 손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괜찮나?”
알폰조의 질문에 라모나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푸른빛……!”
“푸른빛?”
알폰조가 미간을 찌푸리던 그때.
벌떡.
그녀가 손목을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라모나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라모나?”
“무슨 일이에요, 라모나. 괜찮아요?”
이상함을 눈치챈 멜리사와 로지나가 황급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때.
덥석.
“전하, 제발.”
라모나가 알폰조의 손을 절박하게 꽉 쥐었다.
“로베르트가 아직 살아 있어요. 빨리 움직여야 해요, 어서요!”
왜 갑자기 그녀가 이리도 다급하게 로베르트의 생존을 확신하는 것인지. 알폰조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절박하고도 단호한 외침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