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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24화 (125/151)

#124화

수도 어딘가의 한적한 저택.

끼이익.

문을 연 로지나가 라모나를 안내했다. 비에 쫄딱 젖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쪽으로.”

로지나는 메닝엔 공작저로 가는 길에 메닝엔의 마차를 발견했다. 그 마차에 라모나가 타고 있을 것이라 직감한 그녀는 그대로 마차에서 내려 슈타이덴 백작저까지 뛰어갔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메닝엔의 마차는 슈타이덴 백작저에 도착했다.

로지나는 라모나의 어깨를 붙들고서는 말했다.

<여기는 위험해요. 안전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죠.>

‘결국 이렇게 됐네.’

로지나가 한숨을 삼켰다.

“좀 괜찮아요?”

라모나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내가 슈타이덴 백작저로 가는 것은 어떻게 알았죠?”

“당신이라면 분명 공작 각하를 찾아 나설 테니까요. 그러니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았겠죠. 게다가 레헨트에서 보니…… 2황자 전하와 그쪽이 뭔가 정보를 공유 중인 것 같던데요.”

자신을 손가락질하지 않는 로지나의 태도에 라모나는 한층 진정할 수 있었다.

“선대 공작 각하가 나를 납치하라고 시키던가요?”

“비슷해요.”

로지나는 바쁘게 저택의 상태를 확인했다. 커튼이 잘 달렸는지 걷어 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납치는 아니고 여차하면 죽이라 했으니까요.”

로지나의 태연한 대답에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그래서 날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왔나요?”

“뭐, 그러면 지금보다 더 쉬웠을 것 같긴 하네요.”

빙긋. 입꼬리를 인위적으로 끌어 올린 로지나가 라모나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타깝게도 저는 공작 각하, 그러니까 현 공작 각하의 사람이라서요. 도박을 해 보기로 했죠.”

“무슨 의미죠.”

“공작 각하라면 분명 당신을 지키라고 하셨을 테니까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로지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쪽에게는 빚진 것도 좀 있고…….”

빚?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어, 들어와.”

로지나의 대답에 한 남자가 수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이미지의 로지나와는 정반대로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기는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그가 로지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로제. 어디서 이렇게 비를 맞고 온 거야.”

로지나가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에게 수건을 건넨 남자는 라모나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리암이라 합니다.”

“반가워요.”

얼떨결에 인사한 라모나가 로지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읽은 로지나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리암은 평민이에요.”

“아.”

그제야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한 라모나가 어쩔 줄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시죠. 필요한 게 있으시면 편히 불러 주세요.”

자주 있는 일인지 리암은 옅은 미소를 한번 짓고는 자리를 떴다.

“어떻게 된 일이죠, 레이디 클라이스트. 로베르트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나요?”

라모나의 질문에 로지나가 곤란한 듯 헛기침을 했다. 이내 그녀가 또다시 인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유치한 질투 작전 같은 거예요.”

맙소사. 그제야 레헨트에서 로지나가 했던 이상한 행동들을 이해한 라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최악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로지나는 자괴감에 빠진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당분간은 여기 머무르도록 해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선대 공작 각하께서는 정말 그쪽을 죽일 수도 있는 분이시라서요. 이미 전적도 있잖아요.”

“전적이요?”

라모나의 되물음에 로지나가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 게 있어요.”

“로베르트의 부모님께 일어난 마차 사고가 선대 공작님의 일이라는 말인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라모나가 날카롭게 되묻자 로지나는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냥 버려뒀어요.”

“네?”

끔찍한 이야기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선대 공작 부인이요. 저희 가문의 수하들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거든요. 피를 좀 많이 흘리기는 했지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듯 로지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쪽도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으니까. 그럼 이만 쉬어요.”

“……잠시만요.”

자리를 뜨려는 로지나를 라모나가 붙잡았다.

“로베르트가 칼로에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누구죠?”

기밀에 해당하는 사항인지 로지나는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라모나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았다.

“메닝엔 공작가, 그리고 저희 가족. 그리고 그쪽이요.”

그럼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일까.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던 때였다.

“아.”

무언가가 떠오른 듯 로지나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이후로 에드윈이 베르나딘 3황자 전하를 만나러 가긴 했어요.”

심상치 않은 예감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레이디 클라이스트. 부탁 하나만 할게요.”

“뭐죠?”

“하나 더 들어주면 좋고요.”

라모나의 덧붙임에 로지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공작 각하에게 왜 그런 제안을 했었을까.”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슈타이덴 백작저. 상체를 탈의한 알폰조는 연무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190이 넘는 큰 키와 커다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살벌했다.

위태로운 맹수처럼 연무장을 가로지르던 알폰조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순간 머리가 핑하고 도는 아찔한 느낌에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알폰조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털썩.

“……젠장.”

레이먼의 보고를 받은 이후로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과거 서부 경계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난 탓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요하네스가 꾸민 일이었다니.

‘감히 내 군사들을……!’

충혈된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의 머릿속에 레이디 바텐베르크가 남기고 간 말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 사람이 돌아왔다.’라고 말하면 황자 전하의 마음이 달라질 거라 하더군요.>

그 천벌을 받아 모자랄 자식이, 지금 황궁에서 버젓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다.

주먹을 꽉 쥔 알폰조가 이를 꽉 악물었다.

‘황위, 라…….’

알폰조는 처음으로 자신의 핏줄이 가진 힘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황제가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 권력이 된다는 것은 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어쩌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을 뿐, 그건 알폰조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황위 경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레이디 바텐베르크도 말하지 않았는가.

<좋아요, 그럼 다른 걸 묻죠. 만약 황위를 노리지 않는다면 황자 전하의 목숨은 안녕한가요?>

그가 황위를 노리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찌하는 게 좋단 말인가.’

고민하던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라모나였다.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온, 알폰조와 가장 다른 방식으로 지난 생을 살아 낸 사람.

‘그녀를 한번…… 만나 봐야겠군.’

메닝엔 공작저에 가기는 어려울 것이고, 대신 떠오르는 장소가 한 군데 있었다.

“후.”

영 내키지 않는 방법이군. 깊은 한숨을 내쉰 알폰조가 흙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바텐베르크 후작저에는 살롱 음악회가 한창이었다.

오늘은 해바라기를 연상시키는 쨍한 노랑으로 치장한 도리스가 멜리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모나는요? 무슨 일이라도 있대요? 세상에! 설마 공작 각하랑 뜨거운 시간을 보낸대요?”

“아아.”

이른 새벽 로베르트의 실종 소식을 이미 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멜리사가 대충 둘러댔다.

“예, 뭐, 가문에 급한 일이 생겼나 봐요.”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찼다.

‘괜히 미약을 보내 줬나? 설마 공작이 그 약 먹고 잘못된 건 아니겠지?’

라모나는 무사한 것일까. 공작의 실종 사건에 인력을 모두 썼더니 라모나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날 밤 라모나가 보낸 편지 내용도 마음에 걸렸다. 그 남자가 돌아왔다, 라니.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모양인데.’

찝찝한 기분에 멜리사가 한숨을 삼켰다.

‘그나저나 저 여자는 왜 온 거야?’

그녀가 힐끔, 살롱 구석에 앉은 붉은 머리의 여자를 훔쳐보던 때였다.

“어머나!”

도리스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모자라 멜리사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멜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 사납게 왜 이래요, 정신 차려요. 도리스.”

“아니, 보통 이럴 때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아요?”

“그야 상대가 도리스가 아닐 때죠.”

“너무해요!”

도리스의 앙탈에 멜리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요. 이제 좀 받아들여요.”

울상이 된 도리스가 멜리사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하지만 2황자 전하가 오셨단 말이에요!”

“2황자 전하요?”

도리스의 말대로였다. 큰 키의 은발 남자가 저벅저벅 살롱에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군인 티를 못 벗는 평소와 달리 멀끔하게 잘 차려입은 모양새에 멜리사가 눈썹을 까딱했다.

‘흐음?’

그뿐만이 아니었다. 알폰조의 붉은 눈에 타오르는 분노를 발견한 멜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드디어 우유부단하고 커다란 황자님께서 드디어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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