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요하네스의 말에 바네사의 눈이 커졌다.
그럴 수밖에. 요하네스는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요하네스를 오라버니라 부르기 시작한 건 지난 생, 베르나딘이 죽음을 맞이한 이후였다.
말하자면 얄팍한 혈연에 기대 목숨이라도 건지려던 항복의 표시였던 것이다.
바네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요하네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견제는 요하네스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빙긋 웃은 그는 천천히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한 번 죽고 나니 내가 퍽 친근하게 느껴진 모양이구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발뺌하기엔 너무 동요한 것 아니냐?”
그는 뚫어져라 바네사를 관찰했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며, 경직된 입꼬리,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듯 정원 출구를 흘깃 바라보는 시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바네사의 모습에 그는 만족스럽게 열었다.
“황후의 반지.”
“……!”
바네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요하네스는 한층 즐거워진 기분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황실 무도회에서 그렇게 티 나게 나를 떠봤으면서 이제 와서 발뺌이라니. 이 무슨 멍청한 짓이란 말이냐. 아, 아니면.”
그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인가?”
바네사가 당황한 듯 요하네스를 밀어냈다.
“오라버니, 아까부터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게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흐음, 네가 음흉하게 뒤에서 편지나 보낸 것처럼?”
편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더 이상 감출 수도 없을 만큼 바네사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슬슬 그녀에게서 흥미를 잃은 요하네스가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황궁 무도회 전날 내게 편지를 보낸 것도 너로구나. 감히 나를 오라 가라 할 생각을 하다니. 기특하기도 하지.”
“……확인이 필요했으니까요.”
“라모나를 내게 넘겨주고 메닝엔 공작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
바네사가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자 요하네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가 이번에는 어떤 헛수고를 할지 궁금하구나. 끔찍하도록 멍청한 베르나딘 아래에서 말이지.”
요하네스는 업신여기는 얼굴로 바네사를 한번 훑어보고는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때.
“오라버니.”
주먹을 꽉 쥔 그녀가 요하네스를 멈춰 세웠다.
요하네스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오라버니께 드리도록 하죠. 그러니…….”
“메닝엔 공작을 네게 달라고?”
싸늘한 요하네스의 목소리에 바네사의 눈이 커졌다.
요하네스는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감히 네가 내게 거래를 제안할 줄이야.”
까드득. 그가 이를 악물었다. 서늘한 목소리에 분노가 깃들었다.
“그것도 라모나를 두고.”
이내 요하네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련한 것. 한 번 실패로도 모자라 또다시 메닝엔을 이용해 볼 작정인가?”
바네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하네스는 상관없다는 듯 바네사에게 등을 돌렸다.
“메닝엔 공작이라…….”
여전하군. 그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뭐, 장담은 못 하겠구나.”
* * *
하루만 묵고 가시는 게 어떠냐는 집사의 만류에도 로베르트는 출발을 강행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컴컴하던 하늘에서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이잉.
말들이 불길하게 울부짖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로베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창고에서 발견한 마리안느의 목걸이,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안에 있던 쪽지 때문이었다.
<레헨트의 참사를 막고자 한다면 황태자의 정부를 처리할 것.>
‘대체 왜…….’
도저히 일의 전말을 이해할 수 없다.
누가 메닝엔의 창고를 열었으며, 누가 로베르트의 필체로 글을 남겨 둔 것일까.
‘심지어 황태자의 정부라는 사람은 지금 존재하지도 않아.’
깊고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어느 것 하나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역시 할아버님인가.’
하지만 클레멘스가 라모나를 쫓아내기 위해 꾸민 일이라 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굳이 뷔나우 백작가의 소유인 마리안느의 유품을 메닝엔의 창고에 가져다 둘 이유가 뭐란 말인가.
‘게다가 신의 성물은 왜 사라진 것이지.’
로베르트는 그의 예측보다 푸른빛이 더 복잡한 일에 엮여 있음을 직감했다.
“젠장.”
가슴이 답답해진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갑자기 ‘그 꿈’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마리안느와 리안드로의 마지막, 그리고 로베르트가 타고 있던 마차를 덮친 흙더미를 천천히 떠올려 보던 로베르트는 처음으로 그런 고민을 했다.
‘그게 정말 꿈에 불과한 것이 맞나?’
라모나는 말했다. 마치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꿈을 꿨다고.
그렇다면 설마 그 꿈도 사실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아닐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군. 후.”
한숨을 내쉰 로베르트가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그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두 방울씩 후두둑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내 거센 빗줄기가 되었다.
“아이고. 이거 하늘이 심상치 않은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날씨 때문인지 마부가 곤란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무리한 일정을 강행했군.’
그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한숨을 삼킨 로베르트가 지금이라도 일을 수습하기 위해 마차 벽을 두드렸다.
똑똑.
“예, 각하!”
“잠시 마차를 멈추도록.”
“아이고, 넵!”
마부는 얼른 마차를 멈춰 세웠다.
마차에서 내린 로베르트가 땅을 살폈다. 아직은 비가 얼마 오지 않아서 괜찮았지만, 흙이 점점 비에 젖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주변을 살피는 로베르트에게 마부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거 보통 비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러다 산길에 갇히기라도 할까 걱정입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 어디지?”
짐칸에 타고 있던 길잡이가 얼른 마차에서 내려 입을 열었다.
“아래로 10분 정도만 내려가면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각하.”
그가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어 댔다.
“일단 오늘은 그곳에서 묵어야겠군.”
마음은 한시가 바쁘게 수도로 달려가고 있건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
한숨을 내쉰 로베르트가 머리를 쓸어 넘기던 때였다.
‘……응?’
산 위에서 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수상한데.’
미간을 찌푸린 로베르트가 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호위들도 재빨리 로베르트를 엄호했다.
갑자기 살벌해진 분위기에 마부가 허둥대며 몸을 숨기는 사이,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길잡이가 갑자기 풀숲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로베르트는 그제야 길잡이의 과장된 몸짓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그가 재빨리 길잡이를 향해 총을 겨눴다. 로베르트의 손이 방아쇠를 당기던 그때.
쾅!
고막을 갈기갈기 찢을 듯,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산 위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흙더미가 로베르트의 시야를 가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이건……?’
이건 그가 이미 수십 번이고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 * *
메닝엔 공작저. 벌써 밖은 어두컴컴해졌다. 라모나는 초조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늦지.’
톡, 토독.
그녀의 손가락이 바쁘게 팔을 두드렸다.
‘아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진정하자. 애써 스스로를 다독인 그녀가 한숨을 삼키던 때였다.
‘응?’
문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티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가씨께서……! 아가씨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 꺅!”
철썩.
티아의 비명과 함께 울려퍼진 커다란 마찰음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지금 티아를 때린 거야?’
대체 누가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경악한 라모나가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벌컥.
라모나의 침실 문이 열렸다.
“흡.”
불청객, 클레멘스와 눈이 마주친 라모나는 그의 싸늘한 기세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클레멘스는 아무런 인사 없이 라모나의 침실에 들어섰다.
뚜벅, 뚜벅.
고요한 가운데 그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클레멘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라모나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없군.”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에도 없어.”
이윽고 클레멘스가 해명해 보라는 듯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예.”
“약혼녀와 하루 종일 놀아나는 중이라던 메닝엔 공작이 왜 사라진 것인지.”
그가 굳은 얼굴로 라모나를 노려보았다.
“설명이 필요한 듯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