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성물만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성물을 보관하던 보관함과 유리 케이스, 그 모든 것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뭐지.’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띵해진 로베르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한 것은 기분만이 아니었다.
이 공간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도 묘하다.
한참만에야 로베르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창고를 보았을 때와 배치가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그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엉망이군.”
급하게 창고를 뒤지기라도 한 것 같은. 아니 분노로 물건들을 집어 던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
‘침입자가 있었던 것인가.’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서둘러 창고를 훑어보았다. 이상함을 인지하고 나니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나뒹구는 티아라, 잡아 뜯은 것이 분명한 루비 귀걸이, 찢어진 웨딩드레스까지.
손상된 물건들은 모두 마리안느의 것이었다.
‘역시 할아버님인가.’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자그마한 무언가가 구석에서 반짝였다.
‘저건……!’
로베르트는 그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반짝이던 것의 정체는 마리안느가 늘 차고 있던 로켓 목걸이였다. 로베르트는 무릎을 굽혀 목걸이를 주웠다.
순금으로 된 체인 사이사이에 거뭇한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이물질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핏자국이군.’
심장이 기분 나쁘게 쿵쾅거렸다.
하지만 이게 왜 여기 있는 것일까. 분명 마리안느의 유품은 그녀의 친정인 뷔나우 백작가에서 모두 회수해 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물끄러미 어머니의 유품을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무언가에 홀린 듯 로켓 목걸이를 열었다.
달칵.
목걸이 안에는 작은 종이가 돌돌 말려 있었다. 종이를 펼쳐 본 로베르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 필체로군. 그가 이를 악물었다.
더 놀라운 것은 쪽지에 담긴 내용이었다.
<레헨트의 참사를 막고자 한다면 황태자의 정부를 처리할 것.>
황태자의 정부. 로베르트는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 단어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 * *
“곧장 수도로 돌아갈 것이다. 채비를 하도록.”
창고를 방문한 이후 눈에 띄게 날카로워진 로베르트의 태도에 칼로에의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
“저…… 각하. 비가 올 것 같은데 차라리 하루…….”
로베르트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사를 추궁했다.
“아버지 이후로 창고를 연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스릉.
로베르트가 거침없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흐읍.”
깜짝 놀란 마부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로베르트는 아랑곳 않고 집사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할아버님이 왔다 가셨을 텐데?”
날이 바짝 선 칼이 예리하게 빛나자 집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제 목숨을 걸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리안드로 님 이후로 각하께서 처음으로 창고를 여셨습니다.”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다. 꿰뚫어 버릴 기세로 집사를 노려보던 로베르트는 이내 칼을 내려놓았다.
“의심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살벌한 광경을 목격한 로베르트의 수하들이 바짝 긴장했다. 그 덕에 수도로 돌아갈 준비가 빨리 끝날 수 있었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 로베르트는 무언가가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 신의 성물에 먼지가 너무 쌓였더군. 다음번에 창고를 열 때는 청소할 사용인을 하나 데려오도록 해.”
“예?”
집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로베르트는 태연한 얼굴로 집사를 떠봤다.
“시간의 신의 성물 말이야.”
로베르트의 말에 집사는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외람되오나 각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죄송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뭐?”
“신의 성물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칼로에 출신인 집사가 신의 성물을 처음 듣는다니. 로베르트는 집사가 노망이라도 든 게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곧 한 가지 추론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약 신의 성물이 메닝엔의 창고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라면…….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를 악문 로베르트가 집사에게 손을 내저었다.
“……잊어버리도록. 내가 꿈을 꾼 모양이니.”
쿠르릉.
그때 검게 물든 하늘에서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살핀 집사는 다시 한 번 로베르트에게 말했다.
“비가 한바탕 크게 올 모양입니다, 각하.”
그러나 창고에서 발견한 쪽지로 인해 머릿속이 온통 뒤집혀 버린 로베르트에게 집사의 조언이 들릴 리 없었다.
“빨리 출발하도록 하지.”
라모나는 지난 생의 꿈을 꿨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아니면 혹시.
‘내게 숨기고 있는 건가.’
어두운 얼굴의 로베르트가 마차에 올랐다.
* * *
3황자궁.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반묶음을 한 바네사가 베르나딘을 찾아왔다.
공손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사용인들 사이를 유유히 가로지른 바네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 놓았다.
“오라버니. 메닝엔 공작의 연락은 아직인가요?”
바네사의 물음에 베르나딘이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내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로베르트가 바쁜 모양이더구나. 그럴 만도 하지. 아이젠부르크의 소식을 너도 듣지 않았더냐.”
로베르트를 옹호하는 베르나딘의 말에 바네사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응?”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메닝엔 공작이 마음을 바꾼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하하, 바네사 그게 무슨…….”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닐 듯합니다. 2황자가 계속 공작의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어요.”
바네사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베르나딘의 눈이 커졌다.
“바네사. 네가 약혼 일로 많이 상심한 모양이구나.”
바네사는 자신을 달래려 드는 베르나딘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베르나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도 놀라긴 했다. 네가 그렇게 충격을 받았을 줄은 몰랐지. 정신까지 잃고 몸져누웠다는 말에 참 많은 생각을 했단다. 하지만 바네사. 그건 내 친구에 대한 모욕이구나.”
바네사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한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베르나딘은 굳건한 얼굴로 확언했다.
“내 명예를 걸고 말하지. 로베르트가 나를 배신할 리는 없어.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거 하나만은 확실해.”
바네사가 그의 말에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오라버니…….”
그러나 베르나딘은 완고했다.
“게다가 바네사. 알폰조가 황위에 욕심을 내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냐. 정말 알폰조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서부 경계에 정착했을 리 없다.”
확고한 베르나딘의 말에 바네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라버니.”
그녀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걱정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에요.”
체념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 * *
베르나딘과의 대화를 마치고, 바네사는 어두운 얼굴로 황자궁을 나섰다.
‘물러도 너무 물러.’
황위를 노린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건만. 베르나딘은 그런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이러면 이전과 다를 바 없지.’
가만히 앉아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놀랍도록 생생하던 꿈을 떠올린 바네사가 이를 악물던 때였다.
“오, 바네사.”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바네사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화사한 미소를 지은 요하네스가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인사가 너무 늦었구나. 요양은 잘하고 왔느냐?”
바네사는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오라버니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바닷바람은 건강에 좋지 않다던데.”
“그래도 제게는 도움이 된 듯합니다. 수도에 있을 때보다 잔기침이 줄었거든요.”
“그래?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구나.”
얼핏 듣기에는 통상적인 안부 인사 같았지만, 바네사를 바라보는 요하네스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내 최근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지.”
“어떤 일이실까요.”
“메닝엔의 가신이던 엘츠 백작이 몰래 메닝엔의 정보를 빼돌렸던 모양이구나.”
“저런.”
바네사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최근 들어 가신이라는 관계가 많이 희미해지기는 했죠. 아이젠부르크의 일도 그래서 생긴 게 아니겠어요.”
“세상이 바뀌는 게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묻고 싶구나.”
“말씀하세요, 오라버니.”
“바네사, 네가 언제부터…….”
요하네스는 바네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었다. 이내 그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이내 바네사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를 친근하게 여기다 보니 그만 제가 말실수를 한 모양이에요.”
바네사의 태연한 대답에 요하네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제법 노련해졌구나.”
“칭찬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칭찬할 만한 발전이지.”
요하네스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저벅.
그가 바네사에게 한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소름끼치도록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너를 죽일 때만 해도 이리 표정을 잘 감추지는 못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