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20화 (121/151)

#120화

한편 그 시각, 로베르트는 칼로에로 향하는 중이었다.

“후우.”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안느는 칼로에를 참 좋아했었다. 이제 와서야 다 지나간 이야기였지만.

‘이곳도 참 오랜만이로군.’

기분이 껄끄러워진 로베르트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라모나가 과거의 꿈을 이야기하던 날, 그는 그녀가 요하네스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그때의 일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그는 모든 일의 전말을 이해했다. 라모나가 왜 그렇게 다급하게 그를 찾아왔는지, 그리고.

왜 그날 밤 압생트를 마시고 싶다며 자신을 찾아왔는지.

로베르트는 그날 그녀를 안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그랬다가는 분명 그 일이 평생 그의 가슴에 남았을 것이다.

‘나는 참 눈치도 빠르지.’

이런 건 좀 몰라도 됐을 텐데. 로베르트는 자조적인 웃음을 삼켰다.

그는 지난번, 미카엘라가 메닝엔 공작저에 방문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너를 꼭 정부로 들이고 싶으시대. 그러지 않으면 나를 황태자비 자리에 앉히지 않으시겠대.>

자신이 1년 후에 죽었다던 그녀의 꿈속에서 라모나와 요하네스는 무슨 관계였을까.

정부라는 단어에서 이미 답은 나왔지만 알고 싶지 않다.

‘썩 유쾌하지는 않군.’

유쾌하지 않다 뿐일까.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능구렁이 같은 황제가 아이젠부르크의 영지 몰수를 허가했다. 노골적으로 벤트하임의 손을 들어준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까지 감수하면서.

‘분명 그 개자식의 입김이 닿은 일이겠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지 몰수는 요하네스가 벌일 만한 타입의 일은 아니었다.

서서히 타겟의 주변을 압박하며 숨통을 조이는 게 요하네스의 스타일이었다.

라모나 또한 그것을 알기에 자신을 잃을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 결론은 둘 중에 하나다.

요하네스가 라모나에게 눈이, 젠장, 벌써 멀었던가. 아니면 역시 그도…….

‘후우.’

팔짱을 낀 그가 톡, 토독 팔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로베르트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설마 이것은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질투일까?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지금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난다. 그녀를 혼자 고민하게 만든 자신에게 화가 난다.

무엇보다.

그녀를 가지고, 망가뜨리고도 또다시 그 짓거리를 하려는 요하네스에게 미친 듯이 화가 난다.

이건 부모의 죽음을 캐면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방면의 분노였다.

그는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죽여 버릴까.”

아니. 평생 불구로 살도록 발목을 꺾고 귀를 잘라 버릴까.

그리고 그가 간절히도 원하던 가장 높은 자리를 다른 이가 차지하는 것을 지켜보게 하면, 그러면 조금 속이 풀릴 것도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로베르트가 요하네스를 잔인하게 도륙하는 상상을 하는 사이, 마차는 칼로에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가 칼로에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저택의 사용인들은 허둥지둥 그를 맞을 채비를 했다.

집사는 변명 없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준비가 미흡하여…….”

“됐다.”

로베르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집사를 향해 턱을 까딱했다.

“당장 창고로 가지.”

“예? 창고 말씀이십니까?”

“아.”

발걸음을 옮기던 로베르트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집사에게 경고했다.

“행여나 할아버님께 보고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누가 자네의 주인인지 똑똑히 기억하도록.”

“……예, 각하.”

집사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푸른빛과 라모나의 꿈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면.

‘이 이상 라모나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겠지.’

차가운 얼굴의 로베르트가 창고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셀 수조차 없는 아주 오래전. 이 땅에는 많은 신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이단과 제만. 두 명의 쌍둥이 신은 땅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그러나 아이단은 한 인간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위하여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이단은 소멸되었다. 쌍둥이 형제를 잃고 홀로 남겨진 제만은 자신의 땅 칼로에에 뿌리를 내렸다.

다정하고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던 신은 인간들과 어려움 없이 어울려 살았다.

신은 이 세상을 사랑했다. 들판에 핀 풀꽃 한 송이를 사랑하고, 길가에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사랑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줄 아는 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신은 고통스러웠다.

신은 영원 속에 머물러 있건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름답게 핀 꽃은 시들고, 아이들은 노인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신은 자신이 사랑한 것들이 소멸할 때마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다.

사랑하고, 잃고. 사랑하고, 잃고. 수많은 이별이 신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한 제만은 스스로를 봉인하기를 택했다. 그는 자신의 신성을 담은 성물을 칼로에의 저택에 남기고는 소멸했다.

제만이 사라진 후.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잊었다. 칼로에에 남겨진 제만의 성물 또한 흙먼지에 파묻힌 지 오래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레오벤 제국이 세워졌다.

대륙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은 초대 메닝엔 공작은 칼로에를 하사받았고, 전설 속 시간의 신이 살았다던 칼로에의 저택에서 신의 성물을 발견했다.

* * *

칼로에 저택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어두컴컴한 가운데, 집사는 등불을 들고 로베르트의 앞길을 밝혔다.

순금으로 된 묵직한 열쇠 더미를 손에 쥔 로베르트가 집사에게 물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창고가 열린 적이 있나?”

“아닙니다. 선대 공작 각하께서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칼로에를 방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대로 있겠군. 어린 시절 얼핏 보았던 시간의 신의 성물을 떠올린 로베르트가 묵묵히 집사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얼마나 내려갔을까. 드디어 세 개의 문이 나타났다.

창고를 볼 자격이 없는 집사는 로베르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각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잠자리는 어느 방에 준비해 드리도록 할까요?”

“필요 없어.”

“……예?”

“곧장 수도로 올라갈 거니 잠자리를 준비할 필요는 없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집사가 대답했다.

“예, 각하.”

이윽고 집사가 자리를 뜨고, 로베르트는 바닥에 깔린 돌 사이 어딘가를 가느다란 눈으로 살폈다.

‘여기군.’

먼지 낀 틈새를 발견한 그가 큼직한 돌을 하나 밟고, 가장 작은 열쇠로 오른쪽 문을 열었다.

이윽고.

쿠구궁.

육중한 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순간 마리안느의 모습이 생각나다니.

<어머니! 이거 보세요!>

로베르트가 아주 어린 시절, 아직 유디트가 전적으로 로베르트를 맡아서 키우지 않던 어느 날.

칼로에를 방문한 리안드로는 마리안느와 로베르트에게 가주의 창고를 보여 주었다. 바닥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신이 난 로베르트는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바닥이 움직여요! 돌인 줄 알았는데!>

마리안느는 다정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쉿! 로베르트. 그러다가 창고에 숨은 시간의 신이 놀라서 도망가기라도 하면 어떡하니.>

<하지만 방금 돌이……!>

모자의 대화를 지켜보던 리안드로가 피식 웃었다.

<로베르트, 네가 재잘대는 모습을 보면 꼭 정원의 작은 참새들 같구나.>

그의 말에 마리안느는 까르르 웃었다.

<나의 작은 새.>

다정하게 로베르트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던 마리안느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마치 이 공간이 그날의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 지나간 일일 뿐이지.’

로베르트는 생각을 정돈하고 창고에 들어섰다.

창고에는 메닝엔의 역사가 가득했다. 초대 메닝엔 공작이 황제로부터 하사받았던 투구부터 유디트가 결혼식에서 입었던 드레스까지.

그는 값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창고를 감흥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한 벽면에 이르러서야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한참 동안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아버지.”

벽에는 리안드로와 마리안느의 결혼식 날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분명 집사는 리안드로의 죽음 이후 아무도 창고를 열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마리안느의 모습만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할아버님이 다녀가셨던 모양이로군.’

한숨을 삼킨 로베르트는 조심스레 커튼을 걷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은 세상을 모두 다 가진 듯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결혼을 영원한 사랑의 종착역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어땠는가.

로베르트는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내 이상한 점을 발견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만.’

그가 그림 속 마리안느의 목 부근을 유심히 살폈다.

“어머니는 항상 레이디 슈타이덴과 같은 로켓 목걸이를 하고 계셨는데……?”

분명 결혼식 날에도 마리안느가 그 목걸이를 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두 개의 목걸이를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림 속 마리안느의 목에는 유디트가 물려 준 다이아 목걸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화가가 지웠나?’

미심쩍긴 했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시간을 이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로베르트가 신의 성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응?”

신의 성물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