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황태자궁, 식사를 마친 미카엘라와 요하네스가 황궁의 정원을 거닐었다.
“날씨가 좋네요. 너무 덥지도 않고, 햇볕도 적당하고. 딱 산책하기 좋은 날씨에요.”
미카엘라가 눈을 곱게 접으며 말했다. 요하네스는 그녀의 말에 빙긋 웃었다.
제국의 천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잘 어울리는군.”
“예?”
“그대와 수국 말이야.”
요하네스의 말에 미카엘라의 눈이 커졌다. 살짝 미카엘라에게서 몸을 돌린 요하네스가 중얼거렸다.
“그래. 날씨가 더 더워지기 전에 이렇게 종종 함께 산책을 하면 좋겠군.”
미카엘라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떠올랐다. 그런데 너무 신이 난 걸까? 그녀는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요하네스가 그런 그녀를 부축했다.
“조심하도록 해.”
그가 덧붙였다.
“그대는 워낙 자주 넘어지고는 하니. 걱정이 크군.”
내가 자주 넘어진다고? 미카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다정한 요하네스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하도록 할게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라모나라는 돌멩이가 일으킨 물살이 잠잠히 가라앉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적어도 미카엘라는 그렇게 믿었다.
‘고작 아이젠부르크 따위가 내 앞길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미카엘라가 사뿐히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벤트하임 공작도 이제 나이가 제법 되지.”
묘하게 공작을 하대하는 요하네스의 뉘앙스를 눈치챈 미카엘라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할 만한 나이는 아니신데?’
그녀의 의아함은 요하네스가 다음 말을 꺼내자 해결됐다.
“후계자를 정해야 할 텐데 말이야.”
미카엘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아무리 황태자라 한들 벤트하임의 후계자에게까지 입김을 불어 넣으려는 건 지나치다.
그녀는 그의 의도를 못 알아챈 것처럼 얼른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아직 젊으시니까요. 늦게라도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요하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상황을 모면했다고 생각한 미카엘라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서부 경계에서 근무하는 벤트하임의 방계가 있다지.”
“……예?”
“사무엘 크뤼거라고 하던가.”
요하네스는 미카엘라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지만, 미카엘라는 자신이 덫에 걸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날씨가 이렇게…… 추웠던가?’
이상해. 오싹한 기분이 든 미카엘라가 저도 모르게 팔을 끌어안았다.
요하네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미카엘라.”
“예, 예?”
그녀가 허둥거리자 요하네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답.”
“전하?”
그의 입은 아직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다시 말했다.
“대답해야지.”
맑은 하늘을 옮겨 담은 듯한 푸른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번들거렸다.
“내가 묻지 않느냐.”
* * *
다음 날.
아침이라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 티아는 라모나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보초를 서듯 복도를 서성거리는 티아에게 댄버스 부인이 다가왔다.
“각하와 레이디께서는?”
“으음, 아직 주무시는 것 같아요. 워낙 뜨거운 사이시잖아요.”
티아의 너스레에 댄버스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내 그녀가 엄한 목소리로 티아의 이름을 불렀다.
“티아.”
“예!”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테다.”
“어머! 죄송해요.”
티아의 빠른 사과에 댄버스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티아에게 조언했다.
“터놓고 이야기하마. 이대로 레이디께서 공작 부인이 되신다면 사실 내 뒤를 이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은 너겠지. 물론 모시는 주인이 남편…… 아니 약혼자분과 사이가 좋은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마리안느의 일을 떠올린 댄버스 부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누군가는 그런 너의 이야기에서 사소한 단서를 잡아낼 테다.”
“……명심할게요. 댄버스 부인.”
티아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지금 단서를 잡아내라고 이러고 있는 거였지만.
“알아들은 듯하니 되었다. 그럼 두 분께서 일어나시면 내게 연락을 넣도록.”
“예.”
댄버스 부인이 발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른 새벽, 아가씨의 침실 벨 소리를 들은 티아가 침실에 들어섰다.
메닝엔 공작이 아가씨의 침실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은근히 긴장한 채였다.
하지만 티아가 문을 열었을 때는.
<……아가씨?>
메닝엔 공작은 어디 가고 아가씨만이 홀로 남아 침실을 지키고 있었다.
<쉿.>
창백한 얼굴의 아가씨는 티아에게 편지 하나를 쥐여 주었다.
<이걸 비밀리에 바텐베르크 후작저에 들고 가. 들켜도 괜찮지만 편지만은 뺏기지 말고. 만약 들킨 것 같으면 멜리사에게 말해.>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는 티아는 잽싸게 바텐베르크 후작저로 달려갔다.
후작저의 하녀는 마치 소식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곧장 멜리사에게 편지를 전달해 주었고, 잠시 후 웬 천 주머니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다시 공작저로 돌아온 티아는 라모나에게 천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천 주머니 안에서는 입에 담기도 망측한 물건이 나왔다. 병에 담긴 액체였는데 남녀 간의, 아무튼, 뭐, 그런 거였다.
아가씨도 놀란 듯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멜리사는 정말…….>
<혹시 물건이 잘못 왔나요?>
<아니야. 너무 잘 와서 문제지.>
너무 잘 왔다고? 티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진 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라모나가 말했다.
<티아. 내일 나는 공작 각하와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낼 거야.>
<하지만 아가씨 공작 각하는…….>
<그러니 아무도 내 침실에 얼씬도 못 하게 해. 설령 브리튼이나, 댄버스 부인이 오더라도.>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모쪼록 아가씨가 너무 마음고생은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벽에 등을 기대고 선 티아가 엄지를 꼼지락거렸다.
티아는 영리한 하녀였고, 라모나의 명령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역시 영지의 일 때문이겠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티아가 굳은 얼굴로 라모나의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이내 티아는 씩씩한 얼굴로 다짐했다.
‘괜찮아, 티아. 너는 할 수 있어!’
공작 각하와 아가씨가 침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는 소문을 내는 것쯤이야. 티아에게는 껌 씹듯 쉬운 일이었다.
* * *
슈타이덴 백작저. 멜리사가 응접실로 향했다.
차분한 딥그린색의 드레스는 찰랑이는 그녀의 금발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내 그녀가 레이디 슈타이덴을 향해 우아한 인사를 건넸다.
“초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레이디 바텐베르크를 초대한 건 아니지. 레이디가 내 집 문을 아침부터 무작정 두드리지 않았나?”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걸요.”
“와우.”
레이디 슈타이덴이 어깨를 으쓱했다. 멜리사의 방문이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이만.”
멜리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알폰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군.”
“초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멜리사는 레이디 슈타이덴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투, 똑같은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에 앉았다.
알폰조는 미간을 찡그렸다. 머리를 한번 긁은 그가 멜리사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이 내 장례식이었나?”
뼈 있는 알폰조의 인사에도 멜리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아니지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뭐?”
당황한 알폰조의 눈이 커지자 멜리사가 피식 웃으며 슈가볼에서 각설탕을 꺼냈다.
“농담이에요.”
퐁당.
그녀는 설탕을 찻잔에 넣고는 티스푼으로 천천히 저었다.
“혹시 생각이 바뀌셨나 해서요.”
알폰조는 굳은 얼굴로 부인했다.
“그럴 리 없네.”
“아쉽네요.”
멜리사는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보기만 해도 달 것 같은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음미한 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오늘 라모나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이 이야기에는 좀 관심이 있으신가 보네요. 좋아요. 만약 라모나가 저를 이곳으로 보낸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나요?”
멜리사의 확신에 알폰조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무슨 일이지?”
“그 사람이 돌아왔다.”
“……!”
“……라고 말하면 황자 전하의 마음이 달라질 거라 하더군요.”
알폰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가 주먹을 꽉 쥐고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한숨을 내쉰 그가 멜리사에게 물었다.
“이 이야기를 또 아는 사람은?”
“없어요. 라모나는 워낙 영리하니까요. 저와 둘만 알아볼 수 있도록 편지를 썼더군요.”
멜리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모르니 아무 물품이나 보내 달라기에 좀 끝내 주는 걸 보내 주긴 했네요.”
“다행이군.”
알폰조가 눈에 띄게 안도하자 멜리사가 고개를 까딱했다.
“의외네요. 제 제안과 다를 바가 없는 이야기 같은데.”
“그녀가 내게 황위를 권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기 때문이지.”
“정말 세간의 소문대로 라모나를 마음에 담기라도 하신 건가요?”
“하아, 그런 게 아니라…….”
“그렇다고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뭐?”
알폰조가 굳은 얼굴로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멜리사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라모나를 정부로 들이고 싶다면 그리하셔도 돼요. 물론 어디까지나 라모나도 그러기를 원한다면요. 그래도 바텐베르크는 황자 전하를 지지할 거예요.”
알폰조가 피곤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모나의 소식을 전해 들은 후부터 유독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그대는 황위를 노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는 하는가.”
“글쎄요.”
“목숨이 세 개쯤은 되지 않고서야 쉽게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네.”
두 개도 아니고 세 개인 이유는 뭐람. 헛웃음을 삼킨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반대로 제가 묻고 싶네요.”
그녀가 알폰조를 향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그럼 수도에 와 계시는 이유는 뭐죠? 메닝엔 공작에게 접근하시는 이유는요?”
“무례하군. 그건 나의 사생활이야.”
“좋아요, 그럼 다른 걸 묻죠. 만약 황위를 노리지 않는다면 황자 전하의 목숨은 안녕한가요?”
“그건…….”
알폰조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멜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황자 전하를 방문한 사유는 이것 때문이에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라모나의 의견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계신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참고하도록 하죠.”
그녀가 알폰조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다음에 또 뵐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멜리사가 냉랭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때까지는 결론을 내리시기를 바라요. 몸만 컸지 우유부단한 황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