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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18화 (119/151)

#118화

메닝엔 공작저, 라모나의 침실.

영지 몰수 소식을 들은 라모나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로베르트는 그녀의 곁에 앉아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난번 일로 인해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고, 덕분에 영지와 인접한 레헨트 땅이 확보되어 있었다.

요하네스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 몰수를 강행한 이유는 분명.

‘나를 향한 경고야.’

하지만 그는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녀의 소중한 것을 물어뜯고, 할퀴고,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라모나가 입술을 꽉 깨물자, 로베르트가 차가운 물을 한 잔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물을 홀짝이고, 라모나가 숨을 고르는 사이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레헨트의 심부름꾼 말입니다.”

“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라모나의 되물음에 로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의미심장한 분위기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벤에게 무슨 일이 생겼군요.”

로베르트는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단 클라이스트 남매가 그 뒤를 쫓고 있습니다. 혹시 그 소년이 당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까?”

“과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니요. 사실 벤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어요. 각성제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그 정도는 레헨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죠.”

“다행이군요.”

다행이라는 로베르트의 말에 라모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 과거 속에서 벤은 죽었어요. 제가 왜 고작 평민에 불과한 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거라 믿어요.”

“그렇다면…….”

지난 생 라모나의 손에 피가 묻었음을 암시하는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라모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가 움직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도…….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칼로에에 다녀올 예정이라 했었죠?”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렇습니다만.”

“얼마나 걸릴까요?”

“이틀.”

“하루에는 불가능한가요?”

라모나의 질문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개자식 때문이군요. 일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보십니까?”

“예, 가능한 한 빨리요. 당장 오늘 밤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로베르트가 다리를 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라모나.”

“……예.”

“괜찮겠습니까?”

“예?”

“제가 없으면 보고 싶어서 못 참을 텐데요. 하루라도 안 보기엔 아까운 얼굴 아닙니까?”

역시 로베르트 메닝엔 다운 말이었다. 라모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게요.”

그녀의 대답에 로베르트는 숨을 멈췄다. 검은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라모나?”

“죄송해요. 제 불안을 당신에게 옮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라모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한참 만에야 그녀는 지금까지 꽁꽁 숨겨 온 진심을 슬그머니 꺼내 놓았다.

“두려워요.”

그녀의 말을 오해한 로베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요하네스가?”

“아니요.”

짙은 푸른빛의 눈동자가 로베르트를 응시했다.

“당신을 잃는 일이 두려워요.”

라모나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감정을 막아 둔 둑이 터지며 그녀의 불안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주제넘은 말을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당신이 떠나면 보고 싶어서 어떡하죠? 아니, 당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요.”

“라모나.”

“만약 요하네스가 당신을 부숴 버리기로 결심했다면……. 그게 전부 제가 당신을 택했기 때문이라면…….”

라모나가 파르르 손을 떨자 로베르트가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라모나를 불렀다.

“라모나.”

라모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턱이 시큰했다.

그녀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는 어떡하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끌어안았다.

어깨가 으스러질 듯 강한 포옹에서 라모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그녀에게, 로베르트는 속삭였다.

“기쁘군요.”

“……예?”

“당신이 나를 이렇게나 생각한다니. 조금 짜릿했습니다, 사실 많이요.”

눈을 찡긋한 그가 천천히 라모나의 등을 다독였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당장 서부 경계에서 복무하라고 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제넘은 말이라 하지 말아요. 나의 사랑, 당신이라면 내게 무슨 명령이라도 할 수 있으니.”

라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왜 없습니까? 무려 푸른빛이 보증한 저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게 정말 제 마음인지도 모르잖아요. 푸른빛 때문인 건데.”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맙소사, 제가 걱정해야 할 일을 왜 당신이 걱정합니까? 안 그래도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매일 눈을 굴리느라 제국에서 제일 잘생긴 가자미가 될 지경인데.”

너스레를 떤 로베르트가 장난스레 라모나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것까지는 뭐, 푸른빛의 탓인 걸로 하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로베르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이거 하나는 기억하시죠.”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오늘따라 그의 눈가에 찍힌 눈물점이 선명했다.

“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의지입니다.”

로베르트의 말에 라모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베르트?”

“제가 빌었던 소원은 어디까지나 당신이 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사랑이 아니라.”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그녀의 사랑 따위는 언제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듯 당당한 미소였다.

저런 점이 참 재수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저런 점이 또 매력으로 느껴지니.

재수 없는 변태 또라이. 그럼 저 남자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는 뭘까.

‘나도 참 제정신은 아니구나.’

라모나가 헛웃음을 삼키는 사이 로베르트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또다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로베르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 정도는 친분 있는 사이에서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렇죠?”

그는 소파에 앉은 라모나를 들어올려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깜짝 놀란 라모나가 그를 타박했다.

“미쳤어요?”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미쳤다고.”

로베르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쳤다 정도면 허락이지. 그렇고말고.”

이내 그의 입술이 라모나의 이마에 닿았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입술이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

“이 정도는 친애하는 사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죠.”

위로의 손길로 다독이던 로베르트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등을 움켜쥐고 있었다.

‘너무…….’

가까워.

그의 숨에 담긴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살짝 내렸다.

그녀가 바짝 긴장한 것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이 다음은 어디일 것 같습니까?”

뱃속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자, 로베르트는 짓궂은 아이처럼 그녀의 코를 살짝 물었다.

“아!”

미미한 통증에 라모나가 미간을 찡그리자 그는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삼켜 버렸다.

“으읍.”

그가 라모나의 뒷덜미를 붙들자 균형을 잃은 라모나가 로베르트 쪽으로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말캉한 살덩이를 느낀 로베르트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하.”

그의 몸이 단단해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지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로베르트가 미간을 찡그리며 그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놀랄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당신에게 미쳐 있는데.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저를 변태라 부르던가요.”

이윽고 입맞춤이 더욱 격렬해졌다. 라모나의 얼굴도 달뜨기 시작했다.

침실 안의 공기는 머리가 아플 만큼 아찔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집요하게 라모나를 탐색하던 로베르트는 이내 그녀에게서 입술을 뗐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신이 안다면 절대 그렇게 쉽게 날 변태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홀린 듯 로베르트를 바라보던 라모나가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하아.”

고개를 뒤로 젖힌 로베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아닌 다른 곳에 입을 맞추면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쾌락에 들뜬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리고…….”

무언가를 망설이듯 로베르트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라모나를 끌어안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바네사 황녀마저 당신과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면 요하네스 또한 불안하군요. 오늘 밤 당장 떠나겠습니다.”

무언가를 간신히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의 등을 어루만지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로베르트.”

“예.”

“참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녀의 허락에 로베르트의 손이 움찔했다. 이내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의 불안을 내 욕구에 이용하고 싶지 않아.”

요하네스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순간 라모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잠시 라모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은 그는 이내 고개를 들고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말 잘 듣는 어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오늘의 일 이상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저보고 기대하라는 말이에요?”

“당연한 말씀을.”

“변태.”

라모나의 반응에 로베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로베르트의 손목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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