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17화 (118/151)

#117화

댄버스 부인의 등장에 당황한 라모나가 얼른 로베르트를 밀어냈다.

“이런.”

아쉬운 한숨을 내쉰 로베르트는 그녀의 목 뒤에 입을 한번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황궁의 심부름꾼이 황태자 전하의 초대장을 들고 저택을 방문했습니다.”

“이 시간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예. 그런데…….”

댄버스 부인은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각하가 아니라 레이디께 온 초대장입니다.”

‘요하네스가…… 나를……?’

쿵.

요하네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라모나의 심장이 또다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거절하도록 해.”

“레이디, 하지만.”

“몸이 안 좋아서 어렵다고.”

숨이 턱 하고 막힌 그녀가 천천히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전하도록 해.”

댄버스 부인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안색을 눈치챈 로베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모나의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지. 그러니 황실 무도회도 끝마치지 못하고 귀가하지 않았나.”

“……예. 그럼 초대를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댄버스 부인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라모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로베르트는 말없이 뒤에서 그런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저 한 번의 거절일 뿐이야. 별일 없겠지.’

아직 요하네스는 그녀에게 집착하지 않으니 지난 생처럼 그녀에게 벌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라모나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황제는 벤트하임 공작가가 신청한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의 영지 몰수를 허가했다.

* * *

벤트하임 공작저. 미카엘라는 느긋한 손길로 귀걸이를 골랐다.

“음, 이건 나와 잘 안 어울리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붉은 루비 귀걸이를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귀걸이를 훑어보던 미카엘라가 엄지만 한 크기의 진주 귀걸이를 꺼내 들었다.

“이건 너무 소박하려나?”

미카엘라의 중얼거림에 하녀들은 얼른 보석함에서 화려한 귀걸이들을 찾아 앞쪽으로 위치를 변경했다.

미카엘라는 심사숙고 끝에 옅은 하늘빛이 감도는 사파이어 귀걸이를 꺼내 들었다. 요하네스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하녀들에게 물었다.

“이건 어때?”

벤트하임 공작가의 하녀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오늘 입고 가실 드레스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렇지? 오늘 황태자 전하를 만나러 갈 거거든.”

미카엘라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황후의 극찬을 받은 데뷔탕트와 요하네스의 식사 초대까지.

온 세상이 제 손안에 들어온 기분에 미카엘라는 행복해졌다.

‘그러게 라모나 그 계집애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황실 무도회가 열리던 그 날, 요하네스는 그녀에게 벤트하임 공작에게 말을 전하라고 명령했다.

황제 폐하에게 아이젠부르크의 영지를 몰수하라 청하라는 말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황태자도 모자라 벤트하임 공작까지 나섰는데 고작 자작가 하나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안쓰러워라. 미카엘라는 진심으로 라모나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하던 대로 벤트하임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왜 욕심을 부렸을까. 주제도 모르고.’

그녀는 지금이라도 라모나가 정신을 차리면 너그럽게 받아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랜 친구니까.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었다.

‘그런데 영지도 없는 귀족을 귀족이라고 할 수 있나?’

좀 우습네. 쿡. 미카엘라가 웃음을 터뜨리자 하녀들은 영문도 모르면서 같이 웃으며 장단을 맞췄다.

이윽고 그녀가 벤트하임 공작저를 나섰다.

세상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는 황태자궁에 도착했다.

요하네스는 미카엘라를 발견하고는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뭐랄까 조금.

‘평소와 달라 보이시는데……?’

섬뜩한 기분에 미카엘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기분 탓이겠지. 애써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 낸 미카엘라는 활짝 웃으며 요하네스에게 다가갔다.

“전하.”

묘한 눈으로 미카엘라를 바라보던 요하네스는 이내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미카엘라. 오늘도 아름답군.”

요하네스의 칭찬에 미카엘라의 얼굴에 주체할 수 없이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행복해.

그녀는 제게 주어진 달콤한 성취를 만끽했다.

* * *

“뭐? 영지를?”

아이젠부르크의 영지 몰수 소식을 들은 에드윈이 욕설을 겨우 삼켰다.

‘미치겠네. 뭐가 이렇게 많이 터져.’

안 그래도 벤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방금 전해 들은 터였다. 에드윈이 짜증스레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는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고작 평민 애송이에 불과하다. 납치당하든, 죽든 사실 에드윈의 알바는 아니었다.

‘뭐, 그냥 스파이 노릇 하던 게 걸린 걸 수도 있지.’

어쩌면 그래서 그 놈들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납치를 시도하지 않은 것 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리들을 다 죽이고 화재로 위장한 것도 이해가 갔다.

‘설령 걸렸다 해도 중요한 내용을 알려준 건 없으니까 크게 문제 될 건 없겠군.’

오케이 좋아, 이건 문제없고. 벤의 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에드윈은 다시 오늘 아침에 들은 따끈따끈한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능구렁이 황제가 왜 벤트하임의 손을 들어줬을까나.”

요하네스와 벤트하임의 협력이 점점 견고해져 가는 상황에 에드윈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대로라면 베르나딘 황자 전하가 밀려도 너무 밀리는데.’

정통성을 토대로 공고한 위치를 다지고 있는 요하네스. 거기다 군부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알폰조.

이들처럼 뚜렷하게 내세울 것을 가지지 못한 베르나딘에게 가장 강력한 카드는 바로 로베르트 메닝엔으로 대표되는 정치력이었다.

그렇기에 바네사 황녀와 로베르트의 약혼으로 베르나딘의 세력을 끌어올리려고 했는데.

“쯧.”

에드윈이 혀를 찼다.

‘각하께서 베르나딘 황자 전하를 미는 게 아니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는 곤란하다.

‘바네사 황녀님과 파티라도 한번 다녀오시라고 말하면 내가 죽으려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이려나. 한숨을 삼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슈타이덴 백작저. 서부 경계의 보고서를 받은 알폰조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레이먼이 보고서를?’

무슨 일이지. 긴박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 예상한 그가 묵묵히 보고서를 펼쳐보았다.

레이먼의 보고서는 특정 상황에서만 쓰는 암호로 작성되어 있었다.

서부 경계의 사람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고서가 발각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었다.

보고서에는 놀라운 내용이 적혀있었다.

암암리에 각성제가 퍼지고 있으며, 그 배후에 벤트하임 혹은.

‘메닝엔이 있을 수 있다, 라.’

역시 레이먼이군. 알폰조가 헛웃음을 쳤다.

듣고 보니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회귀 전, 지금의 메닝엔 공작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던 어느 날.

<사령관님! 환수가 움직였습니다!>

서부에 웅크리고 있던 환수가 몸을 일으켰다.

<당장 경계 태세를 갖추라 명하도록. 장기전이 될 테니 부대별로 3개의 중대로 나눠 교대한다.>

<존명.>

서부 경계의 환수는 아주 오래된 재난과도 같은 존재였다. 한낱 인간이 환수를 물리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고작 막아 내는 것이 전부. 하지만 알폰조는 노련한 사령관이었고 환수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조금…… 이상하군.>

그날따라 병사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병사들은 평소와 달리 초인적인 힘을 내어 가며 환수를 막아 냈다.

<으아아! 제국을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정확히 말하자면 막아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그보다 더 나아가 환수를 공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자리를 지켜! 환수는 우리가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전과는 다른 흐름에 알폰조의 가슴에 불안함이 차올랐다.

그는 단순히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사령관님! 병사들이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뭐?>

<기력을 모두 소진한 듯합니다.>

<……빌어먹을.>

힘을 과하게 짜낸 병사들은 허수아비처럼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들으며, 급기야 동료들을 공격하는 일마저 벌어지기 시작했다.

끔찍한 살육이었다.

결국 서부는 전례 없는 큰 피해를 입었고, 알폰조는 그 일에 대한 책임으로 사령관 직책을 내려놓고 수도로 귀환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전장에 복귀했을 때에는.

‘레이먼이 실종되어 있었지.’

그는 당시의 일을 전장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단순한 스트레스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다면…….

‘누가 배후에 있던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요하네스.’

설마 지난 생에 그가 서부까지 손을 뻗었던 것인가.

분노한 알폰조가 소리 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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