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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16화 (117/151)

#116화

Chapter 13.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들

레헨트, 벤의 집.

우웨엑. 적나라한 소리와 함께 먹은 걸 모두 게워 내는 마부를 벤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아저씨?”

마부는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탈진한 그가 침대까지 걸어갈 기력도 없어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죽겠다, 아주. 위아래로. 그냥 물이야 물. 무슨 설거지한…….”

“아, 더러운 얘기 그만해요.”

“짜식, 새침하게 굴기는.”

벤을 툭 치는 마부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다. 벤이 혀를 끌끌 찼다.

“배탈 한번 제대로네요. 여름에는 진짜 청어 먹지 말아야겠다.”

“하여간 주방장 그놈 얼굴이 뺀질거리는 게 영 수상쩍다 했어. 음식가지고 장난질을 치다니 돌아가는 길에 한 대 쥐어패 줄 테다.”

“그럼 가는 길에 저는 좀 빼 줘요.”

“이 자식 의리 없는 것 봐.”

킬킬거리며 웃은 마부가 이내 자신의 팔을 끌어안았다.

“근데 여기 왜 이렇게 춥냐.”

오들오들 떠는 마부를 보며 벤이 고개를 갸웃했다.

“춥다고요? 더운데?”

“아닌데, 온몸이 아주 으스스한데.”

“침대에 누워요, 이불이라도 가져다줄게요.”

바닥에서 혼자 힘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마부를 부축하던 벤이 흠칫하고 놀랐다.

‘몸이 왜 이렇게 뻣뻣해.’

제대로 탈이 났나 보네. 벤은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부는 한여름에 이불까지 덮고도 덜덜 떨었다. 식은땀이 벤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는 애써 괜찮은 척 벤에게 말을 걸었다.

“동생들이랑 산다고 하지 않았냐?”

“아아, 네. 그렇긴 한데.”

바이스카스텔에서 지내고 있는 동생들을 떠올린 벤이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라모나 측에 소식을 전달한 지 꽤 됐다. 동생들이 걱정된 벤이 한숨을 삼켰다.

기진맥진한 마부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축 늘어진 그가 정체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으, 어머니, 으으 마차가…….”

“자요?”

“으으으…….”

힐끔.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냐? 덜컥 겁이 난 벤이 마부를 살폈다.

숨은 쉬고 있다. 다행히 그냥 잠꼬대인 모양이었다. 동생 생각이 난 벤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가도 모르겠지?’

얼른 돌아오자. 벤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섰다.

끼이익.

주변을 살핀 벤은 얼른 바이스카스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때.

“읍, 으읍, 으으으읍!”

누군가가 벤의 얼굴에 자루를 덮어씌웠다.

“으읍!”

의문의 인물은 벤의 뒤통수를 내려쳤고.

퍽.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벤은 의식을 잃었다.

* * *

메닝엔 공작저에는 고요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라모나를 대하는 클레멘스의 태도가 눈에 띄게 쌀쌀해진 탓이었다.

‘어쩔 수 없지.’

라모나는 그의 태도를 이해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는 로베르트와는 소위 급이 맞지 않는 약혼녀었다.

게다가 레헨트를 약혼 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클레멘스가 그녀의 의도를 오해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멜리사의 일과 맞물려 머리가 아파진 라모나가 한숨을 쉬며 침실로 돌아왔다.

어두운 그녀의 안색을 살핀 티아가 조심스레 라모나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아가씨,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무슨. 머리 좀 풀어 줄래?”

“네!”

티아가 헤센 백작저의 티파티 콘셉트에 맞게 한쪽으로 땋아 늘어뜨린 라모나의 머리에 꽂힌 생화를 뽑아내던 때였다.

툭.

침실 창문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응?’

“티아, 방금…….”

“예, 저도 들었어요.”

뭐지.

수상한 예감에 라모나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또다시.

툭.

둔탁한 무언가가 침실 창문을 두드렸다.

‘낌새가 이상한데.’

라모나와 티아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가씨, 창문을 한번 열어 볼까요?”

“글쎄. 그거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

라모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밖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의 사랑! 나의 천사!”

그럼 그렇지. 라모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로베르트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랑의 열기가 내 존재를 뒤흔드는군요!”

라모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다. 어디 가서 오페라라도 보고 왔나 보네.”

“꺅,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이네요.”

“……거기에 저런 대사 있었던 것 같아.”

“흐뭇하네요. 어쩜 로맨틱해라.”

“로맨틱하다고? 저게?”

“네! 아가씨랑 공작 각하도 딱 그거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다!”

원수라니. 틀린 말은 아닌데 기분이 오묘했다.

‘으음, 정확히 말하면 원수의 가신인가?’

라모나가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신이 난 티아는 양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럼 이제 그거네요.”

“……뭔데.”

“사랑의 세레나데요!”

세레나데? 잠깐만, 세레나데라고?

‘저기서 나를 위한 사랑의 노래를…….’

상상만 해도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벌컥.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정말로 쩌렁쩌렁하게 노래를 부르기 전에 침실 창문을 열었다.

“거기서 기다려요!”

후두둑.

라모나의 머리에 꽂혀 있던 꽃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 홀린 듯 라모나를 바라보던 로베르트는 한껏 예쁜 미소를 지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오! 나의 사랑. 당신은 마치 밤의 요정 같군요. 당신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입 다물고 거기서 딱 기다려요! 노래 부르면 용서 안 해요!”

저 남자에게 오페라를 보여 준 사람이 대체 누굴까.

황제 폐하라도 가만 안 둬. 라모나는 이를 갈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 *

그가 사랑의 세레나데를 열창하기 직전, 라모나는 정원에 도착했다.

로베르트는 그녀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왜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게 합니까.”

“그런 건 제발 단둘이 있을 때나 하세요.”

“흠.”

턱을 만지작거리던 로베르트가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지금은 단둘이니 괜찮습니까?”

괜찮겠냐. 라모나가 싸늘한 눈빛을 날리자 로베르트가 곱게 눈을 휘었다.

“아니면 뭐, 다른 거라도?”

“뭐든 하지 마세요. 가만히 계세요. 가능하다면 숨만 쉬셨으면 좋겠어요.”

“하아아, 라모나.”

로베르트가 목 부분의 단추를 풀어 헤치며 밭은 숨을 내뱉자 기겁한 라모나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숨도 쉬지 마세요.”

“으으으으읍.”

로베르트가 입술을 달싹이며 라모나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아찔한 기분에 화들짝 놀란 라모나가 손을 뗐다.

“미쳤어요?”

“저야 항상 당신에게 미쳐 있습니다만.”

라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를 앞서 나가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피식 웃은 로베르트가 그녀를 따라잡았다. 살며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로베르트가 물었다.

“헤센 백작저의 티파티는 어땠습니까?”

“무척이나 아름다웠어요. 마치 요정들이 나올 것 같았죠.”

“요정이라면 메닝엔 공작저에도 있습니다.”

“예?”

뭔 소리야?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리자 로베르트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바로 제 눈앞에.”

“신이시여.”

“항상 신을 찾는 신실한 요정이…….”

“진짜 죽일까.”

라모나의 살벌한 기세에 로베르트는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조만간 영지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영지라면…… 칼로에인가요?”

“예. 사교 시즌이긴 합니다만. 이 이상의 변수가 생기기 전에 다녀오는 게 좋을 듯해서요.”

옳은 선택이다. 라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닝엔의 이름 아래 수많은 영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땅은 단연 칼로에였다.

레오벤 제국은 대륙 전쟁을 통하여 세워졌다. 초대 메닝엔 공작은 그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공작위와 함께 칼로에를 하사받았다.

옛 왕국 이베네의 땅으로, 시간의 신이 잠들었다는 설화가 내려오는 곳이었다.

‘그냥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자신이 시간을 되돌아온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푸른빛의 원인이 신의 성물일 것이라 짐작하는 이유가 있으세요?”

“그냥 감입니다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게 제가 아는 가장 비현실적인 힘을 가진 물건이라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요.”

라모나는 생각에 빠졌다.

만약 정말 신의 성물이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라면. 하필 라모나와 알폰조, 그리고 바네사가 회귀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과 나의 공통점이 뭐지.’

모두 요하네스에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바네사 황녀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메닝엔의 소유인 성물이 요하네스에게 반응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야.’

알 듯 말 듯한 실마리가 그녀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라모나가 심각한 표정을 풀지 못하자 로베르트가 힐끔, 그녀를 살폈다.

이내 그는.

쪽.

기습적으로 라모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꺅!”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한 그녀가 로베르트의 등을 후려쳤다.

“왜 이래요!”

“죄송합니다. 제 주둥이를 제어할 수 없는 바람에.”

주둥이라는 자각은 있냐. 있냐고. 라모나가 울상인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베르트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 이렇게 아름다운 저와 단 둘이 있는데. 자꾸 다른 생각에 빠져 있으니…….”

그가 라모나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속삭였다.

“도무지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라모나와 바짝 붙은 그에게서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듯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티아는 역시 틀렸다.

세상에 이렇게 능글맞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도 제 침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숨 쉬는 것만으로도 매혹적인 로미오가 어디 있겠는가.

‘아.’

뱃속이 간지러운 기분에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여기서 왜 그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자는 결론이 난단 말인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분명한데도 저 얼굴로 말을 하니 말이 된다.

‘……나 얼굴 보나?’

아니면 설마 얼굴만 보나? 라모나가 자괴감에 빠지려던 사이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던 로베르트의 손이 미끄러지듯 허리로 내려갔다.

“싫으면 거절하셔도 되기는 하는데…….”

입술을 혀로 축인 그가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개수작 부리는 중이라는 건 좀 알아주시길.”

낮은 목소리가 놀랍도록 달콤했다. 귓가를 간지럽히던 숨결은 이제 그녀의 목덜미 부근을 맴돌기 시작했다.

‘뜨거워.’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삼킨 라모나가 눈을 꼭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나른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던 때였다.

“각하.”

시녀장, 댄버스 부인이 다급한 얼굴로 그들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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