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슈타이덴 백작저. 식탁에 앉은 채 깊은 고민에 빠진 알폰조를 바라보는 레이디 슈타이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제 무도회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알폰조를 향해 포크를 까딱했다.
“알폰조?”
“아,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그리 정신을 팔고 있어. 혹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일 때문이니? 메닝엔 공작이 어제…….”
“하아, 어머니. 그녀와는 정말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럼 레이디 바텐베르크?”
멜리사의 이야기가 나오자 알폰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쪽 또한 아닙니다.”
“뭔가 있는 모양이구나.”
“…….”
알폰조는 해명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레이디 슈타이덴은 손가락으로 톡톡, 식탁을 두드렸다.
이내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폰조.”
“말씀하시죠.”
“레이디 바텐베르크와는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칫 황위를 노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알폰조 또한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작 레이디 바텐베르크는 내게 그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단순히 사교계에서 레이디 벤트하임에게 뒤진 것에 대한 복수심이겠지.’
애써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생각을 끊어 낸 알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메닝엔과 엮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란다. 하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눈이 맞는다면 메닝엔과 원수가 되는 거니 그건 괜찮으려나.”
또 라모나와 알폰조를 엮으려 하는 레이디 슈타이덴의 말에 알폰조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피식 웃은 레이디 슈타이덴이 나이프를 들어 우아하게 송어구이를 썰었다.
“농담이란다. 사실 무슨 방식으로든 메닝엔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좋지.”
며느리도 죽이는 사람들이니. 그녀가 이를 악물고는 중얼거렸다.
오늘 레이디 슈타이덴은 커다란 담수 진주를 알알이 꿴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로켓 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살피던 알폰조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레이디 슈타이덴은 칼질을 하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왜, 목걸이가 보이지 않니?”
시선을 읽힌 알폰조의 눈이 커졌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도 네 말이 옳다고 여겼단다. 괜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온몸으로 보여 줄 필요는 없지.”
레이디 슈타이덴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바라보는 선대 메닝엔 공작의 눈빛이 심상치 않더구나. 벌써 그렇게 미움을 사기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달그락.
레이디 슈타이덴이 양손에 쥐고 있던 커트러리를 내려놓았다.
“선대 메닝엔 공작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
그녀는 무언가를 망설이듯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와인 잔을 들었다.
홀짝.
물이라도 마시듯 와인을 연거푸 홀짝이던 레이디 슈타이덴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마리안느라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의미심장한 그녀의 혼잣말에 알폰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
“알폰조, 너도 마리안느를 기억하니?”
“어렴풋이 기억은 납니다만, 어린 시절이라 희미합니다.”
“아쉽구나. 아들과 추억이라도 나눠 볼까 했더니.”
그녀가 와인 잔을 손으로 감쌌다.
“난 메닝엔 공작이 참 싫어. 마리안느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거든. 그 어린 게.”
냉소적인 헛웃음을 친 레이디 슈타이덴이 또다시 와인을 들이켰다.
잔을 다 비우고 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거 아니, 알폰조?”
까드득.
친구의 죽음을 떠올린 레이디 슈타이덴이 이를 악물었다.
“마차 사고가 났던 그때, 즉사한 건 리안드로뿐이란다.”
“……!”
미처 몰랐던 마리안느의 죽음에 얽힌 비밀에 알폰조의 눈이 커졌다.
“마리안느는 살아 있었어. 그러니 그 애가 내게…….”
레이디 슈타이덴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습관처럼 로켓 목걸이가 있던 자리를 더듬거리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다시 눈을 뜬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알폰조, 정녕 네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마음에 둔 것이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고백해. 선대 메닝엔 공작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도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기 전에.”
레이디 슈타이덴은 붉은 입술을 짓이기고는 말을 이었다.
“……괜히 황태자에게 황위를 노린다는 오해나 사지 말고.”
그녀는 라모나를 생각하는 척 입을 열었지만, 결국 새어 나오는 진심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녀가 내뱉지 못한 말이 알폰조의 귀에는 생생히 들렸다.
마리안느에 이어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구나, 알폰조.
‘……젠장.’
그런 레이디 슈타이덴의 모습에서 알폰조는 지난 생, 그녀의 죽음을 떠올렸다.
* * *
메닝엔 공작저, 헤센 백작저에서 돌아온 라모나와 유디트를 맞이한 것은 뜻밖의 사람이었다.
“클레멘스?”
클레멘스를 발견한 유디트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어쩐 일이에요. 클라이스트 백작을 만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야 공작의 일이지. 나 같은 늙은이가 아니라.”
클레멘스는 자연스레 유디트를 에스코트했다.
어정쩡하게 홀로 남은 라모나는 집사 브리튼이 도왔다. 브리튼의 도움으로 마차에서 내린 라모나는 클레멘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님.”
라모나의 말에 클레멘스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여보?”
유디트가 나무라듯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클레멘스는 라모나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나를 그런 호칭으로 부르기엔 너무 이른 것 아닌가.”
명백하게 선을 긋는 클레멘스의 태도에 곁에 선 유디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역시…….’
레헨트 일부터 미움을 사고 있는 것 같네. 라모나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그 뒤를 따랐다.
‘차라리 그 남자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헤센 백작저의 일부터 클레멘스의 일까지. 오늘따라 유독 하루가 길었다.
* * *
황태자궁.
“레이디 벤트하임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보고에 황태자궁의 시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요하네스는 평소와는 달리 늦은 시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황태자궁의 사용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괜히 침실에 들어가서 요하네스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순식간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탓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가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고뇌하는 황태자궁의 시녀장에게 데미안이 다가가 말했다.
“세수하실 물은 내가 전해 드리도록 하지.”
데미안이 직접 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탁드립니다.”
시녀장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똑똑.
그가 요하네스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전하.”
“……데미안.”
유달리 낮게 가라앉은 대답이 돌아오자 데미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들어가겠습니다.”
데미안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요하네스는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데미안을 바라보던 그는 데미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이내 요하네스가 데미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
데미안은 묵묵히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요하네스에게 건넸다.
단검을 받아 든 요하네스는 돌연.
푹.
자신의 엄지를 찔렀다.
상처에 송골송골 붉은 피가 맺히기 시작하자 요하네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것, 하하, 하하하.”
한참 동안 배를 붙잡고 웃음을 터뜨리던 그는 돌연 뚝, 웃음을 그쳤다.
“데미안.”
“예, 전하.”
“어제가 황실 무도회였던가.”
“그렇습니다.”
“참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군.”
황실 무도회라면 매년 있는 일인데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요하네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꽤나 늦었구나, 네가 온 것을 보아하니 손님이 온 모양이야. 레이디 벤트하임인가?”
“예.”
“쯧, 시킨 일은 잘 처리한 건지 모르겠군.”
그 여자가 멍청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중얼거린 요하네스가 이윽고 종을 울려 사용인들을 불렀다.
“헉, 저, 전하.”
그의 손에서 나는 피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기겁하며 지혈하는 사이, 요하네스는 태연한 얼굴로 데미안을 불렀다.
“데미안.”
“예, 전하.”
“서랍 속의 편지를 모조리 불태우도록.”
의외의 명령에 데미안이 눈썹을 꿈틀했다. 편지의 내용은 몰라도 요하네스가 그 편지를 몇 번이고 살펴본다는 것은 데미안도 알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태워 버려.”
요하네스의 얼굴에 느긋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 전부 쓸모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