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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14화 (115/151)

#114화

다음 날 아침.

“으음…….”

간지러워. 라모나는 그녀의 뺨을 맴도는 손길에 잠을 깼다.

“티아?”

“예.”

절대 티아일 리가 없는 낮은 목소리가 달콤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라모나는 어젯밤 자신이 로베르트의 침실에서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눈을 깜빡이자 뿌옇던 시야가 맑게 갰다. 이내 낯 뜨거운 풍경이 라모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굵은 목선 아래로 움푹 파인 쇄골과 널찍한 어깨. 그리고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새긴 조각 같은…….

‘아냐, 라모나. 보지 말자. 자꾸 이러면 너도 저 남자랑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아이젠부르크의 수치가 될 순 없지. 굳게 다짐한 그녀가 슬그머니 눈을 돌리며 로베르트를 타박했다.

“왜 대답을 하고 그러세요.”

“그냥 좋아서요.”

“뭐가요?”

“당신이 제 침대에 있는 것이?”

그의 눈이 야릇하게 휘었다.

‘눈웃음치는 거 습관인가 봐.’

라모나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로베르트는 그녀 쪽으로 몸을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물었다.

“왜 그건 안 물어봅니까, 내 사랑?”

“또 뭘요?”

“왜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지.”

“모, 몰랐어요.”

“거짓말. 그렇게 낱낱이 훑어봤으면서.”

분하지만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라모나의 침묵에 로베르트의 얼굴에는 지독하게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을 유혹하려고 이러고 있었는데 몰라주니 서운하군요.”

맙소사. 라모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세요?”

“혹시 압니까? 이러다 당신이 또 내 목에 입이라도 맞춰 줄지.”

쪽.

이번에는 라모나의 목에 로베르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이렇게.”

그의 눈이 그윽하게 가라앉았다.

아침부터 마주하기에는 너무 야릇한 눈빛에 라모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또는 아닌가. 어제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어제의 일을 떠올린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벌떡.

“라모나?”

“어머. 내,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혼신의 발 연기를 시전했다.

“헤센 백작저에서 티파티가 있는데 깜빡할 뻔했네요. 호, 호, 호.”

로베르트는 여유롭게 옆으로 누운 채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까딱했다.

“잘 다녀오시죠, 나의 천사.”

그리고 짓궂게도 덧붙였다.

“밤에 봅시다.”

라모나는 고민했다.

‘저 남자…….’

진짜 연애 안 해 본 거 맞나? 사실 남몰래 한 200명쯤 만나 본 거 아냐?

* * *

헤센 백작저.

“라모나!”

도리스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라모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와 줘서 고마워요. 사실 저는 라모나가 오늘 안 올 줄 알았거든요. 앗! 나쁜 의미는 아니고, 아무래도 어제…….”

도리스의 말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멜리사가 단칼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와 줘서 고맙다니. 누가 보면 도리스가 이 파티의 호스트인 줄 알겠네요.”

“어머, 그러게요! 실수했네.”

눈이 휘둥그레진 도리스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지난번, 함께 할 자리를 정하던 때. 헤센 백작가의 티파티는 꼭 가고 싶다는 도리스와 쓸데없이 돌아다니기 싫다는 멜리사는 갈등을 빚었다.

<너무해요, 멜리사! 그거 한 번 가 준다고 발이 닳는 것도 아니고!>

<혼자 가요.>

<그럼 재미가 없잖아요!>

<그럼 가지 말든가.>

<라모나는요? 라모나는 가고 싶지 않아요? 헤센 백작저 정말 멋지다고요!>

도리스의 질문에 라모나는 말끝을 흐렸다.

<음…….>

가 보고 싶기는 한데, 도리스와 단둘이 가면 너무 피곤할 것 같다.

결국 라모나는 슬그머니 멜리사를 끌어들였다.

<멜리사가 가면 저도 갈게요.>

<꺄아아! 좋아요! 그럼 우리 셋이 가는 거죠? 맞죠?>

멜리사가 간다고 한 적도 없는데 신이 난 도리스가 발을 동동 구르자 멜리사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라모나,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너무하네요.>

<같이 가면 좋지 않겠어요?>

<귀찮은 건 아니고요?>

<…….>

아무튼 도리스 덕분에 오게 된 헤센 백작저의 티파티.

라모나는 아직도 옥신각신하는 도리스, 멜리사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져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졸졸졸.

청량한 물소리가 들렸다.

헤센 백작저는 특이하게도 담장 뒤에 강을 끼고 있는 구조였다. 강을 사교 모임에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헤센 백작 부인은 담을 헐고 뒷문을 냈고, 물 위에 마치 인공 섬 같은 멋진 테라스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도리스가 헤센 백작저의 티파티를 고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와.’

아름다운 풍경에 라모나는 감탄했다.

물 위에 피어난 하얀 수련이 테라스를 빙 두르고 있었고, 레이스로 된 차양이 달린 지붕에는 등나무 넝쿨이 매달려 보랏빛 꽃잎을 뚝뚝 떨어뜨렸다.

‘사실 와 보고 싶기는 했는데.’

헤센 백작가는 메닝엔 공작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니 벤트하임의 가신이었던 라모나로서는 헤센 백작저를 방문하기 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난 생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사교 시즌 일정에 라모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수련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당연히 어제의 일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라모나가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을 그 때.

“라모나.”

유디트가 그녀를 불렀다.

어제의 일을 질책하기 위함일까? 라모나가 긴장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유디트가 장난스레 고개를 저었다.

“로베르트 그 녀석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도무지 그 녀석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친근한 호칭, 그리고 어제의 일을 로베르트의 탓으로 돌리는 대화 내용.

라모나는 유디트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녀가 자신에게서 마리안느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궁둥이 한 번쯤 걷어 차도 모른 척해 주마.”

아마도 이것은 유디트가 마리안느에게 해 주지 못했던 방식의 지원이리라. 가라앉은 얼굴의 라모나는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찻잔을 든 헤센 백작 부인이 유디트를 향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하여간 공작 각하는 짓궂기도 하지. 덕분에 어제 레이디 벤트하임이 황후 폐하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게 돌아다니는 모습만 실컷 봤지 뭐예요.”

“그러게 말이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있었다면 분명 황후 폐하의 눈빛도 달랐을 텐데 말이지.”

그들은 라모나의 편을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카엘라와 라모나를 같은 급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사람들은 재빨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유디트에게 잡혀있다 돌아온 라모나에게 멜리사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제 레이디 벤트하임이 꼴불견이긴 했어요.”

그녀가 빈정대듯 덧붙였다.

“뭐, 다른 날도 항상 꼴불견이긴 하지만.”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네요.”

라모나의 말에 멜리사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멜리사가 한층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라모나, 지난번에 말하지 못한 부탁을 지금 하려 해요.”

“……좋아요.”

“제가 원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황태자비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건 제가 어떻게…… 아!”

이제야 멜리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의 낌새를 눈치챈 멜리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는 누구처럼 요하네스 전하와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라서요.”

“멜리사, 그건…….”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제 생각보다 더 엄청난 부탁이네요.”

* * *

서부 경계 아이티아르.

“야, 진짜 괜찮겠냐?”

콜린의 질문에 레이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남들 다 하는 건데 뭐 어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수상한 약이잖아.”

“일단 받아보고 버리면 되지. 하여간 겁만 많아가지고.”

레이먼은 콜린을 비웃었지만 속으로는 친구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수상해.’

벤트하임의 끄나풀, 사무엘 크뤼거가 각성제를 판매한다니. 수상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다행히 사무엘 크뤼거는 레이먼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기분 좋다고 쏟아붓지 마. 그러다 골로 가면 나만 곤란해지니까.”

“누굴 바보로 아나.”

레이먼이 코웃음 치자 사무엘 크뤼거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메닝엔 공작가와 연이 닿았다고 기세등등해졌네. 아, 이것도 그냥 너희 누님에게 부탁하지 그래?”

“……뭐?”

“이거.”

사무엘 크뤼거가 각성제가 담긴 흰 종이봉투를 흔들었다.

“레헨트 산인데, 몰랐어?”

의미심장한 사무엘 크뤼거의 말에 레이먼의 눈이 커졌다.

“그게 지금 무슨 말…….”

레이먼이 사무엘 크뤼거를 추궁하려던 때였다.

화들짝 놀란 콜린이 팔꿈치로 레이먼의 옆구리를 마구 쳤다.

“야, 야. 당직 떴다. 야, 빨리.”

이를 악문 레이먼이 사무엘 크뤼거를 한번 노려보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그날 밤, 레이먼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레이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메닝엔 공작이 저 일을 라모나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약혼한 것이라면?

그래서 순순히 레헨트를 선물로 준 것이라면?

‘……그럴 리는 없겠지.’

레이먼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애써 로베르트를 향한 의심을 떨쳐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일단 누님에게 소식을 전해야 해.’

지난번처럼 그의 편지를 누군가 또 가로챌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음 날 아침, 고민하던 레이먼은 보고서를 하나 들고 사령부를 찾아갔다.

“레이먼 아이젠부르크. 사령관님께 보고드릴 긴급한 사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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