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와락.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끌어안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라모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숨을 따라 오르내리는 가슴팍이며,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단단한 팔, 혹은 비누 향기 같은 것들이 놀라울 만큼 생생했다.
서서히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들이 희미해져 갔다.
로베르트는 분노했건만, 우습게도 라모나는 그의 분노가 반가웠다.
그가 메닝엔 공작이 아닌 로베르트라는 남자로써 그녀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기뻤다.
누가 꽉 누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하던 가슴에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지금의 감정이 더 깊어지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찬찬히 헤아려 보던 라모나는 눈을 감았다.
‘……향기 좋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요하네스를 마주쳤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한참 만에야 그녀는 그게 자신의 심장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이란.
울컥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몇 번이고 삼킨 라모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나를 좋은 사람이라 말하는 건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아니면 멍청한 사람이던가요.”
“이런, 천하의 로베르트 메닝엔을 멍청하게 만들다니 당신은 참 대단한 사람이군요.”
“맙소사.”
시답잖은 농담에 분위기가 제법 풀어졌다. 로베르트는 라모나와 눈을 마주친 채 우스꽝스럽게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좋은 사람과 대단한 사람이면 제법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라모나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었다.
순간 로베르트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당황한 라모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베르트?”
“남의 가슴팍에 대고 그렇게 야릇한 웃음을 흘리는 건 반칙 아닙니까?”
“네?”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로베르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가운 깃을 살짝 들추며 속삭였다.
“그것도 이런 차림인데.”
로베르트의 굴곡진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로베르트의 시선을 피하기엔 늦었다.
라모나의 뒷덜미를 손으로 받친 로베르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매번 제게 변태 또라이라고 하면서 정작 변태가 누군지.”
‘너무 가까워.’
라모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가 거의 그녀의 귀에 입술을 붙이다시피 하고 속삭인 탓이었다.
하지만 로베르트는 그런 그녀를 놓아주는 대신 오히려 더 꽉 끌어안았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온통 로베르트였다. 결국 라모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더듬더듬 변명했다.
“오, 오해에요.”
당황한 그녀를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눈이 야릇하게 휘었다.
“그렇겠죠.”
로베르트가 라모나의 목을 받치던 손을 내려 살며시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마치 무도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느릿한 손길이었다.
얇은 가운 너머로 손가락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느껴지자 라모나는 바짝 긴장했다.
피식.
작은 바람 소리를 흘린 그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러다가는 방금 한 약속도 못 지키는 무책임한 사람이 될 것 같으니 아까 그 이야기나 마저 해 보죠.”
“아.”
로베르트가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짐작한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했다.
“정말 꿈같은 이야기에요. 못 믿으셔도 이해해요. 저는…….”
“아뇨, 그 이야기 말고. 그 이야기야 긴 밤 어느 때라도 할 시간이 있지 않겠습니까.”
로베르트는 압생트 잔을 향해 고갯짓했다.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저 술이 위로주가 아닌 건에 관한 겁니다.”
그는 라모나를 조금 더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늘 사이의 공기가 한층 더 농밀해졌다.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흐르고,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두 사람 사이에 그어진 아슬아슬한 선을 넘기 딱 좋은 순간.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신음을 흘린 로베르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이윽고.
쪽.
부드러운 입술이 라모나의 뺨에 길게 닿았다. 눈을 감은 로베르트가 고개를 떼려던 순간, 라모나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놀란 로베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라모나?”
“아쉬워서요.”
“예?”
“당신의 목덜미가 붉게 물든 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쪽.
발을 살짝 들어 그의 목에 입을 맞췄다.
“한 번쯤 입을 맞춰 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날카로운 검은 눈이 순식간에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라모나는 그의 몸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이 정도면 대답이 충분히 됐나요?”
“의심할 여지없이.”
로베르트의 목소리가 그르렁거리듯 낮은 소리로 울렸다.
라모나의 등을 감싸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크고 단단한 손이 망설이듯 그녀의 등을 맴돌았다.
그의 손을 따라 피어나는 아찔한 기분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윽고, 로베르트는 살며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제가 아무리 그래도 10분 전에 내뱉은 말을 어길 만큼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라서.”
말은 저렇게 하면서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라니. 라모나는 결국 바보처럼 웃어 버리고 말았다.
* * *
“오늘은 여기서 잘래요.”
침대를 차지한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서요?”
라모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도 아닌걸요.”
“그렇다고 해도…….”
“황실 무도회까지 때려치우고 귀가했는데, 그래도 한 방에서 밤을 보냈다더라 하는 소문 정도는 내야 하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까 이야기도 마저 해야 하고요. 당신도 말했잖아요, 이야기할 밤은 충분히 길다고.”
그럴듯한 라모나의 주장에 로베르트는 곤란한 듯 방 안을 서성였다.
이내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도록 타당해서 반박할 말이 없군요.”
“반박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 명예를 위해 함구하겠습니다.”
로베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라모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차가운 물을 한 잔 홀짝인 그녀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레이디 클라이스트와 바텐베르크의 이야기도, 레헨트의 이야기도. 전부 다 그 꿈에서 보았던 일들이에요.”
로베르트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잠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라모나가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에게 약속한 증거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그때는 조금 놀랐습니다.”
“어떤 점이요.”
“로지나에게 레이디 바텐베르크를 건드려 보라고 해 둔 참이었거든요.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에드윈과 로지나뿐이었고요. 그런데 당신이 그 일을 아는 것처럼 입에 담더군요.”
“……왜 그때 저를 추궁하지 않았죠?”
그녀의 질문에 로베르트는 손목을 들어 보였다.
“저도 당당하지 않은 처지였던지라.”
“오.”
라모나가 과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이윽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제 말이 믿어지세요? 너무 허황된 이야기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사실 당신이 저를 미친 사람 취급해도 이해했을 거예요. 그럴 만한 이야기니까.”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 사람 취급이라…….”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말에는 오류가 제법 있군요. 일단 첫 번째, 미친 사람은 접니다.”
“예?”
“그야 당신에게 미쳤으니까.”
“…….”
라모나는 할 말을 잃었지만 로베르트는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당신이 느낀 그 감정이 바로 제가 당신에게 푸른빛에 대해 이실직고할 때의 기분입니다.”
푸른빛의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신이 제게는 두 번째 삶을, 당신에게는 푸른빛을 주었나 보네요. 이 정도면 제법 공평하군요.”
“사실…….”
로베르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푸른빛이라면 짐작 가는 부분이 있던 참입니다.”
“예?”
“메닝엔의 영지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가 하나 있습니다. 시간의 신의 성물이라 불리는 물건이죠.”
시간의 신이라니?
자신의 시간을 되돌린 신비한 힘의 실마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메닝엔의 가보가 어째서 그녀를 되살렸을까. 라모나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로베르트가 마저 말을 이었다.
“하여 빠른 시일 내에 영지의 창고를 한번 확인하려고 했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된다면 앞당겨야 하겠군요. 제가 1년 후에 요하네스에 의해 죽는다고 했던가요?”
“……예.”
“당신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요하네스도 기억을 되찾은 것 같았습니까?”
바네사가 요하네스를 떠보던 일을 떠올린 라모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아직은요.”
로베르트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요.”
“사실 의심 가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요.”
“누구입니까?”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절대 숨겨서는 안 될 중요한 이야기다. 망설이던 라모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네사 황녀에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회귀의 실마리도 찾고, 로베르트도 그녀의 비밀을 받아들였다.
분명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영 껄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라모나는 애써 불안한 가슴을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