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쪼르륵.
로베르트의 침실에 술 따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럴 수밖에. 라모나는 입을 꾹 다물었고, 로베르트는 평소처럼 농담을 꺼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신비한 초록빛을 띠던 술에 설탕과 물이 함께 뒤섞이자 색이 뿌옇게 흐려졌다.
로베르트는 그 모습이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라모나의 속마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후, 짧은 한숨과 함께 술병을 내려놓은 로베르트가 양손으로 서랍장을 짚었다.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는 내지 못한 채 그가 간신히 입술을 뗐다.
“혹시 위로주입니까?”
“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라모나가 되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그야…….”
꿀꺽.
긴장한 나머지 입에 고인 침을 한번 삼킨 로베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에게 차이지 않았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담다니 정말 스스로도 놀랄 만큼 꼴사납다. 로베르트는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라모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 말이 뭐라고. 그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중증이군.’
이 상황에서 기대를 품다니. 헛웃음을 삼킨 로베르트가 술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라모나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 기분이 들었다.
로베르트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조금 전의 일 때문이겠지.’
내가, 젠장, 머저리같이 굴어서. 로베르트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침착하자, 로베르트 메닝엔. 제발. 이 이상 머저리같이 굴지 말자.
달그락.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라모나를 향해 눈짓했다.
“드시죠.”
그제야 라모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묘한 안도감이 섞인 미소였지만 로베르트는 눈치채지 못했다.
“잠이 필요하다면 지난번과 같이 한 번에 마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라모나가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한 모금만을 홀짝이고는 다시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라모나는 그의 기대에 화답하듯 물었다.
“대화가 필요하다면요?”
“그렇다면.”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로베르트는 자신 몫의 술잔을 들어 올리고 손목을 까딱했다.
“우리 사이에 술이 없어도 충분하겠죠.”
다시 침묵이 흐르고, 로베르트는 새삼 이곳이 자신의 침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라모나는 그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품었는지 알기는 할까.
로베르트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애써 몰아내는 사이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 제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비꼬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제가 워낙 말을 많이 해서.”
그의 대답에 라모나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제게 푸른빛의 존재를 숨기고 있을 때 말이에요.”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요.”
“다행이네요, 당신의 입이 열 개라는 건 상상만으로도 좀…….”
떨떠름해진 라모나의 표정에 로베르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끔찍합니까?”
“예. 저도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에요.”
라모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사람이 저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로베르트는 겨우 웃음을 참아 냈다.
“이해합니다.”
“혹시 당신이 제게 비밀을 가졌더라도, 너무 밉더라도 한 번쯤은 용서해 달라고 했었죠. 치졸하게 부탁한다고.”
“아.”
‘레몬 축제 때의 이야기이군.’
그녀가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뭘까. 로베르트는 말없이 라모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라모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그녀가 고뇌에 빠진 듯 미간을 찌푸렸다. 로베르트는 다리를 꼬며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당신도 내게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의 말에 라모나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이윽고 천천히, 그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잠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자신에게 이 관계의 키를 쥐어 주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여기서 자신이 무슨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앞으로 라모나와의 관계가 결정될 것이다.
그녀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과 그녀의 마음을 얻어 내는 것. 선택지가 그 두 가지뿐이라면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심호흡을 깊게 한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뻔하다.
“그게 무슨 비밀이라도 저 또한 당신을 용서하도록 하죠.”
로베르트는 그제야 라모나가 자신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한 까닭을 알아차렸다.
그가 그녀를 마음에 둔 이상 그에게는 용서한다는 선택지밖에 없었으니까.
‘이건 조금…….’
많이 씁쓸하군.
차라리 그녀가 조금 더 약은 사람이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 간이고 쓸개고 빼 주고도 행복감에 겨웠을 텐데.
또다시 가슴이 찌르르 떨려 왔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 로베르트가 애써 담담히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때,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요.”
“……예?”
“꿈속에서 요하네스가 황제에 올랐죠. 지금부터 1년 후 당신은 그에 의해 죽었고, 저 또한 몇 년 후에 그의 손에 죽었죠. 그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요약하자면 그래요.”
담담히 말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모나?”
“고작 꿈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와 똑같은 꿈을 꾼 사람을 한 명 더 만났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로베르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2황자 알폰조.”
그제야 그가 놓치고 있던 퍼즐들이 하나하나 맞춰지기 시작했다.
* * *
“그게 무슨 비밀이라도 저 또한 당신을 용서하도록 하죠.”
로베르트의 대답에 라모나는 하마터면 한숨을 토해 낼 뻔했다.
‘일단…….’
그가 아직 자신의 비밀을 알아차린 것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저렇게 태평하게 용서를 운운할 수 없을 테니까.
‘다행이다.’
혹여나 바네사에게 언질을 받은 베르나딘이 로베르트에게 이 사실을 언급했을까 봐 걱정하던 라모나는 안도했다.
‘적어도 최악은 면했어.’
라모나는 이런 자신이 조금은 약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마음이 돌아섰을까 봐 전전긍긍하다니.
로베르트의 대답을 들으니 그녀의 감정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라모나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아마 평생 후회하리라.
내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라모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요.”
“……예?”
“꿈속에서 요하네스가 황제에 올랐죠. 지금부터 1년 후 당신은 그에 의해 죽었고, 저 또한 몇 년 후에 그의 손에 죽었죠. 그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요약하자면 그래요.”
생략한 이야기가 라모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도저히 자신이 요하네스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혹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로베르트의 눈빛이 변하기라도 한다면 너무나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라모나?”
“고작 꿈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와 똑같은 꿈을 꾼 사람을 한 명 더 만났어요.”
그 말에 로베르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듯 중얼거렸다.
“……2황자 알폰조.”
로베르트가 일의 전말을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라모나는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결국 라모나의 선택은 회피였다.
“남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이네요. 내일 다시 찾아올게요.”
그녀는 로베르트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모나가 등을 돌려 방 밖을 나서려던 그때.
덥석.
“이렇게 가면, 당신은 또 홀로 고민하면서 밤을 지새웁니까?”
로베르트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에게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입술을 짓이긴 채 입을 열었다.
“내게 당신의 처분을 맡겨 놓고 내일이면 바뀔 당신의 처지를 가늠하면서?”
“그런 게 아니…….”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라모나의 눈이 흔들렸다. 로베르트는 그녀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당신의 이런 점이 나를 미치게 해. 그거 압니까?”
검은 눈에 선명한 분노가 떠올랐다.
“왜 당신의 선택에는 항상 당신이 최우선이 아니지? 요하네스를 막기 위해서라면 당신이야 어떻게 되든 좋다는 의미인가?”
“로베르트.”
“당신을 내던지지 마. 당신이야말로 당신을 지키라고.”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서 라모나가 공작저에 처음 머무르던 날의 기억이 겹쳐 보였다.
<그렇게 자신의 신변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계약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래서 자꾸 이 남자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래서…….
‘내 과거를 알면서도 나를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잖아.’
자격도 없는 내가.
라모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를 악문 로베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그랬듯이 해명하세요. 당신을 방어하고 자기 합리화라도 늘어놓으란 말입니다.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라고. 그러니까…….”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이대로 가지 마.”
로베르트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내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솔직히 제가, 젠장, 변태 또라이는 맞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그냥 여기 있어요.”
입술을 짓이기던 그가 라모나를 끌어안았다.
“당신을 혼자 두게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