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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11화 (112/151)

#111화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의도치 않게 불쑥 튀어나온 진심에 로베르트는 속으로 욕설을 짓이겼다.

젠장, 젠장.

라모나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도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침착하자, 아직 수습 가능해.’

아니, 불가능하더라도 이건 무조건 수습해야 해. 로베르트는 간신히 이성을 끌어모아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꿀꺽.

긴장한 로베르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당신을 마음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건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러니까 당신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닌데…….”

이건 너무 적나라하고.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말문이 막힌 그가 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하는 게 좋겠다는 뜻입니다.”

수습은 대실패였다.

결국 남은 건 의미 없는 반복이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머저리 같은 화법으로 말하고 있다는 자각이 로베르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헛웃음을 삼켰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겠군. 아니면 그냥 마차에서 뛰어내리던가.’

오랜만에 그의 자존감이 낙석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정말 뛰어내릴까.’

그럼 조금 나아지려나.

자포자기한 로베르트가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이, 라모나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알아요.”

“……예?”

대체 무엇을? 로베르트는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모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저를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요.”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라모나는 로베르트에게 등을 돌린 채 반대쪽 창문을 바라보며 엷게 웃었다.

“당신 목덜미가 그렇게 붉어져 있는데 제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함을 발견한 로베르트는 차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나의 마음은 당신을 힘들게 만드는 것일 뿐이냐고.

‘아.’

그 말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르르 떨려 왔다.

얼마나 거세게 떨리는지 도무지 숨을 들이쉬지도, 내쉬지도 못하겠다.

최악.

오늘은 그야말로 최악의 하루였다.

* * *

“아가씨…… 괜찮으세요?”

걱정스레 라모나를 부축하는 티아를 안심시키듯, 라모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응,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뭐 필요한 건 없으시고요?”

“그럼 물을 좀 떠다 줄래, 티아?”

“넵!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달칵.

티아를 내보내고, 홀로 남은 라모나는 주르륵 흘러내리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을 위해 맞춘 드레스는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얇은 슬립을 입은 채 어깨에 가운을 걸친 라모나가 마른세수를 했다.

“하.”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눈을 감으면 요하네스가 그녀의 앞에 나타난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물끄러미 주먹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공작저에 돌아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공포를 기억하는 몸을 보며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안일했어.’

그런 일을 겪고도 그를 태연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바네사 황녀가 요하네스를 불러올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라모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무엇을 위해서?’

그녀는 몇 가지 가설을 떠올려 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럴듯한 것은 역시 바네사가 로베르트와 약혼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로베르트에게서 떼어 내고 싶은 건가. 요하네스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심란해진 라모나가 양손을 턱에 가져다 댔다.

로베르트를 떠올리자 마차 안에서의 일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마음에 둔 여자가 계속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조아리는 게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 드는지 알기는 하냐는 말입니다.>

마음에 둔 여자라니, 그 표현조차 로베르트답다. 라모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제 잘난 맛에 사는 그 남자가 목덜미까지 붉히며 그녀를 찾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있을까.

‘차라리 모르면 더 나았을까.’

그의 마음을 외면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지 않고 그를 마주할 수 있었을 테니까.

어렴풋이 자각해 가기 시작한 마음이 그녀를 아프게 찔렀다.

다행히도 손의 떨림은 점차 멎었다.

“하아.”

라모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바네사 황녀가 요하네스에게 무어라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저번에 말씀하신 황후 폐하의 반지 말이에요.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바네사의 말을 떠올린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하네스는 바네사의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반응했고, 바네사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네사 황녀 같은 사람이 그런 실수를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요하네스를 떠보기 위함인데.’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두통에 미간을 찌푸린 라모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면 설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라모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안일했다.

요하네스를 피하는 것만으로 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 자신의 비밀을 언제까지고 로베르트에게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까지.

라모나는 지금까지 정말, 정말로 자신이 안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근, 두근.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불안함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벌떡.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

“아가씨, 들어갈게요! 어랏, 아가씨……?”

마침 돌아온 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 아가씨! 아가씨 어디 가세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라모나를 티아가 애타게 불렀다.

* * *

샤워를 끝마친 로베르트가 하반신에 수건을 감은 채 침실에 들어섰다.

굴곡진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수건은 한 것도 없는데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정작 로베르트의 얼굴에 감도는 것은 우울 그 자체였다.

그는 머리에 감도는 물기를 한 손으로 털어 내며 가운을 걸쳤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지. 로베르트는 헛웃음을 쳤다.

아직도 라모나의 씁쓸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신의 연모가 상대방에게는 부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말로 불행한 일이었다.

가슴의 떨림은 결국 통증이 되었다. 병이라도 생긴 것처럼 욱신거리는 가슴을 문지른 로베르트가 중얼거렸다.

“……최악이군.”

귀가한 이후로 내내 속으로만 생각하던 말이었다.

털썩.

침대에 드러누운 그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아니, 뭐가 문제일까.

로베르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그녀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밀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는 꽤 오랜 시간 덮어 두었던 고민을 다시 꺼내 놓았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로베르트가 정말 화가 나는 지점은 그 대답이 분명 요하네스와 연관 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젠장.”

도대체 왜.

이를 악문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파우더 룸 앞에서 보았던 겁먹은 라모나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그 사실을 추측하는 것만으로도 로베르트는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로베르트는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브리튼? 급한 건이 아니면 내일 얘기하도록 하지.”

그러나 그를 찾아온 사람은 브리튼이 아니었다.

“로베르트.”

“……라모나?”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대답에 라모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 *

벌컥.

가운을 꽁꽁 여민 로베르트가 문을 열었다.

“라모나.”

라모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며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로베르트가 억지로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무슨 일입니까.”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상상이 로베르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라모나가 이제 그를 떠나야겠다고 말한다거나, 사실 요하네스의 명을 받아 그와 약혼했다고 말한다거나.

아니면 혹 알폰조, 젠장 왜 또 빌어먹을 2황자가 나오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입술을 깨문 로베르트가 라모나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혹시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눈동자가 꼴사납게 흔들린 걸 들켰을까. 로베르트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그런 그를 바라보던 라모나가 입을 연 순간.

“……잠이 안 와서요.”

로베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압생트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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