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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10화 (111/151)

#110화

바네사 황녀가 드레스를 갈아입고 돌아오기 무섭게 메닝엔 공작과 그 약혼녀는 연회장을 떠났다.

그들은 라모나의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 핑계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마침 로지나와 로베르트가 심상치 않은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교계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덕분에 소문은 날개를 단 듯 훨훨 날아갔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레이디 클라이스트요. 세상에, 망측하기도 하지.”

“아무리 그래도 전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공작 부인감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고작 그 정도 일에 속 좁게 굴기는.”

“하긴 그것도 그래요. 어떻게 데뷔탕트를 맞은 레이디가 황후 폐하를 알현하지도 않고 자리를 뜰 수 있어요? 이건 황후 폐하를 모욕하는 거죠.”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모욕한 게 어디 황후 폐하뿐이겠어요? 메닝엔 공작 부인께서 샤프롱을 서 주시는데 어쩜 감히……. 은혜도 모르고.”

안 그래도 라모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메닝엔 공작가의 가신들은 유디트의 곁에서 입방정을 떨기 바빴다.

그러나 유디트는 태연한 얼굴로 샴페인 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로베르트 이 자식이 언젠가는 사고 칠 거라고 알고는 있었네만, 그게 설마 오늘일 줄이야.”

라모나를 탓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명백한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유디트도 라모나와 로베르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인지.’

그러고 싶지 않지만 자꾸 마리안느의 얼굴을 떠올리게 됐다. 그녀는 애써 한숨을 삼켰다.

클레멘스는 로베르트가 발코니로 향할 때부터 이미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린 후였다.

클레멘스의 차남, 로베르트의 작은 아버지 에이드런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그는 안부 인사 대신 불만을 쏟아 놓았다.

“하여간 그 자식은 제 아비를 닮아서, 위도 아래도 없이…….”

“그만.”

리안드로까지 운운하며 선을 넘는 에이드런에게 클레멘스는 조용히 경고했다.

“하지만 아버지.”

“에이드런, 네가 메닝엔의 주인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위치이더냐.”

“아버지!”

“감히 네가?”

클레멘스의 일갈에 에이드런의 눈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자리를 떴다.

혼란스러운 연회장 속에서 멜리사는 알폰조와 함께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메닝엔 공작의 생각은 항상 알 수가 없네요.”

“나야말로 그쪽이 무슨 생각인지 묻고 싶군.”

알폰조는 말을 뱅뱅 돌리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멜리사도 차라리 그편이 편했다.

그녀는 알폰조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쫓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요.”

“……내게 대답할 의무라도 있나.”

“아뇨.”

멜리사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알폰조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라모나가 사라진 덕분일까. 기세등등하게 연회장을 누비는 미카엘라의 모습이 보였다.

재수 없어. 미간을 찌푸린 멜리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모종의 사유로 메닝엔 공작가의 협조가 필요하신 거라면 바텐베르크의 협조는 필요하지 않으신지 궁금해서요.”

그녀가 요하네스를 향해 턱을 까딱했다.

“그러니까, 그런 사유요.”

그제야 멜리사가 무슨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알폰조의 눈이 커졌다.

‘내가 황위를 노리고 메닝엔의 근처를 얼씬거렸다고 착각한 모양이로군.’

위험한 발언에 그가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뭔가…… 그쪽이 오해한 모양인데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어. 이미 유명한 이야기 아니던가.”

“그러시군요.”

그 이후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음악이 끝나갈 때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미리 인사드릴게요. 아무래도 다음에 황자 전하를 뵙는 건 장례 예식이 될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그럼 이만.”

멜리사는 더 이상의 미련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알폰조가 주먹을 꽉 쥐었다.

멜리사의 언행은 도발적인 것을 넘어서서 무례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알폰조는 그녀를 나무라지 못했다.

왜냐하면…….

‘젠장.’

지난 생, 그는 정말로 요하네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니까.

* * *

메닝엔 공작저로 급히 귀환하는 마차 안. 로베르트는 손만 대면 깨질 귀중한 유리 공예품을 다루는 것처럼 라모나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괜찮습니까? 손이 많이 차군요.”

“어떻게 알았어요?”

“예?”

“제가 파우더 룸에 있는지 말이에요.”

신경이 곤두선 라모나가 날카롭게 그를 추궁했다.

“설마 제게 사람을 붙였나요?”

“차라리 그러면 나을 테지만, 로지나가 제게 전달했습니다. 바네사 황녀가 당신을 데려갔다기에 무슨 일이 있겠거니 하고 쫓아갔죠.”

“하아.”

로지나의 이름에 맥이 풀린 라모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트는 말없이 라모나의 손을 주물러 주었다.

<각하.>

조금 전, 로지나는 베르나딘에게서 벗어나자마자 바텐베르크 후작에게 붙잡힌 로베르트를 급히 찾아왔다.

무례한 로지나의 태도에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지난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드리고 싶은데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화제에 헛기침을 내뱉으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로베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굴지 말라고 내가 말해 뒀을 텐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해서요. 황녀 전하께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데려가셨어요.>

<……뭐?>

<예감이 이상해서요. 그…… 무리의 일도 그렇고, 우연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라모나를 납치하려던 이들이 살해당했다는 보고는 이미 받은 후였다.

로베르트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며 라모나의 위치를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다급히 2층을 뒤지기를 10여 분, 그제야 로베르트의 시야에 익숙한 갈색 머리가 들어왔다.

기둥에 가려 동행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라모나가 떨리는 손으로 부자연스럽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로베르트는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갔고, 거기서 요하네스를 마주쳤다.

요하네스를 발견한 순간 그는 일의 전말을 바로 알아차렸다.

‘……바네사 황녀.’

요하네스와 작당하고 일부러 라모나를 불러낸 게 틀림없다.

고작 파혼 따위에 앙심을 품을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도대체 왜 그 쓰레기를 불러들인 건지.

‘빌어먹을. 경고인가.’

하지만 요하네스가 라모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바네사 황녀가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또 저택에서 정보가 새고 있나.’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기운이 빠진 채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라모나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할머님께서 제 샤프롱을 서 주시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오다니. 지금이라도 연회장으로 돌아가죠. 적어도 황후 폐하는 알현해야 해요.”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 일로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손가락질할 텐데요.”

“안전이 우선입니다. 모든 게 요하네스의 손 아래에 있는 황궁은 너무 위험합니다.”

“길가는요? 납치를 모의하는 자들이 있는데 길가도 위험하긴 매한가지겠죠.”

“적어도 그의 영역은 아닙니다. 게다가 메닝엔의 사병들이 마차를 호위 중이죠.”

로베르트와의 논쟁이 길어지자 요하네스를 만난 이후로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라모나의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책망하듯 외쳤다.

“할머님께서 저의 샤프롱을 서 주시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그러세요? 각하께서는 어머니를 보셨으면서도…….”

라모나의 입에서 마리안느의 이야기가 나오자 로베르트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많이 흥분했습니다, 라모나.”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후.’

한숨을 삼킨 로베르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그에게 라모나가 조심스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제가 경솔했어요.”

“괜찮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합니다. 다만, 논쟁은 이만하고 공작저로 돌아가도록 하죠.”

“……예.”

라모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힐끔 라모나를 살폈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의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쯧.’

아까 요하네스가 입장할 때부터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런 일을 예상했어야 했건만. 속으로 혀를 찬 로베르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피 나겠습니다.”

입술에 로베르트의 손이 닿자 놀란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다시 사과가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이건 저에게 죄송할 일은 아니고.”

“아니요, 아까 일 말이에요.”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로베르트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자 라모나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라모나의 죄송하다는 말이 아까부터 그의 신경을 긁었다.

사실 오늘따라 그의 신경을 긁는 것들이 참 많았다.

라모나를 찾던 알폰조의 눈빛과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던 남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요하네스. 감히 그 쓰레기가 라모나를 갈망한다는 사실이 로베르트를 미치게 만들었다.

‘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리만큼 피곤하군.’

로베르트는 또다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색한 침묵 속.

덜커덩.

돌부리를 밟은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균형을 잃은 라모나가 비틀거리며 로베르트의 어깨에 부딪혔다.

화들짝 놀란 라모나가 또다시 사과했다.

“어머, 죄송해요.”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욱한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놈의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하면 안 됩니까?”

“예?”

반복되는 사건에 신경 줄이 가늘어진 것은 라모나만이 아니었다. 다만 로베르트의 경우는…….

“마음에 둔 여자가 계속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조아리는 게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 드는지 알기는 하냐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 더 개인적이고, 조금 더 감정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휘둥그레진 라모나의 눈을 바라보며 로베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이건 정말…….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최악의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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