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라모나.>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이가 덜덜 떨리기 시작한 것은.
요하네스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라모나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갔다.
회귀 전 라모나가 괴로워하던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요하네스의 정부라는 주홍 글씨와 사교계의 따돌림, 그리고 미카엘라에게 이용당하면서 느꼈던 자괴감.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내가 널 이리도 사랑하는데, 응?>
요하네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가 숨을 쉬기만 해도 공포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그녀를 해쳤다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교묘하게 덫을 놓아 라모나를 옭아매었다.
<라모나, 너는 정말 최악의 여자야. 나를 배반한 것도 모자라 레이디 벤트하임까지 배반했다니. 끔찍하기도 하지.>
약혼자에게 버림받게 만들었고.
<네? 어머니가요?>
<그래, 뱃놀이를 하다가 그만 배가 뒤집혔다더구나. 다행히 얕은 물이어서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어머니를 불구가 되게 만들었고.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레이먼이 실종됐다니?>
동생의 목숨을 앗아갔다.
요하네스를 향한 두려움은 그렇게 차곡차곡, 뼛속 깊이 새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오, 바네사. 네가 웬일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함께 있느냐.”
요하네스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라모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녀는 깨달았다.
회귀 후, 그녀가 평온한 삶을 꿈꾸던 것은 다 요하네스를 향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잔인한 복수를 꿈꿀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그를 향한 두려움이 뼈 마디마디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라모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발견한 요하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의 목소리에 과거의 잔상이 겹쳐졌다.
<몸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내 그럴까 봐 방에만 있으라 했거늘.>
주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은가?”
요하네스가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 들자 라모나는 본능처럼 그의 손을 쳐냈다.
탁.
적나라한 거부에 요하네스의 표정에 쩍, 금이 갔다.
그가 풍기는 불쾌감에 겁을 먹은 라모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남들과 몸이 닿는 것을 두려워하는 탓에…….”
“그런 사연이 있었군.”
요하네스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바네사가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지만, 겁에 질린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숨 막혀.’
머리가 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요하네스의 곁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습된 무력감은 그녀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당장 이 남자에게서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떻게?
뻣뻣하게 굳어 버린 머리는 겨우 목걸이 하나를 떠올렸다.
<알겠지? 혹시 메닝엔 공작에게 협박당하고 있으면 이 목걸이를 흔들어.>
라모나는 자작이 그녀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간신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자작이 2층 파우더 룸에 있는 라모나를 발견할 리 만무했다.
‘안 돼.’
좌절감에 빠진 라모나의 얼굴이 얼어붙은 설산처럼 창백했다.
요하네스는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게더른 가의 파티에서 보았지.”
“……예.”
“그 후로 처음이니 오랜만이로군. 그러고 보니 레이디 벤트하임의 절친한 친우라 했던가.”
입술을 꽉 깨문 라모나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대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잘 됐어. 바네사,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나?”
안 돼. 겁에 질린 라모나가 절박한 얼굴로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물론이죠.”
바네사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구두 굽 소리조차 내지 않고 움직이던 그녀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아, 오라버니.”
“무슨 일이지.”
“저번에 말씀하신 황후 폐하의 반지 말이에요.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바네사의 말에 요하네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반지?”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네요. 그럼 이만.”
요하네스를 빤히 바라보던 바네사는 고개를 살짝 까딱하고는 다시 자리를 떴다.
수상한 바네사의 태도에 요하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바네사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라모나에게 집중하려던 찰나였다.
“그나저나 요즘 레이디 벤트하임과 제법 소원한 모양이…….”
“하아, 하아. 라모나!”
로베르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요하네스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이내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그가 로베르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메닝엔 공작.”
그러나 로베르트는 요하네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저벅, 저벅.
그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거의 달리다시피 라모나에게 다가갔다.
와락.
“내 사랑.”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끌어안자 요하네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로베르트를 일갈했다.
“공작의 눈에 나는 황실의 장식물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군.”
“아, 죄송합니다.”
그제야 로베르트는 요하네스를 돌아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가 워낙 숨만 쉬어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탓에. 그만 별일 아닌 줄 알았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 *
한편 연회장. 알폰조는 하이에나처럼 자신을 노리는 이들을 피해 구석으로 피신했다.
결혼 시장의 괜찮은 매물을 발견한 레이디들도, 권력의 냄새를 맡고 기웃거리는 귀족들도 하나같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두 번은 못 할 짓이야.’
그 사이 라모나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그가 한숨을 삼켰다.
‘설마 요하네스인가.’
아니, 설마가 아니라 분명 요하네스이겠지.
생을 한번 거슬러 왔는데도 라모나를 향한 그의 집착은 변치 않았다.
왠지 가슴이 답답한 기분에 알폰조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는 지난번 뒷골목에서 요하네스를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내 관심을 끌고 싶었다면 성공이구나. 그러나, 다음번에는 직접 나를 찾아와야 할 것이야.>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요하네스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니, 그럴 리가. 하지만 요하네스가 모종의 이유로 알폰조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내가 그에게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 같은 말이야.’
라모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것일까?
아니면 설마 요하네스도…….
‘그렇다고 하기에는 비약이 너무 심하군.’
알폰조는 애써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날려 보냈다.
아무튼 요하네스와의 일을 라모나에게 전하고 싶은데, 도무지 그녀와 대화할 만한 짬이 나지 않는다.
마음은 다급한데 그럴수록 라모나의 의심을 사기만 한다.
‘내가…… 많이 수상한가.’
알폰조가 습관처럼 머리를 긁적이던 때였다.
“바텐베르크의 딸이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멜리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얼마 전, 슈타이덴 백작저로 그녀가 보낸 편지를 떠올린 알폰조의 눈이 커졌다.
편지의 내용대로, 멜리사는 손목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인사와 더불어, 제 댄스 카드가 아직 비어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다행히도 알폰조는 그녀가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눈치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 * *
“미카엘라.”
2층 복도, 홀로 벽에 선 채 샴페인을 홀짝이는 미카엘라를 발견한 벤트하임 공작이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일이냐.”
조바심이 난 그가 미카엘라를 다그쳤다.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있는 줄로만 알았더니 왜 이리…… 설마..., 그 계집의 일이냐?”
“아아.”
미카엘라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부탁하신 게 하나 있어서요.”
“부탁?”
“예, 긴히 대화를 나누실 일이 있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좀 피하셔야 하나 봐요.”
미카엘라가 곱게 눈을 접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하나 없는 딸의 모습에 벤트하임 공작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버지 그리고요.”
미카엘라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따로 말씀하신 일이 있어서요.”
“무엇이지.”
“급한 일은 아니니 저택에 돌아가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고 하잖아요.”
벤트하임 공작은 그제야 미카엘라의 입이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미카엘라.”
“예, 아버지.”
“황태자비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될 게다.”
“…….”
미카엘라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벤트하임 공작이 혀를 찼다.
“세상이 무너진 것도 아니지 않으냐. 고작 정부 하나 들이는 일일 뿐이다.”
“……예.”
미카엘라의 대답이 탐탁지 않았는지 벤트하임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를지를 생각해. 일단 네가 그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그 뒤는 이 아비가 알아서 처리하마. 벤트하임 공작은 뱀이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