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 *
“세상에, 레이디 벤트하임! 평소에도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정말 눈이 부시네요.”
레이디 애커만의 호들갑에도 미카엘라의 기분은 쉬이 좋아지지 않았다.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 데뷔탕트 날인가.
그런데 바네사 황녀도, 레이디 슈타이덴도 아닌 고작 라모나에게 사교계의 별 자리를 빼앗길 줄이야.
미카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대체 왜?’
라모나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너는 나를 배신하고, 아니 배신으로도 모자라서 이렇게 내 앞길을 방해할 수 있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까드득.
미카엘라가 이를 악물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레이디 애커만은 안절부절못하며 부채를 팔랑였다.
그녀는 얼른 미카엘라를 다시 추켜올렸다.
“아까 황태자 전하와 레이디께서 함께 입장하시는데 정말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니까요. 그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은 처음 봤어요.”
미카엘라를 둘러싼 레이디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덕분에 한결 기분이 나아진 미카엘라가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사실 저도 오늘 황태자 전하를 뵙고 깜짝 놀랐답니다. 물론 어떤 의복을 입으실지 미리 언질은 들었지만 그래도…….”
우아한 미소를 지은 미카엘라가 요하네스와 자신의 관계를 과시하려던 때.
“풋. 애썼네.”
마침 그들 무리를 스치듯 지나가던 멜리사가 같잖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미카엘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레이디 애커만은 눈에 불을 켜고 멜리사를 붙잡았다.
“레이디 바텐베르크?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가요.”
“지금 레이디 벤트하임의 말을 비웃…… 엿들으신 거 아니에요?”
“아아, 난 또 뭐라고.”
멜리사는 도도한 얼굴로 도리스와 라모나 쪽을 향해 턱을 까딱했다.
“도리스의 드레스가 너무 웃겨서요.”
“……네?”
“그쪽도 한번 봐 봐요. 저걸 보고 안 웃을 수 있나.”
“웃기긴 한데…….”
레이디 애커만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멜리사는 돌연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추궁했다.
“레이디 애커만, 지금 제 친구를 비웃는 건가요?”
갑작스러운 멜리사의 태세 전환에 당황한 레이디 애커만의 눈이 커졌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렇죠?”
“예?”
“그쪽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죠?”
뒤늦게야 멜리사가 지난번 티파티에서 미카엘라가 한 행동을 꼬집은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디 애커만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멜리사의 얼굴에 나른함이 떠올랐다.
“흐음, 영 재미없네.”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채 미카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툭.
레이디 애커만의 어깨를 치며 지나갔다.
덕분에 분위기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 만큼 최악이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열심히 눈치를 살피던 레이디 정말이지, 레이디 블레나는 최대한 미카엘라의 기분을 띄워 주기 위해 애를 썼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아름다운 드레스에요. 역시 레이디 벤트하임의 안목은 정말이지 사교계 최고라니까요!”
“……고마워요. 레이디 블레나의 목걸이도 너무 아름답네요.”
애써 표정을 관리한 미카엘라가 선심 쓰듯 레이디 블레나를 칭찬하던 때였다.
“미카엘라.”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미카엘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전하?”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어서.”
요하네스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지만 미카엘라의 얼굴은 미미하게 굳어졌다.
이내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주변에 양해를 구했다.
“그럼 잠시.”
미카엘라와 요하네스가 사라지고, 그제야 레이디 애커만은 한숨을 돌렸다.
‘대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는 이 짓을 어떻게 한 거야.’
라모나가 메닝엔 공작저로 들어간 이후로 미카엘라는 레이디 애커만을 라모나의 대용품처럼 사용했다.
‘슬슬 벅찬데.’
심지어 사교 시즌 중에 또 레헨트에 다녀와야 한다.
‘무슨 사생아 시신이 잘 묻혔는지까지 내게 확인하라는 건지. 어이가 없네.’
이만 발을 빼는 게 좋으려나. 레이디 애커만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내 그녀가 레이디 블레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레이디 블레나.”
“예?”
“아까 일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말끝을 흐린 레이디 애커만과 레이디 블레나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내 붉은색 칵테일을 집어 든 레이디 블레나가 턱을 치켜들고 라모나 일행 쪽으로 다가갔다.
* * *
연회장 한구석, 황궁에 심어 둔 세작에게 보고를 받은 로지나의 눈이 커졌다.
“뭐? 다시 말해 봐.”
“뒷골목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레헨트의 소년과 함께하던 무리가 전부 사망했습니다.”
“그들이 사망한 게 확실해? 시신은?”
“전부 불에 탔습니다만 얼굴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황궁의 시종으로 숨어든 세작은 재빠르게 속삭이고는 로지나에게 샴페인 잔을 건네주었다.
로지나가 잔을 받아 들며 말했다.
“위스키를 좀 가져오도록.”
로베르트에게 곧장 보고하라는 은어였다.
“예, 레이디.”
세작이 빠르게 자리를 뜨고, 로지나는 샴페인을 홀짝였다.
‘예감이 좋지 않은데.’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를 납치한다기에 계획은 너무 허술했고, 기껏 힘들게 데려온 레헨트의 소년은 다시 내려보냈다.
그런데 이제는 계획한 당일에 무리를 모두 죽이다니.
‘이상하지.’
로지나는 이 모든 일이 분명 무언가를 가리기 위한 연막일 것이라 예측했다.
불길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로지나가 라모나 쪽으로 다가가던 때였다.
‘……저건 또 뭐야?’
고개를 지나치게 치켜든 레이디 블레나가 로지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요즘 벤트하임 밑에서 기더니 누구 하나 엿 먹이러 가나 본데.’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로지나는 레이디 블레나에게 세게 부딪혔다.
퍽!
“어머, 실수.”
균형을 잃은 레이디 블레나는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을 놓쳐 버렸고.
“레이디 클라이스트? 지금 이게 무슨 짓……. 헉! 화, 황녀님.”
촤악.
마침 라모나에게 다가가던 바네사 황녀에게 칵테일 세례를 선사했다.
뚝, 뚝.
바네사의 드레스 소매에서 칵테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정적이 흐르는 연회장, 눈이 휘둥그레진 도리스가 입을 틀어막고 중얼거렸다.
“어떡해…….”
붉은색 때문일까. 바네사는 온통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붉게 물든 바네사의 드레스를 바라보던 로지나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레이디 블레나도 얼른 로지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제, 제 불찰입니다.”
모두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던 그 때, 바네사는 침착하게 손을 저었다.
“고개를 들게, 레이디 클라이스트. 조심하지 않은 내 잘못도 분명 있으니 그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바네사의 말에 로지나는 고개를 들었다.
‘젠장, 이목이 너무 집중됐어.’
이러면 라모나에게 납치 이야기를 전달할 수가 없다. 로지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바네사는 라모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보다시피 내가 지금 이런 모양새라……. 잠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이 상황에서 저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심지어 자신의 약혼자와 원래 약혼을 약속했던 여자의 제안을.
그제야 로지나는 바네사가 일부러 칵테일을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뭔가…….’
이상해.
안 되겠다. 아무래도 직접 의논하는 게 낫겠다.
불길한 예감이 든 로지나는 황급히 로베르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어두운 파우더 룸, 침착한 얼굴로 바네사의 소지품을 건네받은 라모나에게 바네사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라모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내 바네사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라모나는 계속해서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고요한 가운데 원단 소리만 바스락거렸다.
이내 새로운 드레스를 입은 바네사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새로 정돈하며 바네사는 거울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그대도 이미 약혼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로군.”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있을 필요는 없네. 정치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입으로 한 약속이란 다 그런 것이니까. 다만 궁금하기는 해.”
그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도대체 왜 그대가 메닝엔 공작과 사랑에 빠졌을까. 그럴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아니면, 혹시.”
바네사는 거울 너머로 라모나를 응시했다.
“고작 사랑 따위는 아닌 건가?”
공기가 팽팽해졌다.
이 침묵이 길어지게 둬서는 안 된다. 라모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감정에 눈이 멀어 황녀 전하께 폐를 끼친 제가 드릴 말씀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 감정이란 말이지…….”
바네사가 옅게 웃었다. 이내 그녀가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중요하지는 않은 이야기지. 메닝엔 공작이 오라버니에게서 돌아서지만 않는다면야.”
어차피 요하네스를 막기 위해서라도 베르나딘을 지지해야만 할 터. 라모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라모나를 바라보는 바네사의 얼굴에 묘한 빛이 깃들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뭐, 피차간에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이내 화장을 다 고친 바네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연회장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달칵.
이내 문이 열리고, 라모나는 묵묵히 바네사의 뒤를 따랐다.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파혼이야 눈감아 주겠지만, 만약 로베르트가 베르나딘에게서 돌아서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2황자 때문인가.’
충분히 할 만한 오해였다.
라모나와의 약혼 이후로 로베르트는 베르나딘과 연락을 단절했고, 레헨트에서 알폰조와 동행했다.
‘바네사 황녀를 적으로 돌려서는 곤란해.’
요하네스를 저지하려는 라모나의 목표와 베르나딘을 황제로 세우려는 바네사의 목표는 결국 일맥상통했다.
그러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라모나는 파우더 룸을 나섰다.
그러나 복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 바네사.”
라모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네가 웬일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함께 있느냐.”
목소리의 주인, 천사 같은 외모를 한 남자가 라모나를 꿰뚫을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