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우스운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라모나는 물끄러미 로베르트의 붉어진 목을 바라보았다.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재수 없을 만큼 잘난 이 남자가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뭘까, 정말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라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이 남자를 이용할 생각이라도 해야 하나.
‘메닝엔 공작가를 찾아갈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음악이 고조되자, 로베르트는 생각에 빠진 그녀를 살짝 안아 들더니 능숙하게 턴을 돌았다.
“지금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한 번 더 숨을 쉬어야겠다, 정도?”
“오, 제발.”
라모나가 경악하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로베르트의 눈빛이 바뀌었다.
“역시 댄스 카드를 뜯어 버리기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라모나의 등을 감싸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탓에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서로의 내뱉은 숨이 느껴질 만큼, 실수인 척 고개를 돌리면 코끝이 닿을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다른 놈들이 당신과 춤추며 등을 더듬거린다 생각하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서 말입니다.”
“…….”
라모나는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로베르트는 또다시 야릇한 눈웃음을 쳤다. 한 번쯤 봐 달라는 듯, 아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보아하니 본인이 등을 더듬거린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다.
‘역시 변태 또라이.’
라모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제 싫지만은 않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아니면 문제가 아니던가.
생각에 빠진 그녀의 시야에 로베르트의 등 너머로 이쪽을 흘겨보는 미카엘라의 모습이 보였다.
라모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미카엘라를 바라봐 주었다.
그러자 미카엘라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요하네스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다.
다시 뱅글, 음악에 맞춰 턴을 돌며 라모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 각도라면 분명 요하네스가 그녀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지만…….’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던 때였다. 마주 잡은 로베르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내 사랑.”
그녀는 그 순간 결심했다.
요하네스가 그들을 보고 있다는 핑계로.
“로베르트.”
“예.”
“그럼 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한번 그 누구보다 다정한 연인이 되어 보기로.
로베르트를 빤히 바라보는 라모나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그녀의 도발에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모나는 은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로베르트의 팔 위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음.”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접으며 말했다.
“당신 목덜미가 오늘따라 유독 붉다는 생각?”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웬일로 얌전해진 그의 입술이 당혹스러운 듯 달싹였다.
왜 그가 자꾸 자신을 놀리며 즐거워하는지. 라모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뭐랄까, 조금.’
짜릿하긴 하네.
그 순간 음악이 멎었다.
댄스 플로어 위의 사람들은 이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아이젠부르크의 신데렐라, 사교계의 악녀, 레헨트의 새로운 주인.
그녀가 손끝만 까딱해도 사람들은 수군거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작 미카엘라의 시녀에 불과하던 자신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걸까.
‘가만 보면 맨날 억울하다 말하는데.’
정말 억울한 사람은 아무래도 나 같은데. 피식 웃은 그녀가 천천히 로베르트의 뺨을 쓰다듬었다.
“로베르트.”
고작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검은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일렁임으로 가득 찼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우리 한번 잘해 봐요.”
등에 닿은 로베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쪽.
닿은 듯, 닿지 않은 듯. 깃털처럼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로베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힘이 잔뜩 들어간 손. 그의 구석구석을 살피던 라모나는 천천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오늘 연회 말이에요.”
그냥 얄궂은 장난이었다. 아무 의미는 없었다.
* * *
첫 춤이 끝나고, 라모나는 잠시 후에 다시 만나자며 유유히 레이디 바텐베르크와 오셀튼 사이로 사라졌다.
라모나가 사라지기 무섭게 로베르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런 사람들을 뚫고 3황자 베르나딘이 로베르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로베르트.”
“아아, 어쩌다 보니.”
그 덕분에 로베르트는 귀찮은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나딘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로베르트의 시선은 온통 라모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벌써 다섯 번째. 별 버러지 같은 놈들이 라모나에게 춤 신청을 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댄스 카드가 없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자리를 뜨고 있다.
로베르트는 다섯 번째 놈이 음흉한 눈길로 라모나의 등을 훑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훔볼트 가의 영식인가.’
뒤뚱거리며 멀어지는 뒷모습이 놀랍도록 재수 없다.
감히 누구의 여자를 노리는 건지.
‘훔볼트 가라면 무역선을 띄운다고 투자를 받아 갔었지.’
회수할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춤 신청은 고백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린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삼켰다.
목이 타는 기분에 로베르트는 샴페인을 홀짝였다.
“좋은 술이야.”
베르나딘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리고 나서야 로베르트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뭐, 황궁에서 먹는 것 치고는.”
“그야말로 자네만 할 수 있는 말이로군.”
베르나딘의 말에 로베르트는 기분 좋게 어깨를 으쓱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
그사이 벌써 여섯 번째 놈이 라모나의 근처를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쯧.”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더 이상 그녀를 혼자 두어선 안 되겠다. 결국 그는 여섯 번째 놈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베르나딘이 먼저 꺼내지 못한 본론을 대신 입에 올렸다.
“그건 그렇고, 2황자가 수도에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렇지.”
“무슨 속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알폰조는 아마 별 속셈이 없을 걸세. 워낙 그런 아이이니.”
태평한 베르나딘의 말에 로베르트가 눈썹을 꿈틀했다.
“베르나딘.”
“응?”
“사람들은 저렇게 장성한 성인 남성을 아이라 부르지 않아.”
그래, 2황자는 장성한 성인이지. 그것도 남성. 그 사실을 되새긴 로베르트가 한숨을 삼켰다.
조금 전, 황제가 같잖은 연설을 늘어놓던 그때. 라모나는 갑자기 어깨를 움찔 떨며 그에게 바싹 몸을 붙였다.
로베르트는 단번에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알폰조, 빌어먹을 장성한 성인 남성.
그렇기에 그는 알폰조를 경고하듯 똑바로 바라보며 라모나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멋진’ 당신의 그이에게 말해 보시죠.>
그 다음부터는 반쯤은 장난, 반쯤은 과시였다.
영악한 뱀 같은 사교계에 라모나가 누구의 보호를 받는 사람인지 똑똑히 알릴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한번 잘해 봐요.>
유혹적인 말을 속삭인 라모나의 입술이 닿을 듯 말듯 그의 뺨을 간질이던 순간.
‘젠장.’
그는 무도회고 뭐고 그냥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녀의 등을 받쳤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감촉이 너무나 생생했다. 연회장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의 그녀를 자꾸만 상상하게 만들었다.
로베르트는 확신했다.
분명 그의 속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라고.
그래서일까. 라모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오늘 연회 말이에요.>
내 사랑은 여유롭기도 하지.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남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이 이렇게까지 즐거운 일일 줄이야.
‘미친 놈.’
기가 막힌 생각에 그가 혀를 찼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자신을 더 가지고 놀아 줬으면 좋겠다. 그 예쁜 눈동자에 자신만을 담고, 야릇하게 웃어 줬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침대에서.
로베르트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사실 푸른빛이 사랑에 빠지게 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럴 리가 없으려나.’
생각해 보면 그 전부터 그는 이미 라모나에게 빠져 있었으니까.
아직도 손끝에 맴돌던 감촉이 선명하다.
그 놈의 얄궂은 드레스.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든 로베르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샴페인 잔을 들며 베르나딘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미안 스펜서가 2황자를 쫓고 있어.”
“……!”
“혹은 접촉하고 있거나.”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베르나딘의 눈이 커졌다.
“조만간 점심이나 한번 들지.”
샴페인 잔을 까딱한 로베르트가 자리를 떴다.
이런 곳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