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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06화 (107/151)

#106화

타이밍 좋게도 황제는 느지막이 연회장에 도착했다.

“올해도 제국의 일원들이 이리 한자리에 모였군. 지난 한 해도 무사히 보냈음에 감사해야겠지.”

황제는 인자한 얼굴로 덧붙였다.

“짐이 길게 이야기하여 무엇 하겠는가. 모쪼록 즐겁게 먹고 마시며 훌륭한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네.”

황후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황제의 곁에 서 있었다.

그러나 요하네스의 옆에 우뚝 선 알폰조를 볼 때면 그녀의 미소에 미미한 금이 생기곤 했다.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황후뿐만이 아니었다.

레이디 슈타이덴은 무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베르나딘이 밀려난 것에 대한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레이디 슈타이덴을 노려보았다.

라모나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심히 관찰했다.

‘확실히 회귀 전과는 달라졌어.’

설마 알폰조가 의도한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그녀는 알폰조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덤덤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던 알폰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황한 라모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뭐지.’

자꾸 그녀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알폰조의 모습이 묘한 불안을 자아냈다.

“라모나?”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로베르트가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아, 별일 아니에요.”

“흐음.”

힐끔, 무언가를 바라본 로베르트의 입가에 이내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지 말고 ‘멋진’ 당신의 그이에게 말해 보시죠.”

와우. 다 들었네, 다 들었어.

“하아.”

라모나가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자 로베르트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가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나의 사랑, 난 당신만을 이렇게 바라보며 가슴을 불태우는데 당신은 내가 없어도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람이군요. 정말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바로 그런 당신을 제가 사랑하니까요.”

그의 주둥이는 너무나 빠르고 완벽한 발음으로 놀라울 정도로 시적인 주접을 늘어놓았다.

성공적으로 주접을 끝마친 그는 라모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의 천사.”

‘그새 발전했네.’

이런 노력파 주둥이, 하지만 저런 연극에 넘어갈까 보냐. 라모나가 코웃음을 칠 때였다.

“내 사랑, 그거 아십니까.”

로베르트의 큰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털썩.

로베르트 메닝엔은 그들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과감하게 무릎을 꿇었다.

왜, 또, 뭔데.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꺅! 청혼!”

라모나는 자신의 입을 막을 게 아니라 도리스의 입부터 틀어막았어야 했다.

도리스의 외침에 사람들의 격한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어머어머. 청혼이요?”

“지금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청혼을 받았나 봐요.”

“세상에나! 메닝엔 공작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진짜 결혼까지 할 작정이었을 줄이야.”

젠장.

‘대체 뭔 생각이에요!’

경악한 라모나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로베르트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당신이 나의 여자라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남자인지.”

꽤 오랜 시간을 참아 온 재앙이 뚫린 둑 같은 로베르트의 주둥이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치심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심지어 황제도 흥미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고 싶다. 그러나 라모나는 겨우 침착함을 유지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호, 호, 호. 로베르트. 너무 감동이에요. 그렇지만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일어나 눈을 뜨면 당신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당신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끝말잇기 아니니까 그만 해, 제발.

라모나는 깨달았다. 이건 노력파 주둥이가 아니라 천재형 주둥이다.

노력 정도로 이런 경지에 오를 리가 없다.

일이 이쯤 되니 그녀는 목걸이를 흔들까 말까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이젠부르크 자작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바라보며 손등에 입을 맞췄다.

쪽.

그리고 눈이 부실만큼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나의 구원, 나의 전부, 나의 세상. 라모나. 부디 내게 당신과 함께 춤을 출 영광을 허락하시길.”

세상에서 가장 요란스러운 춤 신청이었다.

라모나는 후회했다.

‘그냥 2황자가 나를 봐서 그랬다고 말할 걸…….’

젠장.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젠장.

* * *

연회장 가득 황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현악기가 경쾌하게 멜로디를 리드하면, 뒤이어 플루트가 꾀꼬리의 지저귐처럼 아름다운 소리로 그 멜로디를 발전시켜 나갔다.

댄스 플로어 위. 음악이 시작됐건만 사람들은 도통 춤에 집중하지 못했다.

재앙의 주둥이, 그리고 아이젠부르크의 신데렐라. 벌써 오늘도 한 건 해낸 한 쌍의 커플 때문이었다.

정작 화제의 커플은 자신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은 로베르트가 부드럽게 라모나를 리드하며 속삭였다.

“헤센 백작 부인 봤습니까? 이쪽을 구경하느라 발이 거의 멈춰 있던데요.”

“저라도 아까 같은 광경을 보면 멈춰 서서 구경할 것 같기는 하네요.”

체념한 듯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그를 추궁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람들의 이목을 끄시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지금 즐기고 계시죠?”

“그 말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숨만 쉬어도 저를 주목하거든요.”

“그건 너무 자의식 과잉 발언 아닐까요?”

“못 믿으시겠다면야 보여 드리는 수밖에.”

이내.

“하아, 라모나.”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가 단전에서 끌어 올린 듯 거친 숨을 내뱉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헤센 백작 부인이 발을 삐끗하는 작은 사고도 일어났다.

이런 미친 변태 또라이. 기겁한 라모나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 정신이세요?”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야하게 숨을 내쉬면 저라도 쳐다보겠어요!”

“오. 당신의 관심을 끌고 싶을 때는 야하게 숨을 쉬면 되겠군요.”

신이시여, 도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나이까.

라모나는 이마를 짚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양 손이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참고는 하겠습니다.”

로베르트는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검은 눈이 야릇하게 휘며 눈물점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그나저나 너무 태연한 것 아닙니까? 오늘이 데뷔탕트라 믿기 어려운 실력입니다.”

그야 첫 데뷔가 아니니까 당연한 말이었다. 라모나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대답했다.

“연습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이런,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질투 나는 일이군요.”

질투를 운운하는 로베르트의 말에 라모나는 순간 발을 헛디뎠다.

중심을 잃을 뻔한 그녀를 로베르트가 얼른 붙잡았다.

덥석.

등을 많이 파 둔 드레스 덕분에 단단한 그의 손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깜짝 놀란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아, 역시.’

생각해 보니 우스운 짓을 한 것 같다. 속으로 혀를 찬 라모나가 허리를 곧게 폈다.

로베르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힘 풀어도 괜찮습니다, 나의 천사.”

“네, 감사해요.”

“이미 당신은 깃털만큼 가벼운걸요. 아, 설마 당신의 등에 달린 날개…….”

마침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두 사람의 옆을 스쳐 지나가던 에드윈이 탄식했다.

“맙소사.”

그는 그런 주인을 두 눈 뜨고 봐줄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라모나는 침착하게 미소를 유지한 채 로베르트에게 속삭였다.

“공손하게 부탁드릴게요, 좀 닥쳐 주시겠어요?”

“오, 내 사랑은 매몰차기도 하지.”

“기가 막혀. 요즘 좀 멀쩡하시더니 왜 다시 돌아오신 거예요?”

“그야.”

말끝을 흐린 그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좋아하니까.”

‘아.’

검은 눈이 야릇하게 휘어지자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열 받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로베르트 메닝엔은 정말 치명적일 정도로 헛소리를 잘 나불거렸고, 또 치명적일 정도로 잘생겼다.

‘……역시 끼 부리는 미남은 위험해.’

지난번 꿈이 떠오른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은 로베르트는 사랑스럽다는 듯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등을 감싼 로베르트의 손이 아주 여린 소리로 건반을 연주하듯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맨살에 닿는 손가락이 간지럽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로베르트?”

라모나의 눈이 커지자 그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이 정도는 해 줘야 세기의 커플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무려 황제 폐하가 도착하기도 전에 발코니에 다녀온 커플인데.”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확 얼굴이 달아오른 라모나가 다시 스텝에 집중하던 때였다.

‘응?’

그녀의 시야에 로베르트의 붉어진 목덜미가 들어왔다.

또다시 그를 외면하려던 라모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가…….’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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