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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05화 (106/151)

#105화

‘……!’

오랜만이라니. 설마……?

라모나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온갖 불길한 상상이 차올랐다.

그녀를 과거의 기억에 매몰시키기 충분한 상상이었다.

<라모나.>

<……예, 전하.>

<너는 왜 나를 사랑한다 말하지 않지?>

그녀를 옭아맬 듯 뚫어져라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떠오르자 오소소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같잖은 자존심인가?>

<그런 게 아니라…….>

그녀의 대답에 요하네스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게 너다운 일이지. 그리고 그런 너를 짓밟는 게 나다운 일이고. 그렇지 않으냐?>

<……전하?>

<한번 보자구나.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지. 아, 미리 말하건대, 적당히 했으면 좋겠구나.>

그는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빌빌 기는 건 흥미가 없거든.>

아직도 소름 끼치는 그 숨결이 생생했다.

‘안 돼.’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때였다.

덥석.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흡.”

소스라치게 놀란 라모나가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자 손의 주인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라모나?”

익숙한 시트러스 향기가 그녀의 코끝에 맴돌았다.

순간 안도의 눈물이 돈 라모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뿌연 시야 사이로 검은 머리가 아른거렸다.

그녀를 안심시키듯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의 그이입니다.”

정말이지 마법 같은 단어였다.

정신을 차린 라모나는 얼른 눈을 깜빡여 눈가에 고인 눈물을 날려 버렸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그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띤 채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사랑, 당신과 떨어져 있는 일분일초가 너무나 괴로워서 말입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멜리사는 경악했다.

“……청춘이네.”

그녀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알폰조가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 *

라모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로베르트는 빠르게 그녀를 발코니로 빼돌렸다.

황제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발코니행이라니. 다른 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짓이었지만 괜찮았다.

그는 바로 ‘그’ 메닝엔 공작이었으니까.

어둑한 발코니에서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습니까?”

“덕분에요.”

로베르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한결 차분해진 라모나의 안색을 확인하고는 장난스레 턱을 괴었다.

“방금 전 어땠습니까?”

“뭐가요?”

“오늘도 멋진 사랑의 구원자 같았는지 묻는 건데요.”

기가 막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휘이잉.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로베르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로베르트는 어울리지 않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홀짝.

라모나는 그를 바라보며 기다란 샴페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뽀글거리는 기포가 입 안을 기분 좋게 간질거렸다.

약간의 알코올과 신선한 공기. 기분이 한층 나아진 라모나는 오랜만에 인심을 썼다.

“멋지긴 하네요.”

“역시 그렇게 말할…….”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던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예?”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묻자 당황한 라모나가 황급히 둘러댔다.

“이 잔이요. 잔이 정말 멋지다고요.”

“메닝엔 공작저의 샴페인 잔이 더 멋있습니다만.”

“세상에! 이런 데서 이상한 승부욕 부리지 마시고요.”

“승부욕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요. 그럼.”

그녀가 손을 내젓자 로베르트가 마치 소년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 돌아가서 같이 확인하는 건 어떻습니까.”

“네?”

이건 또 새로운 종류의 헛소리다. 라모나가 눈을 치켜떴다.

로베르트는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믿지 않는 것 같아서.”

“로베르트, 오늘이 황실 무도회라는 사실을 설마 잊은 건 아니겠죠?”

“뭐 어떻습니까.”

로베르트는 난간에 기대며 발코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괜찮다는 얘기입니다.”

그제야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자신을 위해서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였어.’

분명 요하네스도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실수했네.’

하지만 오랜만이라는 그의 입 모양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탓에 어쩔 수 없었다.

‘혹시 그 쓰레기도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거라면…….’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로베르트의 옆에 나란히 서 발코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요하네스를 마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그라도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에게 손을 대지는 못하겠지.’

그래, 그 정도면 됐다.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라모나가 로베르트에게 제안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벌써?”

“폐하라도 오셨으면 어떡해요. 곧 첫 춤도 시작될 테고요.”

“아아. 첫 춤.”

첫 춤이라는 말에 로베르트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군요.”

무슨 소리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로베르트의 시선은 라모나의 장갑에 매달린 댄스 카드로 향했다.

이내.

툭.

“……로베르트?”

그는 댄스 카드를 떼 버렸다.

경악한 라모나가 외쳤다.

“미쳤어요?”

“그런 걸로 합시다.”

“네?”

“당신의 미모에 눈이 먼 약혼자가 그만 질투심에 댄스 카드를 훼손한 거로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라모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에 손에 푸른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푸른빛을 발견한 로베르트의 입가에 예쁜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말이 되는군요.”

이런 미쳐 버린 세상, 미쳐 버린 남자. 어처구니가 없었던 라모나가 두 팔을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짧지 않은 시간을 발코니에서 단둘이 보낸 그들을 향해 도리스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차라리 그냥 뭐 했냐고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라모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로베르트는 그런 그녀를 모르는 척 헛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눈을 비볐다.

“이런.”

또 시작인가. 라모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를 모른 척했지만 도리스는 달랐다.

“어머! 각하 무슨 일이세요.”

안 돼. 저 주둥이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지 마. 라모나는 도리스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로베르트는 눈을 깜빡였다.

“아아, 별건 아니고. 앞이 잘 안 보이는 듯해서.”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라모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무래도 당신의 미모에 눈이 멀어 버린 모양입니다.”

이 미친 X이.

라모나는 싸늘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어쩜!”

감탄하던 도리스는 라모나의 살벌한 표정을 발견하고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내 그녀는 겁먹은 사슴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에클레어가 있는지 확인했다.

에클레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 도리스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라모나에게 속삭였다.

“라모나.”

“네?”

“저……. 혹시 오해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오해? 내가 무슨 오해를?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도리스?”

“그게……. 제가 메닝엔 공작 각하께 구애하기는 했지만 그게 정말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우상 심리였달까요. 혹시 그 점에서 라모나가 오해하고 있다면 제가 사과할게요.”

도리스가 라모나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그러니 기분 풀어요.”

‘이거 설마 그거야?’

내가 로베르트와 도리스가 이야기하는 걸 보고 질투해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신이시여.’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 대화를 엿들은 로베르트의 입술이 주체할 수 없이 씰룩거렸다.

결국 치솟는 자존감을 해결하지 못한 그는 슬그머니 라모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 사랑.”

“하지 마세요.”

“아직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만.”

“아무튼 하지 마세요.”

“너무합니다.”

“맞아요, 전 너무한 사람이에요. 짜릿하진 않으세요?”

라모나의 반응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습니다.”

로베르트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그러나 열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 정말 짜릿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맙소사. 그의 고백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유디트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 아시나요? 댁 손자가 이렇게 정신 줄 놔 버린 변태로 자라났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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