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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04화 (105/151)

#104화

Chapter 12. 한 여름 밤의 꿈

“메닝엔 공작 각하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께서 입장하십니다.”

황궁 시종의 우렁찬 외침에 소란스럽던 연회장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메닝엔이라는 이름이 만들어 낸 현상이었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다.

벤트하임의 시녀는 과연 어떻게 아이젠부르크의 신데렐라가 되었는가. 사교계의 일원들은 그 점이 미치도록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호기심, 질투, 빈정거림, 불쾌함. 제각기 다른 감정이 담긴 시선이 라모나를 향했다.

확실히 지난 생과는 다른 데뷔탕트였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긴장되네.’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로베르트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녀의 손길에 로베르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당당하게 턱을 치켜든 채 정면을 응시하며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볼에 입 좀 맞춰도 됩니까?”

지금? 깜짝 놀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그를 돌아보자 로베르트가 아까와는 다르게 주변에 다 들릴 만한 크기로 말했다.

“설마 그건 안 되는 겁니까, 내 사랑?”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귀가 쫑긋해졌다.

물론 앞선 말은 듣지 못했고, 큰 소리만 듣고 라모나가 무언가를 거절했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이 새X 이거 오랜만에 또 시작이네. 라모나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 하. 조금 곤란하죠.”

“역시 그렇습니까.”

로베르트는 풀 죽은 얼굴로 라모나의 어깨에 장난스레 머리를 묻었다.

“어머나.”

다정한 분위기에 감탄한 누군가가 얼른 부채로 입을 가렸다.

미치겠네. 라모나는 이를 꽉 깨물고 애써 나긋하게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환히 웃으며 로베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기요, 또 무슨 속셈이에요.”

“아무 속셈도 없습니다만.”

“거짓말하지 말아요.”

“들켰습니까?”

“당연하죠!”

“오. 짜…….”

“짜릿하다고 하지 말아요.”

라모나의 대답에 로베르트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또다시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조금은 속상하군요.”

로베르트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나의 천사.”

순간 연회장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고요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수치사할 것 같은 기분에 라모나는 억지로 입을 끌어 올렸다.

‘그냥 말을 말자.’

경험상 이럴 때는 그냥 얼른 이 남자 곁을 뜨는 게 답이었다.

“로베르트, 그럼 이만…….”

‘……응?’

멜리사와 도리스의 곁으로 가겠다고 말하려던 라모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로지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묘한 눈빛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레헨트에서 로베르트의 팔을 당기며 당돌하게 라모나를 바라보던 로지나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일은 좀…….’

괘씸하지.

라모나는 반쯤은 오기로 입을 열었다.

“로베르트?”

그의 이름을 부르는 말이 유달리 나긋했다. 달콤한 그녀의 목소리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예?”

“잠시 할 말이 있어서요, 귀 좀.”

얼떨떨한 얼굴의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쪽.

라모나는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꺅!”

도리스의 새된 비명이 들렸다.

라모나는 이제 눈이 거의 튀어나올 듯이 휘둥그레진 로베르트의 팔을 붙들고는 속삭였다.

“별일은 아니고, 이따가 보자고요.”

싱긋 웃는 그녀의 시야에 로베르트의 붉어진 목덜미가 들어왔다.

‘응? 더운가?’

사실 그래서가 아니라는 건 라모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아니, 외면하려고 노력했다.

* * *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커다란 샹들리에와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강렬한 향기를 풍기는 꽃.

세상에 온갖 화려한 것을 다 가져다 놓은 듯한 연회장에서 단언컨대 그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도리스가 라모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도리스는 그녀답게 호들갑스러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라모나! 세상에 세상에! 오늘 너무 아름다워요. 어쩜 이렇게 예쁜 드레스를 맞춘 거예요. 목걸이도 너어어무 예뻐요.”

샛노란 원단의 드레스는 보석 가루라도 뿌린 듯이 사방으로 빛을 뿜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촘촘하게 바느질한 비즈와, 금사가 섞인 레이스까지.

라모나였다면 입어 볼 엄두도 못 냈을 과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그 과한 면이 오히려 도리스와는 잘 어우러졌다.

라모나는 활짝 웃으며 도리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도리스. 도리스도 오늘 너무 예뻐요.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리네요.”

“정말요? 사실 너무 수수한 것 같아서 걱정이었어요. 역시 레이스를 몇 겹 더 달았어야 하나 싶었거든요.”

여기서 더? 깜짝 놀란 라모나가 그녀를 만류했다.

“음, 절대 수수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라모나의 말에 도리스는 그제야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이내 도리스의 미소는 한층 음흉하게 바뀌었다.

“꺄하하, 너무 다행이에요. 맞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예? 뭐가요?”

“아까 말이에요! 메닝엔 각하와 달콤한 입맞, 으읍, 읍.”

입맞춤이라는 말에 당황한 라모나가 도리스의 입에 에클레어를 쑤셔 넣었다.

“이거 너무 맛있던데, 도리스도 한번 먹어 봐요.”

“으읍, 므읐느으.”

눈이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도리스가 에클레어를 우걱우걱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실수했네.’

로베르트의 입을 막던 버릇이 남아서 그만. 당황한 라모나가 이번에는 마실 것을 도리스에게 건네주었다.

“고, 고마워요.”

약간 겁을 먹은 얼굴의 도리스가 어깨를 움츠린 채 음료 잔을 받아들었다.

그 사이 멜리사가 도착했다. 목까지 꼭 여민 푸른 드레스는 멜리사의 싸늘한 매력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도리스의 드레스를 발견하고 잠시 할 말을 잃은 멜리사는 침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을 짜냈다.

“드레스가 비싸 보이네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무리를 좀 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너무 예쁘지 않나요?”

신이 난 도리스가 치맛자락을 잡고 빙그르르 돌았다.

멜리사는 라모나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칭찬 아니었는데.’

‘그런 것 같았어요.’

두 사람은 도리스를 위해 진실을 덮어 두기로 했다.

도리스의 호들갑이 좀 진정되고, 지나가던 시종에게서 사과 와인을 한 잔 집어 든 멜리사가 라모나에게 물었다.

“기분은 어때요.”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건 다행이네요.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것도 아직까지요.”

“흠,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아직 안 나타나서 그런가.”

멜리사의 말에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미카엘라가 잔뜩 벼르고 있을 게 뻔했다.

그렇게 기다려온 데뷔탕트인데, 라모나가 사람들의 모든 시선을 가져갔으니 오죽하겠는가.

‘이것도 뭐 복수라면 복수인가.’

하지만 정말 라모나를 긴장되게 만든 것은 미카엘라가 아니었다.

요하네스.

그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쥐었다.

힐끔, 그런 라모나를 살핀 멜리사가 눈썹을 까딱했다. 이내 멜리사가 화제를 돌렸다.

“드레스가 독특하네요. 마담 루?”

“단번에 알아보셨네요.”

“데뷔탕트를 맞는 레이디에게 그런 드레스를 권했을 디자이너는 흔치 않죠.”

사실 마담 루가 권한 것은 아니었기에 라모나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역시 등이 너무 파였나.’

사과 와인을 홀짝인 멜리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이건 진짜 칭찬이에요. 예전의 그 칙칙한, 아 미안해요. 내 입이 원래 이래서. 아무튼 그 모습보다는 훨씬 보기 좋네요.”

또 다시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애매했던 라모나가 빙긋 웃던 때였다.

황궁 시종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알폰조 폰 에스터하지 2황자 전하와 레이디 슈타이덴께서 입장하십니다.”

알폰조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멜리사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그러나 알폰조의 도착 소식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기도 전, 시종의 목소리가 다시 연회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제국의 작은 태양, 요하네스 폰 에스터하지 황태자 전하와 레이디 벤트하임께서 입장하십니다.”

쿵.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라모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도리스가 라모나를 부축했다.

“라모나? 혹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죠?”

“……예.”

이윽고 문이 열리고 금발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백금을 녹인 듯한 부드러운 머리카락, 푸른 하늘을 옮긴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

그는 느긋하게 연회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윽고 요하네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오르는 것을 발견한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쿵.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깊은 지하로 굴러떨어졌다.

요하네스는 겁을 먹고 흔들리는 라모나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오랜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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