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설마 그 일을 직접 물어볼 줄이야. 로베르트의 질문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
문득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대단함을 실감했다. 자신은 고작 이 정도 일만으로도 수치사할 것 같은데, 저렇게 뻔뻔한 것도 역시 타고나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후,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지금부터 나는 로베르트 메닝엔이야.’
그래, 나는 주둥이야. 사람이 아닌 주둥이.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무,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역시 아무나 재앙의 주둥이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로베르트의 눈이 야릇하게 휘어졌다.
“거짓말.”
이내 그가 장난스레 덧붙였다.
“닥칠까요?”
“……맙소사,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뒀어요?”
“원래 미인은 기억력이 좋습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네요.”
“당연하죠, 제가 방금 지어낸 말이니까요.”
“와, 뻔뻔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의 말에 라모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제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그 상황에서 진정할 수 있겠어요?”
“이런, 그렇다면 그 정도 욕으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군요.”
“당연하죠!”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용서가 안 되는 걸요.”
그녀의 말에 놀랐는지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그가 곤란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제가 좀 노력해야겠군요.”
그러나 라모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세요.”
“예?”
“노력 같은 거 하지 마시라고요. 각하는 그럴수록 일이 꼬이잖아요.”
“오, 그거 조금 서운한 말입니다만.”
“죄송하지만 각하는 조금 서운하실 필요가 있어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가 못마땅한 얼굴로 눈썹을 까딱했다.
“왜 또 각하가 된 겁니까.”
“저희 사이에 멀어진 거리감을 호칭에 반영해 봤어요. 설마 또 서운하신 건 아니죠? ‘그’ 메닝엔 공작께서?”
“당연한 말씀을.”
“당연히 안 서운하신 거죠?”
부루퉁한 얼굴의 로베르트가 대답했다.
“당연히 서운하다는 뜻입니다.”
흐음, 이번에는 라모나의 눈이 장난스레 빛났다. 그녀가 이불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래서 ‘나의 사랑’이니, ‘나의 천사’니 하는 말들도 안 하시는 거예요?”
라모나의 질문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절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웃기시네. 웃음을 삼킨 라모나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뭔데요?”
순간 로베르트의 눈이 흔들린 것도 같았다.
입술을 한번 축인 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한숨을 내쉬는 미남은 묘한 나른함을 풍겼다.
“그야 당신이 싫어하니까.”
“……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시야에 붉게 물든 로베르트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뒷덜미가…… 빨개졌네.’
그도 부끄러움이라는 걸 타기는 하는 모양이다. 라모나가 묘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자 로베르트는 진지하게 덧붙였다.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라모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뭔가 중요한 포인트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흐음.’
고민하던 그녀가 로베르트에게 물었다.
“그게 왜 중요한 일인데요?”
“예?”
“그러니까, 무엇을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시는 건지 궁금하네요.”
그녀의 질문에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이내 깊고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 홀리기 딱 좋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져 갔다.
로베르트가 고개를 살짝 더 기울였다.
“궁금합니까?”
라모나는 대답대신 이불을 꽉 쥐었다. 어쩐지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라모나의 침묵에 로베르트는 태연하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비밀입니다.”
“네?”
아니, 이 남자. 요즘 비밀이 왜 이렇게 많지? 라모나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자 로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아마 모르는 게 나을 겁니다.”
그의 검은 눈이 또 다시 야릇하게 휘었다.
“일단 당분간은요.”
로베르트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공기가 팽팽해진 기분이 들었다. 위험한 신호였다.
라모나는 본능적으로 주춤, 뒤로 몸을 뺐다.
그녀가 긴장한 것을 알아챘는지 로베르트는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그나저나 의외였습니다.”
“……뭐가요?”
“당신이 그 호칭을 좋아할 줄이야.”
아, 나의 사랑? 나의 천사?
‘그게 좋을 리가!’
발끈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그의 말에 반박했다.
“좋다는 게 아니라……!”
그러나 라모나의 반발에도 로베르트는 태연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좋은 향기가 나는군요.”
세상에, 역시 끼 부리는 미남이란 너무 위험하다. 기껏 가라앉았던 라모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역시 이 남자를 빨리 내보내는 게 답일 듯했다.
“죄송하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는 피식 웃었다.
“제가 이만 사라져야 당신의 병이 낫겠죠.”
들켰나. 라모나가 어색하게 눈을 피하자 로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밤 되시죠, 나의 천사.”
그대로 나가는 줄 알았던 그는 허리를 숙여 라모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솜털에 닿는 손길이 아찔하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로베르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날카로운 턱선이 오늘따라 유달리 라모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라모나의 뺨 위를 맴돌자, 기껏 풀어 둔 분위기가 또다시 팽팽해졌다.
“그렇게 싫습니까?”
“예, 예?”
“나의 천사, 말입니다. 입술 세게 물면 상처가 남을 텐데요.”
그의 눈이 곱게 휘었다.
“싫어하면 안 하겠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
꿀꺽.
그가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또 다시 크게 움직였다.
로베르트는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제가 하려는 것도 당신이 싫어하는 행동입니까?”
꿀꺽.
이번에는 라모나가 침을 삼켰다.
등 뒤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시선을 내리니 이제는 로베르트의 셔츠 사이가 보일 듯 말 듯 눈 앞에 아른거려서, 라모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뭐가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뺨이 간지러웠다.
아니, 어쩌면 뺨이 아닐 수도 있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앙 다물었다.
로베르트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눈썹도 떨리고…….”
그가 웅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입술도 떨리고.
라모나는 그제야 자신의 입술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아니,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지?
움찔, 몸을 떤 그녀가 주먹을 꽉 쥐자 로베르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산뜻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눈앞이 조금 환해진 느낌에 라모나가 눈을 떴다.
눈을 너무 세게 감은 까닭일까. 뿌연 시야 속, 로베르트의 모습이 흐릿하게 아른거렸다.
“무엇을 위해서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내 그의 모습이 한결 뚜렷해졌다.
“궁금하면 말씀하시죠. 언제고 그 이유를 말씀드릴 의향이 있으니까요.”
잘생긴 얼굴, 탄탄한 몸, 자신만만한 태도.
“당신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오늘의 로베르트는 정말이지 사람 하나 홀리기에 딱 완벽했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라모나를 두고 로베르트는 발걸음을 뗐다.
“좋은 밤 되시죠.”
끄덕.
얼굴이 새빨개진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꼬리가 우아하게 휘어졌다.
“아프지 마시고요.”
달칵.
문이 닫히고, 라모나는 본능처럼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어찌할 줄 몰라서 입술만 달싹이던 라모나는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떡해.”
뜨끈한 이불 속에서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더 이상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도 없잖아.
왜 로베르트가 라모나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 중얼거렸는지, 왜 그녀의 몸이 닿자 로베르트가 몸을 움찔 떨었는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그의 모든 행동과 말이 한 가지 사실을 향하고 있었다.
로베르트 메닝엔은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를 좋아한다고.
“……진짜 어쩌면 좋아.”
라모나가 이불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되뇌었다.
이건 다 푸른빛 때문이라고.
차마 손목을 확인해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푸른빛이 떠올랐을까 봐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혹시라도 푸른빛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봐, 라모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