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그날 저녁, 메닝엔 공작저. 로베르트는 라모나의 마차를 마중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분명 저 뒤에 ‘내 사랑.’이 붙어야 할 것 같은데……. 라모나는 멀쩡하게 인사하는 로베르트를 노려보았다.
‘진짜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거 아냐?’
그녀는 진지하게 로베르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얼굴? 여전히 잘 생겼다. 어깨? 문제없이 넓다. 다리? 역시 기린처럼 길다.
‘뭐가 문제일까, 대체.’
심각한 고민에 잠긴 채 미간을 찌푸린 라모나를 보며 로베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디? 바텐베르크 후작저에서 무슨 일이라도?”
“아뇨,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메닝엔 공작 각하.”
심상찮은 그들의 호칭에 공작저의 하인들이 숨을 삼켰다.
로베르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당신의 그 멀쩡한 주둥이는 안 다행이지만요.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사람들의 앞이었다.
‘유치하게 굴지 말자.’
넌 성인이잖아, 라모나.
‘물론 저 남자도 성인이지만……. 저건 주둥이니까.’
사람이 아니지. 일단 로베르트를 평범한 성인에서 열외시킨 라모나가 로베르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라모나는 자연스레 그에게 팔짱을 꼈다.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데 저 자식이 멀쩡하니 할 말이 없다.
결국 라모나는 뻔하디뻔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떤 하루였나요, 로베르트.”
자비롭게도 로베르트라 불러준 건 덤이었다. 그녀는 어떤 주둥이와 달리 성인이었으니까.
순간 로베르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응?’
뭐야? 추운가?
“로베르트?”
“아, 뭐. 뻔한 하루 아니겠습니까.”
와, 정말 적응 안 돼. 라모나가 헛웃음을 치던 그때였다.
‘잠깐만.’
한 가지 깨달음이 라모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추운 날씨는 아니잖아.’
설마, 혹시 그건가.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살며시 로베르트와 팔짱을 낀 쪽으로 몸을 더 붙였다.
움찔.
‘오. 정말 연애 못 해 봤나 보네.’
얼굴은 멀쩡해가지고.
장난기가 돈 라모나가 은근슬쩍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로베르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로베르트가 그랬듯 눈을 야릇하게 휘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당신도 즐거운 하루를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죠?”
순간 로베르트가 숨을 삼키는 것이 라모나에게까지 전해졌다.
‘풉.’
웃음을 삼킨 라모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로베르트의 목에 닿았다. 꿀꺽, 로베르트가 침을 삼키자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오, 목이……. 잠깐만.’
나 지금 뭐하는 거야? 라모나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뭐, 뭐, 뭐야.’
갑자기 자기 자신의 행동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괜히 로베르트에게 몸을 바짝 붙인 것도 모자라, 그의 목을 구경하는 사람이라니.
변태도 이런 변태가 따로 없다. 설마 이런 것도 로베르트에게 옮은 걸까?
순간 라모나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잠깐만.
‘……내가 지금 로베르트 메닝엔을 희롱했어.’
내가 지금 저 남자를 희롱했다고. 내가! 저 남자를! 저 주둥이를!
자괴감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갑자기 아이젠부르크 자작과 자작 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 돼……. 우리 부모님은 나를 이렇게 키우지 않으셨어.’
정신 차리자 라모나. 제발, 제발.
부끄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한 라모나가 슬그머니 그에게서 팔을 빼려 했으나.
‘응?’
로베르트가 팔에 힘을 잔뜩 주는 바람에 팔을 뺄 수가 없었다.
단단한 팔 근육이 생생하게 느껴지자 라모나는 코끝에 비누 향이 맴도는 착각에 빠졌다.
귀가 벌게진 라모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로베르트, 다리에 힘 좀 빼 주세요.”
잠깐만, 다리가 아닌데? 팔인데!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일순간 메닝엔 공작저에 정적이 맴돌았다.
눈치 없는 하녀 하나가 옆에 선 하녀에게 속삭였다.
“다리에 힘을 빼면 넘어지지 않아?”
“어, 어어. 그렇지 뭐. 어어…….”
질문을 받은 하녀는 곤란한 듯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게 분명한 반응이었다.
‘아니! 다리 사이도 아니고 다리라고 했는…….’까지 생각한 라모나는 눈을 감았다.
미치겠다.
재앙의 주둥이가 얌전해지니 자신이 재앙의 주둥이가 된 기분이었다.
결국 라모나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머리가…… 너무…….”
필살의 꾀병.
비틀.
이마를 짚은 채 쓰러지듯 로베르트에게 몸을 기댄 라모나의 손이 닿은 곳은,
움찔.
“……레이디?”
빌어먹을 탄탄한 가슴이었다.
라모나는 그렇게 남의 가슴을 희롱한 레이디가 되어 버렸다.
미치겠어, 정말 미치겠어.
오늘도 댄버스 부인이 황급히 챙겨 온 이불에 돌돌 말려 방으로 옮겨지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나마 상체라 얼마나 다행이냐고.
* * *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로베르트의 질문에 라모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몸은 원래 괜찮았다고, 괜찮지 않은 것은 더럽혀진 내 생각밖에 없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머니, 아버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니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온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진이 다 빠진 그녀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덥네요.”
“창문을 좀 열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옷을 벗으면…….”
의미심장한 그녀의 단어 선택에 두 사람 모두 눈이 커졌다.
꿀꺽.
침을 삼킨 라모나가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수습했다.
“그러니까 잠옷으로 갈아입으면, 될, 것, 같아요.”
“다행이군요.”
로베르트의 대답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베르트가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는 누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 놓기라도 한 듯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라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으음, 좀 쉬고 싶네요. 머리가 어지러워서요.”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흔들렸다. 아프다는 건 역시나 좋은 핑계였다.
“그,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는 쉬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뭐지? 못 알아들은 건 아닐 텐데?’
눈을 깜빡한 라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야 할 것 같은데요, 각하.”
“그…….”
곤란한 듯 신음을 흘린 로베르트가 말했다.
“당신이 잠드는 걸 보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이건 또 뭐야?
‘새로운 전략인가.’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잠이 올 리가 없다. 옷도 갈아입지 못했고, 씻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저 남자가 앉아 있는데 옷을 갈아입고, 씻으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곰곰이 고민하던 라모나가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각하.”
“……예?”
“혹시 제게 할 얘기라도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여기 있는데. 라모나는 직접적으로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더워서 그런지 목마르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각하, 혹시 물 한 잔만 주실 수 있으신가요?”
라모나의 부탁에 로베르트는 곤란한 듯 눈을 굴렸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앉은 채로 손을 뻗어 물 잔을 라모나에게 건네주었다.
침대 헤드에 기댄 라모나가 조심스레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다 불현듯.
“아.”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주르륵.
물을 마시던 라모나가 입 안에 머금은 물을 저도 모르게 뱉어 버렸다.
‘맙소사.’
신이시여, 아니 그러니까 신을 찾기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한데, 아무튼 신이시여.
갑자기 주전자가 되어 버린 라모나의 모습에 깜짝 놀란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괜찮습니까?”
“아, 하, 하. 목이 너무 따갑네요. 감기에 걸린 걸까요.”
눈을 질끈 감은 라모나가 황급히 누워서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조, 좋네. 건강한 젊은이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생각이다.
그가 건강해서 라모나가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귀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단 이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든 타파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으음, 각하.”
“예.”
“사교 시즌 말이에요.”
“아아, 예.”
“제가 레이디 클라이스트와 교류해야 할까요?”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하필 이 시점에 꺼낸 게 로지나의 이야기라니.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굴리는 라모나에게 로베르트가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
“당신이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하지는 마세요.”
목소리는 또 왜 이리 다정한지.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이 못 견디게 어색했던 라모나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푸른빛은 왜 생긴 걸까요?”
급작스런 화제 전환에도 로베르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짐작이 가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
“주술 같은 건가요?”
“비슷합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그렇군요.”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베르트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뾰로통해진 라모나가 물었다.
“……왜 웃으세요?”
“당신이 그렇게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요.”
싱긋 웃는 로베르트를 라모나가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플러팅 장인.’
물어보지 말걸. 라모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된 건지 여유를 되찾은 로베르트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턱을 괸 채 라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까는 왜 그런 겁니까.”
“예?”
그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제 팔을 꽉 붙잡은 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