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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00화 (101/151)

#100화

늦은 밤, 슈타이덴 백작저.

불 꺼진 자신의 침실에 들어서는 알폰조의 등 뒤로 레이디 슈타이덴이 물었다.

“요즘 바쁘네.”

그녀의 목소리에 알폰조가 멈칫했다.

“주무실 줄 알았습니다.”

“이러다 아들 얼굴 까먹겠다 싶어서.”

가벼운 한숨을 내쉰 그녀가 알폰조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렇게 감이 오지 않은 적은 처음이구나, 알폰조.”

레이디 슈타이덴은 붉게 칠한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알폰조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얼마 전.

<수도에 왔다고는 들었다만……. 네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뒷골목에서 자신을 미행하던 이를 뒤쫓던 알폰조는 요하네스와 마주쳤다.

당황한 알폰조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요하네스는 눈썹을 까딱했다.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아닙니다.>

<요즘 네 소문이 자자하던데.>

은근슬쩍 라모나의 일을 입에 올리는 요하네스의 눈에는 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분명 알폰조에게 무언가를 캐내려는 의도가 역력한 눈빛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를 리가.>

요하네스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활짝 웃었다.

<알폰조.>

이내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네가, 감히, 나를 쥐고 흔들려 들어?>

<…….>

<내 관심을 끌고 싶었다면 성공이구나. 그러나, 다음번에는 직접 나를 찾아와야 할 것이야.>

내가 까딱하면 네 어미를 죽여 버리고 싶을 수도 있지 않으냐. 속삭이듯 덧붙인 요하네스는 이내 자리를 떴다.

알폰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더러운 것이라면 질색하던 요하네스가 뒷골목에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혹은…….’

감추기 위해.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또다시 지난 생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젠장.’

알폰조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래.”

레이디 슈타이덴이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폰조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전에도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절친한 친구였던 마리안느 메닝엔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후였다.

알폰조의 시선이 잠시 레이디 슈타이덴의 로켓 목걸이에 머물렀다.

“소중한 물건은 잘 간수해 두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레이디 슈타이덴의 눈이 커졌다.

알폰조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노리는 사람이 많을 테니 말입니다.”

“알폰조, 너 지금…….”

레이디 슈타이덴이 떨리는 손으로 알폰조의 팔을 붙잡던 때였다.

똑똑.

“황자 전하.”

곤란한 목소리의 시종이 알폰조를 찾았다. 황제가 아들을 위해 친히 골라 보낸 황궁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감시인이라는 뜻이었다. 한숨을 삼킨 알폰조가 대답했다.

“들어오도록.”

시종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이 시간에?”

“예.”

‘설마 요하네스?’

알폰조가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편지 봉투에 쓰인 것은 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알폰조 폰 에스터하지 2황자 전하께. 멜리사 바텐베르크.>

* * *

라모나가 다른 의미로 로베르트의 생각을 하염없이 하다가 잠든 밤.

<오, 나의 사랑.>

라모나의 꿈에 로베르트가 나왔다. 그것도 무려 상체를 탈의한.

기겁한 라모나가 자신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그에게 걸쳐 주었다.

<미쳤어요, 각하? 빨리 옷 입으세요!>

<하지만.>

로베르트는 가련한 얼굴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내 이런 모습을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나의 천사.>

툭.

라모나의 심경을 대변이라도 하듯 카디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 무, 무슨 소리에요! 빨리 옷이나 입으시라니까요.>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눈물점이 콕, 하고 박힌 눈이 야릇하게 휘어졌다.

<내 사랑, 제국의 보물. 우리 이만 솔직해집시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라모나의 눈이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로베르트는 자연스럽게 그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싫습니까?>

라모나와 한층 더 가까워진 그에게서 비누 향이 풍겨 왔다.

<다, 당연하죠!>

<그럴 리가 없는데.>

로베르트는 서운한지 눈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내가 싫다고?>

<…….>

<거봐. 아니지 않습니까.>

로베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니까. 나를 싫어할 수가 없지.>

젠장. 차마 부인할 수 없었던 라모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 사랑, 나의 천사, 제국의 보물, 미의 현신. 이만하면 내게 넘어와도 될 것 같은데요.>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녀의 강한 부인에 로베르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일 때문에 그런 겁니까?>

<……!>

<당신이 죽었다 살아나서, 당신은 요하네스의 정부였으니까?>

치부를 들킨 라모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툭.

로베르트의 손가락이 라모나의 뺨을 건드렸다.

<라모나.>

<…….>

<라모나?>

그의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라모나, 나를 봐 줘요.>

그의 애원에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로베르트는 다시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푸른빛의 탓인 걸로 합시다.>

그가 라모나의 어깨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의 의지가 아니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이건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목이 메인 라모나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나는…….’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였다.

쿠구궁.

갑자기 땅 아래에서 불길한 진동이 느껴졌다. 동시에 로베르트의 모습이 사라졌다.

‘응?’

당황한 라모나가 주변을 살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흙더미가 쏟아지기 시작한 가파른 산, 그리고 그 아래 멈춰 선 마차였다.

……안 돼.

<로베르트!>

라모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지만, 힘겹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먹먹한 암흑 속에 잠겨 버렸다.

안 돼, 안 돼. 라모나는 목이 터지도록 외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사이로 희미한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바텐베르크 후작저에 가셔야지요!”

티아의 목소리에 라모나는 얼른 눈을 훔쳤다. 다행히도 눈가는 메말라 있었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라모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쁜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멜리사는 라모나와 도리스를 바텐베르크 후작저로 초대했다.

“오랜만이에요.”

멜리사의 짧은 인사에도 도리스는 긴 수다를 시작했다.

“어머어머, 멜리사! 오늘 입은 드레스 너무 예쁘네요. 멜리사의 금발에는 무슨 색이든 잘 어울리지만, 연보라색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아! 그런데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도리스는 오늘도 노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포니테일에 맨 커다란 리본이 사랑스러웠다.

도리스가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사이 라모나는 차에 집중했다.

‘오!’

라모나의 코가 찡긋거리며 오뚝하게 솟았다.

‘이건 무슨 차지?’

푸르스름한 색이 신기한지 라모나가 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멜리사가 작게 웃었다.

“라모나.”

“예?”

“더 신기한 거 보여 줄까요?”

멜리사가 손짓하자 하녀가 기다렸다는 듯 레몬을 한 조각 내밀었다.

똑.

멜리사가 찻잔 위로 레몬을 짜자 레몬즙이 떨어진 부분이 서서히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어머!”

수다 떠는 것도 잊은 도리스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라모나의 눈도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멜리사는 태연하게 슈가볼에서 설탕을 꺼내 들며 덧붙였다.

“솔직히 맛보다는 이 재미로 먹는 차기는 해요.”

하지만 내심 뿌듯한 광대를 숨길 수는 없었다.

라모나는 그런 멜리사를 보며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화기애애한 티타임 시간이었다. 도중에 집사가 멜리사를 방문하기는 했지만.

“아가씨, 답장이 왔습니다.”

“아아, 내 방에 올려 둬.”

멜리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라모나는 제게 주어진 평화를 만끽했다.

‘평화롭다.’

재앙의 주둥이가 없는 이런 평화로운 티타임이 얼마 만인지…….

‘어제 있었네.’

……까지 생각한 그녀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맞지, 어제 있었지.’

젠틀하고, 예의 바르고, 말도 잘하는 로베르트 메닝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니.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에 로베르트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미치겠네.’

이건 뭐 짝사랑에 빠진 소녀도 아니고. 저도 모르게 손목을 확인한 라모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쿵.

갑자기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 드는 것은.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라모나를 발견한 도리스가 호들갑스레 물었다.

“어머, 라모나?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싱긋 웃은 라모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무 일도 아니다. 로베르트 메닝엔이 멀쩡해졌을 뿐, 이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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