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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99화 (100/151)

#99화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녀가 로베르트를 ‘로베르트 메닝엔 공작 각하.’라고 칭했던 순간부터 이랬던 것 같다.

‘흐음.’

설마 다 큰 성인 남성이 고작 그 정도에 삐진 건가.

‘하여간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당신이라면 제가 묻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니까요.”

시비인가.

“그럼 알면서 왜 물어보시는데요.”

라모나의 뾰족한 되물음에도 로베르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바람이 제법 시원하군요.”

능숙한 화제 전환이었다.

그 로베르트 메닝엔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한 대화의 흐름이었다.

라모나가 그렇게 애타게 바라 오던 모습이건만, 그녀는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로베르트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정상인의 모습을 유지했다.

힐끔, 로베르트를 살핀 라모나가 천천히 고기를 썰었다.

‘조용하니까 좋긴 한데…….’

체할 것 같다.

로베르트의 재앙의 주둥이가 힘을 잃자 라모나는 오히려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어졌다.

‘세상에, 나 저 남자 주둥이에 적응했나 봐.’

적응할 게 따로 있지. 지금껏 시달린 자신에게 애도를 표한 라모나가 물 한 모금으로 입 안을 정리했다.

그때,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좋군요.”

그럼 그렇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라모나가 물 잔을 내려놓았다.

“뭐가 좋다는 말씀이실까요?”

질문과 동시에 라모나는 그가 뭐라고 대답하든 대처할 수 있도록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야 물론 당신이죠.’라고 말하면 못 들은 척하면 되고, ‘당신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면 되고, ‘오, 나의 사랑, 나의 천사. 제국의 보물인 당신과 어쩌고저쩌고…….’ 하면 호호호 웃으면서 입을 막아 버리면 된다.

‘아무래도 제일 마지막이 가장 가능성 있지. 지금까지 저 주둥이를 참아 왔으니.’

역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나.

라모나는 침착하게 토마토 마리네이드를 포크로 찍었다. 그리고 토마토를 빙글 돌리며 각을 쟀다.

‘좋아, 이 정도 크기면 입을 막기는 충분해.’

준비는 끝났다. 그녀가 비장하게 포크를 들던 때였다.

“날씨 말입니다.”

‘응?’

이게 뭐야.

날씨라고? 당신이 아니라? 예상에 없던 정상적인 대답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로베르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황실 무도회 시작 즈음에는 항상 날씨가 꽤나 더워졌는데 말입니다. 올해 정도라면 무난하겠군요.”

이럴 리 없어. 라모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로베르트와 이렇게 정상적인 대화를 하게 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 * *

그날 밤, 라모나의 침실.

“뭘 잘못 먹었나…….”

베개를 꼭 끌어안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가씨?”

“아, 아냐. 내 얘기는 아니고.”

라모나의 대답에 티아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흐음, 저녁에 공작 각하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무슨 일? 없어서 문제였다. 라모나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상하네요…….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예.”

“그럴 리가.”

라모나는 티아의 말에 강하게 부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순탄한 저녁 식사였다.

그 이후로 로베르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빙의한 건 아닐까 싶은 멀쩡한 대화까지 이어 나갔다.

‘당신의 그이’도 ‘내 사랑’도 없었다.

회귀 이후로 라모나가 눈물겹게 바라던 정상적인 로베르트였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건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라모나의 심정이 묘하게 불편했다는 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생각했다.

‘왜지.’

왜 저렇게 멀쩡하게 말하는 거지?

왜 나를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라고 부르는 거지?

왜 요란한 사랑 고백을 안 하지?

물론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모든 게 다 그녀가 시킨 일이었다.

하지만 알지 않는가! 로베르트 메닝엔은 남이 시킨다고 말을 곱게 들어 처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푸른빛의 일이 미안해서?

천만에. 남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컨트롤할 수 있는 주둥이였다면 진작 잘 다물었을 것이다.

“흠.”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데.’

그게 대체 뭘까.

‘아니면 진짜 이번에야말로 뭘 잘못 먹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변화였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눕고, 티아가 불을 끄고 나갈 때까지 라모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 로베르트 메닝엔이 왜 정상인이 됐지?’

자신이 잠들기 직전까지 로베르트의 생각만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 * *

클라이스트 백작저, 수하들의 보고를 수합해 본 에드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소년을 레헨트로 다시 끌고 갈 줄이야…….”

그것도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분명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납치하기 위해 그 소년을 수도까지 데리고 왔으면서, 막상 거사를 앞두고 다시 소년을 레헨트로 내려보내다니.

‘설마 납치 계획은 함정인가.’

그렇다면 뭘 감추기 위해서 그런 함정을 팠을까. 고민하던 에드윈이 펜을 들었다.

뭐가 되었든 그가 결정할 사안은 아니었다.

뒷골목의 숨은 실세, 에드윈의 할 일은 떠도는 정보를 모아 그의 주인에게 전달하는 것뿐. 결정은 결국 로베르트의 몫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 당장 메닝엔 공작저를 찾아야겠어.’

에드윈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던 때였다.

똑똑.

“에드윈?”

동생의 목소리에 그가 한숨을 삼켰다.

“들어 와, 로지나.”

“얘기 들었어. 납치 문제가 영 이상하게 흘러간다며.”

끄응, 에드윈은 한숨을 흘렸다.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입을 열었다.

“설마 또 2황자가 수상하다는 이야기라면 안 들을 거야. 지금까지 내내 쫓아다녔지만 황태자가 뒷골목에서 2황자를 협박하는 장면밖에 목격하지 못했으니까.”

“그 얘기 하러 온 거 아냐.”

“오, 그럼 더 불안한데.”

에드윈의 비아냥거림에도 로지나는 굴하지 않았다. 피식 웃은 그녀가 책상 위에 앉았다.

“레헨트에 벤트하임의 손이 닿은 것 같아.”

“……뭐?”

“데미안 스펜서가 미카엘라 벤트하임에게 접근했다는 첩보가 있어, 게다가.”

로지나는 골치가 아픈지 눈썹을 찌푸렸다.

“레이디 애커만이 레헨트에 얼씬거린 모양이더라고. 하필 이 시기에.”

“흐음.”

에드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레헨트에 뭔 짓을 하고 있기는 한가 보네. 정말 아이젠부르크의 영지를 몰수하기라도 할 속셈인가…….”

“내가 한번 내려가 볼까?”

로지나의 제안에 에드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사교 시즌이 코앞인데 무슨.”

“어차피 사교 시즌 따위 내게 별 의미도 없어. 신랑감 찾을 생각도 없…….”

에드윈은 단호하게 로지나의 말을 잘랐다.

“로지나. 내 말은 네가 다른 레이디들처럼 남편감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교 시즌 동안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곁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야.”

“……일리가 있네.”

에드윈의 말에 로지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지나가 무엇을 걱정하는 줄 아는 에드윈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 각하랑 뭐 얘기한 거 있지 않냐? 그건 잘 돼가?”

“아아,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제 그 짓도 못 할 것 같아서.”

“왜?”

에드윈의 질문에 로지나가 한심하다는 듯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원래 사랑에는 남의 도움이라는 게 필요 없는 순간이 오는 거야. 어차피 당사자들 문제니까.”

“뭐라는 거야.”

“하긴, 연애 한 번 못 해 본 네가 뭘 알겠니.”

“이게 진짜. 그러는 넌 뭐 그리 잘난 사랑을 한다고……!”

욱한 나머지 로지나의 치부를 입에 담을 뻔한 에드윈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피식.

로지나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넌 몰라 멍청아.”

“그럼…….”

에드윈이 조심스레 무언가를 제안하려 했지만 로지나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우울하게 굴지 마. 기분 나빠.”

기지개를 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하는 약속한 건 지키는 분이니까. 난 돈이나 뜯어내고 내 살길 알아서 찾아야지.”

때마침 타이밍 좋게도 백작저의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가씨,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로지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세상에, 우리 아버지는 정말 귀신같다니까. 보나 마나 또 신랑감을 내미시겠네.”

한숨을 내쉰 로지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윈이 로지나의 어깨를 또다시 두드려 주었다.

“힘내라.”

“웃기시네, 아버지 관심이 내게 쏠린 덕에 너한테는 결혼 압박이 안 와서 좋아하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들켰네. 조금만 더 버텨 줘라.”

에드윈의 솔직한 대답에 피식 웃은 로지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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