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다음 날 이른 아침.
똑똑.
“라모나? 당신의 그이입니다.”
라모나의 침실 문밖에서 무척이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남자 목소리에 잠을 깰 줄이야.
‘최악이네.’
아직 눈도 못 뜬 라모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간신히 눈을 뜬 그녀가 시계를 보니 6시였다. 연무장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왜 아침부터 난리람. 한숨을 삼킨 라모나는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저렇게 뻔뻔할 수 있다니. 저것도 재주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꼭꼭 숨을 때는 언제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나더니 이제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당당해진 꼴을 보라.
‘어이없어.’
하여간 따라갈 수 없는 정신세계다.
헛웃음을 친 라모나가 겨우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카디건을 걸치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일이세요, 메닝엔 공작 각하.”
“예,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밤새 당신이 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정말 매일매일 새로운 남자였다.
신이시여. 이마를 짚은 라모나가 문밖을 향해 대꾸했다.
“허,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그럼 사양 않고 들어가겠습니다.”
로베르트는 아랑곳 않고 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라모나가 카디건을 여미며 소리쳤다.
“돌아가시라니까요!”
“이런, 잘못 들었군요.”
“거짓말.”
“아닌데.”
로베르트가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잘못 들었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어제부터 제게 너무 야박하십니다.”
기가 찬 라모나가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럼 그런 짓을 저지르고 좋은 대우 받기를 기대하셨어요?”
반박할 줄 알았던 로베르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군요.”
동시에 눈물점이 콕 박힌 그의 눈이 야릇하게 휘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라모나는 홀린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물기가 남은 검은 머리카락이 촉촉했다.
‘오늘은 비누 향이 나네.’
방금 씻고 온 모양이었다.
평소에 나던 코롱 향기도 좋았지만, 비누 향도 좋았다.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자극이랄까. 맡고 있노라니 묘하게 가슴이 술렁였다.
‘……좋다.’
습관처럼 그녀의 코가 찡긋거리며 오뚝하게 솟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핀 로베르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목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날씨가 많이 덥군요.”
툭.
로베르트가 단추를 하나 풀자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에 느슨한 여유가 생겼다.
그런가?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로베르트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그가 한쪽 팔을 걷어 올리고, 또 반대쪽 팔을 걷어 올리자.
‘와.’
핏줄이 선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라모나는 홀린 듯 그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로베르트가 연무장을 다녀올 때면 상체가 유달리 탄탄하기는…….
‘잠깐만.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라모나, 제발 너 정신 좀 차려!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라모나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귀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혹시 덥습니까?”
로베르트의 질문에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흠, 흠. 날씨가 많이 덥네요.”
“여름이 오기는 한 모양이군요.”
“그래서 무슨 일이신데요.”
“진짜 용건은 그게 다입니다.”
“네?”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만?”
이게 무슨.
라모나가 눈빛으로 욕을 날리자 피식 웃은 로베르트가 그녀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아니면 말고요.”
끼 부리는 미남이란.
‘재수 없어.’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로베르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당황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각하, 각하?”
로베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오랜만에 저녁은 밖에서 먹도록 하죠.”
손쉽게 저녁 약속을 잡는 넓은 등을 바라보며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또 무슨 속셈이지?’
로베르트라는 폭풍이 몰아친 후,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며 라모나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손목은 잠잠했다.
푸른빛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라모나는 생각했다.
그래, 난 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진짜로, 정말로!
* * *
서부 경계, 아이티아르. 가볍게 몸을 푸는 레이먼의 팔을 누군가가 툭툭 쳤다.
“얼굴 좋아졌다?”
레이먼의 친구, 콜린이었다.
피식.
레이먼은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오호 이것 봐라? 콜린은 은근슬쩍 목검을 내려놓고 레이먼의 앞에 앉았다.
“진짜야?”
“뭐가.”
“너희 누님이랑 메닝엔 공작.”
“아, 어.”
“와우. 나도 너한테 좀 잘 보여야겠네.”
“그럼 나 물 좀.”
“……너무한 거 아니냐?”
떨떠름한 콜린의 얼굴을 보며 레이먼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레이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콜린, 그거 있잖아.”
“그게 뭔데?”
“왜, 그 영양제인지 각성제인지 하는 거.”
“아.”
콜린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너도 그거 하려고?”
“그냥 궁금해서. 누구한테 가야 구할 수 있냐?”
“어…… 음…… 사무엘 크뤼거?”
사무엘 크뤼거라면 벤트하임 공작의 유력한 양자 후보였다.
레이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벤트하임이 엮여 있는 일인가. 그럼 영 수상한데.’
아무래도 수도에 있는 라모나에게 하루라도 빨리 이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레이먼은 지난번 그의 편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일을 떠올렸다.
‘누님의 말처럼 편지 일도 벤트하임의 소행이라면, 아마도 사무엘 크뤼거가 범인이겠지.’
게다가 레이먼의 편지를 대신 전해 줄 2황자 알폰조도 수도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진 레이먼에게 콜린은 걱정스레 말을 걸었다.
“근데 그거 웬만하면 손대지 마라.”
“응? 왜?”
“그 약을 먹으면 당장 힘든 훈련은 견디는데……. 후폭풍이 장난 아닌 모양이더라고.”
“어떻길래 그래.”
“환각이 보인다나 뭐라나. 아무튼 사람이 영 이상해진다더라.”
“……그래?”
환각이라.
수상한 예감에 레이먼의 눈이 가늘어졌다.
“콜린.”
“어?”
“사무엘 크뤼거에게 가면 각성제를 구할 수 있다고?”
일단 각성제고 뭐고 손에 넣어 보자. 레이먼의 얼굴에 진지한 빛이 떠올랐다.
* * *
깊은 산 속, 웬 허름한 마차가 하나 멈춰 서 있었다.
레헨트로 내려가던 중 여전히 빈민가를 통제하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벤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미치겠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닮은 귀족 아가씨가 시킨 일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어린아이 시신 하나를 처리해야 해. 레헨트의 빈민가 태생이니 레헨트에 묻어 달라 하더군.>
<예에? 시신이요?>
<높으신 분의 사생아야. 더 알아내려 들지 마. 네 목숨이 위험할 테니.>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린 벤이 혀를 찼다.
‘쯧.’
안 봐도 뻔했다.
휴가철을 맞아 방문한 레헨트에서 사고를 친 귀족 나리가 뒷일이 귀찮아질까 봐 죄 없는 아이 하나를 처리한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굳이 레헨트 태생이라며 레헨트에 묻어 달라니. 그것도 정확한 위치까지 지정해 주면서.
‘무슨 우물가 옆에 시신을 묻으라고……. 하여간 귀족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벤이 꺼림칙한 기분으로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수도에서 그가 맡았던 일보다 백배는 편하고, 백배는 안전한 일이었다.
‘그 약쟁이들이랑 떨어진 것도 좋기는 해.’
하지만 아가씨를 납치하려는 놈들의 계획을 메닝엔 공작저에 전해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곤란하다, 정말 곤란해.’
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당장 목숨을 부지하는 게 중요했다. 혀를 끌끌 찬 벤이 중얼거렸다.
“근데 이 아저씨는 왜 이렇게 안 와? 잠시 볼일만 보고 온다더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마부가 풀숲을 비척비척 헤치고 나타났다. 정말 배탈이 난 모양이었다.
그제야 경계를 푼 벤이 한숨을 삼켰다.
“배탈이 심한가 봐요?”
벤의 질문에 마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주 죽을 맛이야.”
“아이고, 그러게 여름에는 음식을 잘 가려 먹어야죠. 어제 그 청어가 좀 이상해 보였다니까요.”
“그러게 말이다.”
한숨을 쉰 마부가 고삐를 쥐었다.
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불행을 실은 마차는 다시 레헨트로 출발했다.
* * *
여름이 다가오며 해가 제법 길어졌다.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저녁, 하늘은 로맨틱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테라스에 앉은 로베르트는 라모나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라모나는 바짝 긴장했다.
‘저거 그거잖아. 나의 사랑, 나의 천사.’
그녀가 잽싸게 로베르트의 입을 막을 궁리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로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멀쩡한 일상 대화였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 봅니다.”
당황한 라모나가 말을 더듬었다.
“비, 비요?”
“예, 하늘이 이렇게 분홍빛으로 물들면 다음 날 꼭 비가 오거든요.”
“……신기하네요.”
사실 라모나가 정말 신기한 건 내일 비가 올지 여부가 아니었다.
‘저 주둥이가 오늘따라 멀쩡하네?’
라모나의 생각을 읽은 듯 로베르트는 물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사교 시즌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너무나 젠틀하게도 라모나를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라 칭하고 있었다.
그제야 라모나는 아침에 느꼈던 허전함의 원인을 깨달았다.
웬일로 로베르트는 나의 사랑이니, 나의 천사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얘 도대체 왜 이러니? 라모나의 얼굴에 오묘한 표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