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로베르트의 팔을 물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라모나가 소파에 앉았다.
당연히 그를 밀어낸 후였다.
로베르트의 탄탄한 가슴을 밀어내며 심장이 약간 두근거리기는 했, 아니 뭐라는 거야. 아무튼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조, 좋아요. 일단…….”
상황을 정리하려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좋습니다.”
뭐라는 거야! 경악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아니요!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추임새요. 일단 좋아요,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죠. 앞으로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해요.”
그러나 로베르트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군요.”
내 귀가? 라모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가렸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로베르트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이 남자가 오늘 정말 왜 이래? 라모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분명 잘못은 저 남자가 했는데 부끄러움은 그녀의 몫이었다.
‘후.’
참자, 라모나. 네가 좀만 참아 주자. 저 주둥이가 또 이상한 말이라도 하고 다니면 어떡해.
푸른빛에 의한 절대 을, 라모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각하.”
“말씀하시죠, 나의 천사.”
“부탁 하나만 할게요.”
“무엇이든지.”
“진짜,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주시면 안 될까요?”
거의 애원하는 수준인 라모나의 부탁에 로베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눈이 또 야릇하게 휘어졌다.
이내 그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입 모양을 달싹였다.
‘그건 좀 곤란한데.’
그래도 시키는 대로 했으니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까. 라모나가 한숨을 삼켰다.
‘저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도록 제대로 막았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야.’
설마하니 자신이 없는 곳에서 저런 끔찍한 말을 하고 다녔을 줄이야.
역시 저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재앙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어.
라모나가 이마를 짚던 그때, 불현듯 에밀리아의 말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다 공작 각하께서 언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래요.>
아니야, 에밀리아. 그럴 리가 없어. 언니가 봤어. 진짜야.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내게 이럴 리 없어.’
절대! 절대로.
멘탈이 무너진 라모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죄송한 줄은 아시니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그의 얼굴에 불길하고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혹시나 제가 좋아져도 당황하지 마시길.”
“예에?”
“푸른빛 때문이니까요. 저도 그 사실을 충분히 참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기가 막힌 라모나가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으나 로베르트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뭘 잘했다고 저렇게 당당해?’
미친 거 아냐? 억울한 기분에 라모나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한다는 듯 로베르트는 여유롭게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혼자 남은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방금도 제 얼굴 훔쳐보는 거 다 봤습니다.>
로베르트는 라모나가 그의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못 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그때 라모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분명 로베르트의 탄탄한…….
“어머, 진짜 미쳤나 봐.”
찰싹.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때렸다.
저 남자가 미쳤든, 세상이 미쳤든, 아니면 내가 미쳤든.
뭔가가 단단히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근데 내가 저 남자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말은 대체 왜 한 거야?’
그걸 물어봤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로베르트가 손목에 대고 음습하게 라모나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한 라모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저 자존감 과잉남이 그러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자신을 피해 다닌 것이라니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응접실. 라모나는 오랜만에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손목과 마법처럼 돌아온 시간.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 생을 없는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라모나는 알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로베르트 메닝엔을 마음에 담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내 의지가 아니라 푸른빛의 힘때문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분노가 가라앉은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 * *
황자궁의 사용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긴 요양을 떠났던 3황자 베르나딘이 드디어 돌아온 탓이었다.
그렇다고 베르나딘이 모시기에 까다로운 주인인 까닭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황자궁을 방문했기에, 사용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물론 그 수많은 약속의 장본인인 베르나딘 또한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는 정말 오랜만에, 간신히 시간을 내 바네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무리하신 건 아닐지 모르겠어요. 헤센 백작이 오라버니를 뵙고 싶어 한다 들었는데요.”
바네사의 말에 베르나딘은 손사래를 쳤다.
“무리는 무슨, 오히려 네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아 주어 다행이구나.”
이윽고 애피타이저가 나오기 시작했다.
문어 세비체와 상큼하게 절인 토마토. 하나같이 시고 단 것을 좋아하는 베르나딘의 취향에 맞춘 음식들이었다.
바네사는 말없이 포크를 들었다.
식사와 함께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얼마 전에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만났다면서.”
“아아, 네.”
바네사의 손이 잠시 멈췄다. 이내 그녀는 별일 아니란 듯 미소 지었다.
“레이디 바텐베르크와 함께 있던데……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더라고요.”
“저런, 레이디 벤트하임 짓인가.”
바텐베르크의 소식에 귀 기울이지 않는 베르나딘의 모습에 바네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아마도 그렇겠죠. 사교 시즌을 앞두고 있으니까요. 다들 괜한 기 싸움을 할 때잖아요.”
힐끔, 바네사의 안색을 살핀 베르나딘이 조심스레 본론을 꺼내 놓았다.
“……내일 로베르트를 만나기로 했다.”
“수도로 돌아와서 처음인가요? 오랜만에 메닝엔 공작을 만나시네요.”
바네사는 태연하게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녀가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고 여긴 베르나딘이 한숨을 삼켰다.
‘티는 안 내지만 마음고생이 심할 테지.’
그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네사, 약혼 건은 어찌 된 영문인지 제대로 듣고 오마. 그리고 나 또한 사과하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베르나딘의 말에 바네사가 잔잔히 웃었다.
“오라버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오라버니를 돕기 위해 약혼하려던 것인데요.”
바네사를 바라보는 베르나딘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번졌다.
“……미안하다, 바네사.”
“자꾸 그런 말씀 마세요. 오라버니께서 제게 죄송할 일이 뭐가 있나요.”
달그락.
물 잔을 든 바네사가 덧붙였다.
“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걸요. 참, 폐하께서는 별말씀 없으셨나요?”
“무엇을 말이냐.”
“황궁 무도회요.”
무도회라는 말에 베르나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요하네스를 견제하기 위해 한참 박차고 나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알폰조가 수도로 돌아오며 베르나딘의 순위가 밀리고 말았다.
‘물론 알폰조야 황위에 뜻이 없겠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떠들어 대겠군.’
배다른 형제를 떠올린 베르나딘이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네사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윽고 소리 없이 물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베르나딘을 불렀다.
“……오라버니.”
“응?”
“너무 걱정 마세요. 어차피 2황자 전하는 황태자 전하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거예요.”
부드러운 어투와는 다르게 단호한 내용에 베르나딘의 눈이 커졌다.
“바네사?”
“아시겠지만 2황자 전하는 정치적인 감각이 워낙 없으니까요. 슈타이덴 백작가의 자금력이 탄탄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인걸요. 아마 이번 일도 레이디 슈타이덴을 향한 황제 폐하의 감정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거예요.”
바네사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 오라버니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의 말에 베르나딘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럴 때면 네가 역시 나보다 내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구나.”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런 말씀 마세요.”
나이프를 들어 잘 구워진 아스파라거스를 썰며 바네사가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오라버니와 어머니와 함께 지금처럼 지내고 싶을 뿐인걸요.”
접시를 내려다보는 바네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당황한 베르나딘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곧 사교 시즌이 시작하는구나.”
“그러게요.”
희미하게 웃은 바네사가 중얼거렸다.
“이번 사교 시즌은 어떻게 될는지…… 도저히 예측이 안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