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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96화 (97/151)

#96화

잠시 시간을 빠르게 돌려 로베르트의 집무실.

“서, 서, 설마 푸른빛이 나타났나요?”

젠장, 벌써 들킬 줄이야.

로베르트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자 라모나가 그의 턱을 덥석 붙잡았다.

“네? 푸른빛이 나타났냐니까요?”

곤란에 빠진 로베르트는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를 악문 라모나가 그를 불렀다.

“르브르트 므능은?”

또르륵, 옆으로 눈을 굴린 그가 결국 대답했다.

“……맞습니다.”

로베르트는 분명 그녀가 자신을 타박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라모나는 아무 말 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생각보다 심각해진 분위기를 수습해 보고자 로베르트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라모나, 당신이 이럴 때마다 나는 짜릿해서 견딜…….”

“닥쳐요.”

욕만 얻어먹었다.

‘어떻게 내게 저렇게 심한 말을.’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충격을 받은 로베르트는 잠시 머리가 아찔해졌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깜빡. 로베르트는 최대한 무해해 보이도록 눈을 크게 떴다. 나름대로 지어 본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라모나의 가느다란 눈초리는 여전했다.

“내 사랑? 대체 왜 그런 눈으로 나를…….”

“하아, 그 말도 안 되는 사랑 타령 그만 좀 하시고요. 그래서 이번엔 뭐라고 하셨는데요?”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로베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각오는 하고 왔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려니 새삼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건지 와닿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차라리 둘러대 볼까? 그냥 농담 삼아 당신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고 말했는데 푸른빛이 나타났을 뿐이라고?

‘농담? 정말 최악이군.’

그런 자기방어는 사람을 더 꼴불견으로 만들 뿐이다.

차라리 솔직히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녀를 마음에 둔 것을 감추기 위해 허세를 부렸다고.

‘젠장, 얼어 죽을 그놈의 같잖은 허세.’

그의 목덜미가 또다시 달아올랐다.

부풀어 오르던 자존감도 형편없이 가라앉았다.

지금이라도 그냥 다른 화제를 꺼내 볼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꼴사납게 말을 흐렸다.

“당신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네? 각하, 잘 안 들려요?”

“당신이…… 나를…… 될 거라고…….”

도저히 그 문장을 내뱉을 수가 없다.

‘미치겠네.’

로베르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진심으로 죽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애써 마인드 컨트롤을 시도했다.

‘그래, 나 정도 되니까 이런 용기를 내지.’

마음에 둔 여자에게 ‘나는 쓰레기입니다.’라고 말할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가만히 있으면 신비한 힘이 그녀의 마음을 제 앞에 가져다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에 이렇게 나설 생각을 한 자신이 로베르트는 조금 기특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쳐 버린 자기애였다.

조금 이상한 발상이었지만 덕분에 로베르트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당신이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드디어 겸허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했습니다.”

주르륵.

찻잔을 들고 있던 라모나의 입에서 홍차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놀랍게도 미친 건 아닙니다. 로베르트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마지막으로 남은 눈치였다.

혼란에 빠진 라모나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난생처음 보는 그녀의 살벌한 모습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각하.”

어쩐지 그녀의 뒤에서 스산한 기운이 풍겼다.

“……예.”

“혹시 정신을 놓으셨나요?”

“미안합니다.”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낫겠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로베르트가 자신의 미모를 한껏 활용해 아름답게 웃어 보였지만.

“……웃어?”

라모나의 화만 부추길 뿐이었다. 그가 황급히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하, 하하……. 하, 하…….”

“하하, 보십시오. 라모나. 어차피 결혼할 사이에 잘된…….”

“꺄아아아악! 진짜 미쳤어요, 각하?”

“저는 언제나처럼 지극히 정상입니다만…….”

“각흐아아! 제가 지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 같아요?”

분노에 찬 그녀의 외침이 공작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를 악문 라모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르브르트 므능은…….”

그녀는 돌연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신께 받은 내 소명인가.”

뭐지? 이거 생각보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데? 로베르트가 라모나의 안색을 살폈다.

“저…… 라모나……?”

“……죽인다.”

누구를? 나를? 죽인다고?

“라모나? 자, 잠시, 잠시만. 무슨 그런 끔찍한 말…….”

“내 손으로 죽인다.”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사랑, 나의 천사 그게 대체 무슨…….”

“으아아! 나의 천사 그거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이, 일단 진정하고…….”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누가 누구를 좋아해? 이거 안 놔요!”

분노한 그녀는 로베르트의 가슴을 거칠게 밀어냈다.

“이 거지 같은 세상. 왜 나만! 왜 하필 저 재앙의 주둥이가!”라고 욕설을 외쳐 대면서.

하지만 이 난리 중에도 로베르트는 다른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라도 보니 좋다. 정말 미칠 듯이 좋다.

또다시 라모나가 자신을 피해 다니는 상상을 하니 죽을 만큼 싫었다.

그녀가 자신의 뺨을 후려쳐도 좋으니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로베르트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건 그냥 미친놈이잖아.’

드디어 로베르트는 예상보다 자신의 상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자신은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하다고. 그것도 아주 지독한 사랑에.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후.’

재앙의 주둥이면 어떻고 미친놈이면 어떤가. 어쨌든 자신은 라모나를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하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상대방도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일이지.

그거 하나는 자신 있었다. 빌어먹을 푸른빛 때문이냐고?

아니. 그는 바로 로베르트 메닝엔이었으니까.

‘그래, 내가 바로 그 로베르트 메닝엔이지.’

자신감을 되찾은 그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로베르트는 살며시 라모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와는 달리 부드러운 몸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뭐, 어차피 당신도 금방 내게 빠졌을 테니까…… 그냥 시기를 좀 당긴 거로 하죠.”

재수 없는 남자라 그녀에게 미움받아도 괜찮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받을 자신이 있으니까.

“진짜 미쳤어요?”

로베르트는 버럭 외치는 라모나에게 웃으며 속삭였다.

“나, 별로입니까?”

당황한 라모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로베르트는 자신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 조각 같은 몸. 무엇보다 어디서나 당당한 태도.

언제, 어떤 각도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자신이 잘생겨 보이는지. 20년이 넘게 이 잘난 얼굴을 달고 살아온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모나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여전히 거짓말에 소질은 없고.’

피식, 로베르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 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입만 열면 헛소리인데?”

“아닐 텐데.”

그의 말에 라모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꿀꺽, 그녀가 침을 삼키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한 번 더 해 볼까.’

이 정도 반응이면 생각보다 괜찮다.

가슴이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간질거렸고, 그 사실에 힘을 얻은 로베르트는 과감하게 선을 넘었다.

“이거 봐. 솔직히 내 얼굴, 당신 취향이잖아.”

“아, 아니거든요.”

“방금도 제 얼굴 훔쳐보는 거 다 봤습니다.”

“…….”

“이렇게.”

그가 보조개가 푹 파이게 미소 지었다.

“내가 이렇게 웃는 거 당신 좋아하잖아.”

로베르트는 여전히 라모나를 끌어안은 채 작게 속삭였다.

“아닌가?”

그의 눈이 마치 그녀를 도발하기라도 하는 듯 야릇하게 빛났다.

아니라고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내가 당신 앞에서 웃을 때마다 심장이 떨려서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러니 어디 한번 아니라고 말해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라모나를 보며 그는 확신했다.

지금의 침묵은 분명 긍정이다.

그는 일부러 라모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모나를 향한 그의 감정이란 참 신기한 것이어서, 자각할 때마다 새로운 색으로 덧입혀지곤 했다.

짙은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불쑥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아.’

그냥 이대로 입을 맞춰 버리고 싶다.

충동을 꾹 삼킨 그는 대신 라모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하얀 목덜미가 그의 앞에 맴돌았다.

꿀꺽.

저도 모르게 로베르트가 침을 삼키던 그때.

“윽!”

라모나가 돌연 그의 팔을 물어 버렸다.

그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라모나는 분명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역시 거짓말은 정말 못 해.’

로베르트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는 그녀 몰래 입술을 달싹였다.

‘오.’

짜릿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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