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라모나와 술을 마시던 그 날, 로베르트가 처음으로 인장을 사용했다.
인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제 정말 메닝엔의 주인으로 군림하겠다는 뜻과 같았다.
그 소식에 클레멘스가 다급히 수도로 올라온 이유가 너무나 뻔했다.
바로 클레멘스의 둘째 아들, 로베르트의 작은아버지. 에이드런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로베르트는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작은 아버지를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시는 모양입니다. 분명 할아버님께서는 저라면 그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셨을 테니까요.”
날카로운 추궁에 클레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로베르트가 말했다.
“황실 무도회가 끝나면 영지에 한 번 다녀올 생각입니다.”
“……영지에는 네가 무슨 일로.”
“창고를 열어 볼 일이 있는 탓입니다만. 그쯤 되면 사람들도 누가 정말 메닝엔의 주인인지 알게 될 것 같군요.”
메닝엔의 가주만이 열 수 있는 창고 이야기에 클레멘스의 얼굴이 급격히 무너졌다.
“반쪽짜리 공작 노릇은 이제 때려치울 생각입니다.”
로베르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할아버님, 전 이제 7년 전의 소년이 아닙니다.”
“…….”
“작은아버지를 처리할 마음을 먹었다면 진작 처리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냉정한 로베르트의 이야기에 클레멘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로베르트는 7년 전, 클레멘스가 자신을 차기 공작으로 지목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 로베르트가 리안드로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게 에이드런과 로베르트, 두 사람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에이드런이 공작위에 올랐다면 어떻게든 로베르트를 죽였을 테지만, 로베르트는 제 작은아버지를 죽일 만한 힘이 없었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후계자를 정하다니. 리안드로에게 무르다, 무르다 말하면서 누가 가장 무른 사람인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가 짓이기듯 내뱉었다.
“작은아버지는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로베르트 메닝엔은 리안드로 메닝엔이 아니었다.
로베르트는 그렇게 무른 선택을 하지도, 동정심 따위로 누군가를 마음에 담지도 않았다.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라모나를 향한 그의 마음은 분명 동정심,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클레멘스는 라모나에게서 마리안느를 보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 어느 면에서 그 질문은 사실이었다.
로베르트는 라모나가 마리안느처럼 잘못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클레멘스에게 남은 가주의 힘을 가져오기로. 그렇다면 그 누구에게서도 라모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목숨을 잃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로베르트는 가주의 창고에 보관된 신의 성물을 떠올렸다.
‘정말 그것이 푸른빛의 원인이라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메닝엔 공작저.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검술 수련을 하러 가는 로베르트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어제도 그 꿈을 꿨다.
어머니는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로베르트는 또 마차 안에 있었다.
‘지겹기도 하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젯밤부터 계속된 두통에 그가 검집을 꽉 쥐던 때였다.
‘……응?’
로베르트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누가 날 부른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한 로베르트는 소리가 난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은 다름 아닌 라모나의 침실 창문이었다.
아주 짧은 찰나, 그는 라모나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진 라모나는 재빨리 창문 아래로 몸을 감췄다.
“뭐야.”
로베르트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기 시작했다.
‘날 훔쳐보고 있었어?’
2황자 생각을 한다더니 역시 다 거짓말이 분명했다.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 로베르트는 어깨를 한번 풀고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힐끔 라모나의 침실 창문을 뒤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쉽게도 그녀는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창문으로 삐죽 튀어나온 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풋.”
‘저기 지금 쪼그려 앉아 있는 건가?’
하여간 귀엽기는.
세상 누가 저런 여자를 동정하겠는가, 사랑한다면 모를까.
그녀를 보고 나니 어젯밤부터 지속되던 두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순간 로베르트는 깨달았다.
<사람은 타인을 구원할 수 없어.>
클레멘스의 말은 틀린 게 분명하다고.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그를 시궁창에 던져 넣을 수도, 그리고 끔찍한 흙더미에서 구해 낼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감정적 절대 을. 자신의 처지를 되새긴 로베르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랑의 포로라도 된 건가.’
아쉽다. 자신을 포로로 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녀도 알아야 할 텐데.
‘곧 알게 되겠지.’
피식 웃은 로베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라모나의 침실로 갈까, 말까. 하지만 그는 이내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부터 레이디를 방문하는 건 실례지.’
……라는 이유로, 아직 그녀를 마주치기 부끄러운 마음을 모른 척하면서.
* * *
그날 이른 오전, 로베르트가 바텐베르크 후작을 만나기 위해 저택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그는 응접실로 향하던 라모나와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묶은 머리와 평소와는 달리 가벼운 옷차림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그가 인사를 건네려던 때, 라모나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꽂았다.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나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읏.”
덩달아 놀란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로베르트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젠장. 꼴사납게.’
그가 덜떨어진 스스로를 책망하던 때였다.
‘응?’
로베르트는 묘하게 라모나의 시선이 자신에 가슴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또다시 확신했다.
역시,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잘난 자신을 두고 라모나가 알폰조를 마음에 담았을 리 없다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로베르트가 예의상 인사를 건네려던 때였다.
“흠흠, 몸은 좀 괜찮…….”
“가, 가자. 티아.”
‘……응?’
라모나는 그를 못 본 척 쌩하니 자리를 떴다.
잠깐만, 이게 아닌데? 생전 처음 받아보는 홀대에 당황한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 * *
심란해진 로베르트는 바텐베르크 후작이고 뭐고 일단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그가 불안한 발걸음으로 창가를 서성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아니, 나 보고 싶어 하던 거 아니었나?’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이게 아닌데. 자존감을 빵빵하게 채웠던 로베르트의 가슴에서 바람 빠지듯 무언가가 새어 나갔다.
그가 연거푸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왜 나를 못 본 척했지?’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많이 바빴겠지, 하긴 오랜만에 아끼는 사촌 동생을 만났는데 마음이 급할 만도 했다.
게다가 유디트와 일곱 살짜리 어린 레이디를 혼자 두려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로베르트는 넓은 가슴만큼 자비로운 마음으로 라모나를 이해했다.
하지만 브리튼이 그에게 다가와 티타임이 다 끝났으며, 레이디 뷘터하이트를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고 알리는 순간.
벌떡.
“그럼 인사를 가야겠군.”
로베르트는 의자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로비에서 라모나를 발견한 그는 짐짓 놀란 척 라모나의 이름을 불렀다.
“할머……. 라모나?”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유디트는 자리를 피해 주려 했다.
“그러고 보니 로베르트. 헤센 백작이 네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한 것을 깜빡했구나.”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내 먼저 집무실로 가 있으마.”
그러나.
“그럼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세요.”
라모나는 얼른 둘 사이를 빠져나가 버렸다.
“에밀리아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공작 부인.”
유디트를 향해 눈짓으로 인사하고 자리를 뜨는 라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베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그 광경을 눈 뜨고 지켜볼 수 없는 탓이었다.
* * *
그날 이후로 라모나는 기를 쓰고 로베르트를 피해 다녔다.
멀리서 갈색 머리카락이 보여서 다가가면 바람과도 같이 사라졌고, 심지어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
‘저러다 몸 버리지.’
레헨트에 가기 전 라모나가 쓰러졌던 일을 떠올린 로베르트가 한숨을 삼켰다.
결국 로베르트는 자신이 식사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입맛도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난 1주일간 자신이 또 얼마나 꼴사나운 짓을 한 건지.
‘미치겠군.’
당해 보니 알겠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녀를 피해 다녀서는 안 됐다.
자신이 그녀를 피해 다닐 때 라모나가 어떤 기분이었을 지를 생각하니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라모나는 자신을 애타게 그리워했으니까.
속상하다. 속상해도 이렇게 속상할 수가 없다.
진지한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직접 이야기하자.’
푸른빛의 일은 그녀에게 숨기기에 너무 중요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감정이 무언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쾌하고 끔찍하겠는가.
그러니 더더욱 이야기해야 했다.
그리고 푸른빛의 이야기를 한 이후에는…….
그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겠다고.
이 이상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 즉시 정원을 산책하는 그녀를 찾아갔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시간 괜찮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