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94화 (95/151)

#94화

로베르트는 성큼성큼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는 냉랭한 눈으로 알폰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잘 들으라는 듯이 라모나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사랑? 나의 천사?”

그의 등장에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당혹스러운 듯 눈을 깜빡였다.

“……로베르트?”

로베르트는 라모나의 표정에 담긴 속마음을 읽었다. 아마도 저건 ‘당신을 기다렸어요.’일 거라고.

그래, 그녀도 분명 알폰조의 등장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라모나가 알면 기겁할 생각이었다.

의도적으로 알폰조를 한번 위에서 아래로 훑어본 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라모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마터면 짜릿하다고 말할 뻔한 로베르트가 자신의 주둥이를 단속했다.

‘침착하자, 로베르트 메닝엔.’

여기서 더 미움 받아서는 안 돼. 젠장.

절대 을, 로베르트 메닝엔은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조심스레 자신의 뺨을 꼬집어 보는 사이 로베르트는 생각했다.

‘오늘도 귀엽네.’

새치름하게 치솟은 눈꼬리, 오뚝한 코, 그리고 앙증맞은 입술.

라모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알폰조 따위에게 그녀를 보여 주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눈썹을 한번 까딱한 로베르트가 슬그머니 몸을 틀어 알폰조의 시야에서 라모나를 가렸다.

그 사이 라모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사랑? 무슨 문제라도?”

그가 알폰조 보란 듯이 라모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를 꽉 깨문 라모나가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로베르트?”

“그거야 당연히 당신이 보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말하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피하면서도 그녀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이거 완전 미친놈이군.’

목덜미가 뜨겁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라모나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녀의 눈을 피한 로베르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섭섭한 질문입니다.”

로베르트 메닝엔이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보다 확실할 수는 없었다.

* * *

불청객의 등장에 알폰조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알폰조가 떠난 후에도 라모나는 로베르트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이거야말로 좀 섭섭한걸. 속으로 혀를 찬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합니까.”

“별거 아니에요.”

“오, 더 궁금해지는군요.”

로베르트는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러자 라모나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로베르트가 짜릿하다며 장난을 치려던 순간, 그녀는 입을 열었다.

“2황자 전하 생각이요.”

“…….”

뭐?

누구?

나라고 말한 걸 내가 잘못 들었나? 로베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라모나는 친절하게도 웃으며 그에게 덧붙였다.

“많이 티가 났나 봐요, 죄송해요.”

머리가 아찔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왜 알폰조 생각을 하냐고 물을 수는 없다. 자존심이 있지.

“……라모나.”

한숨을 삼킨 로베르트는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합니다만.”

그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그녀가 알폰조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를 찾아냈다.

“2황자 알폰조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오해는 하지 마시고, 그가 수상한 의도를 가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 이 정도면 선방이다. 로베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사이, 라모나는 말했다.

“그래서 갑자기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예?”

“1주일간 얼굴도 안 보여 주고?”

자신이 말하고도 당황했는지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런 문제라면 저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2황자가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를 찾아오는데 당연히 이유가 있겠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잠깐만.’

그 순간 로베르트는 깨달았다.

‘이거 그건가?’

설마 라모나가 날 보고 싶어 했던 건가?

그럼 그렇지. 역시 이 잘난 몸은 어쩔 수 없군.

뭐라 말할 수 없이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의 광대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로베르트는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날 좋아하게 만드는 건 솔직히 일도 아니지 않…….>

그 순간 반짝이던 푸른빛을.

쿵.

한껏 들떴던 심장이 아래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한참 동안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라모나.”

“예, 예?”

“혹시 저를 좋아합니까? 갑자기 제가 좋아졌습니까?”

“그, 그럴 리가요!”

기겁하는 그녀의 대답에 로베르트는 알게 모르게 안도했다.

“……다행이군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일이 바빠서 저는 이만.”

로베르트는 삐거덕거리는 얼굴로 빠르게 자리를 떴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하다니, 우스운 일이라고.

하지만 슬퍼하기는 일렀다.

<1주일간 얼굴도 안 보여 주고?>

분명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그를 보고 싶어 했으니까.

우뚝.

그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 섰다.

‘흐음?’

길고 긴 삽질 끝, 그는 드디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어쩌면 이거, 해 볼 만한 일일지도.

드디어 길고 긴 자괴감의 터널을 벗어난 로베르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그날 밤, 외출했던 로베르트는 느지막이 귀가했다. 라모나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말 일이 바쁜 탓이었다.

마차 안에서 그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피곤하군.’

이럴 땐 차라리 질색하는 라모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나의 사랑이니 천사니 하는 말들을 주절거리고, 애써 안 들리는 척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을 구경하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으니까.

로베르트는 물끄러미 손목을 바라보았다.

개구쟁이 요정처럼 뛰놀던 푸른빛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잠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두 번 실수는 안 돼.’

피식.

천하의 로베르트 메닝엔이 이게 무슨 짓인지. 그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무튼 마차는 메닝엔 공작저에 도착했고,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집무실 문 앞에는.

“대체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이야기를 꺼낼 셈이냐.”

그의 조부, 클레멘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칵.

클레멘스는 원래 제 자리였던 집무실 문을 거리낌 없이 열고 들어섰다.

그의 뒤에 선 로베르트의 얼굴에 냉소적인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내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손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었습니다. 어쩐 일로 이 먼 길을 오신 겁니까. 몸도 아프신 할머님까지 모시고.”

그러나 클레멘스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양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았다.

“재정 관리는 생각보다 잘 되고 있구나. 훌륭해.”

“누가 절 가르치셨는데,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냐? 난 너를 그리 가르친 적이 없다만.”

탁.

클레멘스는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질책이 담긴 싸늘한 눈동자가 로베르트를 향했다.

“내 도무지 눈뜨고 봐줄 수가 없더구나.”

“저런,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겁니까? 주치의를 부를까요?”

태연하게 받아치는 손자에게 클레멘스는 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리 사람들을 속이려 한다지만 연인 행세도 정도껏 해야지! 그게 무슨 추태란 말이냐.”

“제 애정 표현이 추태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상처받습니다.”

“레헨트는 안 돼.”

“메닝엔의 주인이었던 자가 고작 영지 하나에 이리 벌벌 떨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그것참 볼만 하겠군요.”

로베르트가 비아냥거리자 클레멘스의 이마가 꿈틀했다.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설마 너도 그런 것이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리안드로처럼?”

리안드로. 제 아버지의 이름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가 어떤 여자를 마음에 품든 상관없다. 애초에 메닝엔의 이름에 걸맞은 사람을 만날 테니. 나와 유디트는 널 그렇게 키웠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아들의 일을 떠올린 그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클레멘스가 숨을 한번 골랐다.

“그러나 혹 동정심에 만나는 것이라면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클레멘스의 입에서 나온 동정심이라는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여자 하나에 신세를 망치는 것은 네 아비로 족해. 네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서 네 어미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 같으냐!”

클레멘스는 그에게 토해 내듯 외쳤다.

“네가 그 여자의 전부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겠지, 뭐든지 다 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누구에게서라도 구해 줄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숨을 한번 고른 클레멘스가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사람은 타인을 구원할 수 없어. 리안드로는 그걸 몰랐던 게지. 하지만 내, 너는 아는 줄 알았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굳은 얼굴의 로베르트가 그의 말을 부인하려 했지만 클레멘스는 듣지 않았다.

“후우. 그래, 그건 사고였지. 그래. 하지만…………”

침통한 얼굴로 책상을 내려다보던 클레멘스는 결국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짙은 주름 사이로 그가 지낸 세월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로베르트는 아무 말 없이 클레멘스를 바라보았다.

7년 전, 리안드로와 마리안느의 장례식을 마친 다음 날. 그때도 클레멘스는 저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창틀 사이로 스며든 눅눅한 공기 냄새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로베르트, 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묻던 클레멘스의 걱정이 무엇이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한참 만에 로베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약혼 소식에 걱정되어 수도로 올라오신 겁니까, 아님…………”

제법 싸늘한 목소리였다.

“제가 인장을 사용한 탓에 올라오신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