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허세를 부린다.
자칭 타칭 제국 최고의 미남 로베르트 메닝엔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의 경우는 워낙 모든 것이 잘나고 또 잘난 덕에, 지금까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허세라 치부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그 정도 손해가 난다 해도 뭐, 어차피 메닝엔의 창고에서는 티도 나지 않지.>
부럽지만 진실이었다.
<고작 백작에 불과한 자네가 감히 메닝엔 공작인 내게?>
분하지만 진실이었다.
<미안하지만, 솔직히 제국에 나만 한 얼굴이 있나?>
재수 없지만 진실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허세라 콕 집어 말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다만 다들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메닝엔의 공주님.’
그러나.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날 좋아하게 만드는 건 솔직히 일도 아니지 않…… 맙소사.”
이 말만은 명백한 허세였다.
로베르트 메닝엔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이게 가능하다고?”
잔뜩 신이 난 듯 날뛰는 푸른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에드윈.”
“예.”
“나가.”
이렇게 갑자기? 놀란 에드윈의 눈이 커졌다.
“지금요?”
“어.”
“어, 음, 각하, 제가 뭘 잘못했다면 말씀해 주시죠.”
그러나 로베르트는 대답 대신 매몰차게 그를 내쫓았다.
“나가. 어서.”
“각하? 지금? 갑자, 어어어, 각하, 밀지 마시고…… 제 발로 나가겠습니다. 각하? 각하!”
쾅.
황급히 에드윈의 등을 떠밀어 내쫓은 뒤, 로베르트는 입을 틀어막았다.
검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던 그가 아까 했던 말을 되뇌어 보았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나를 좋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손목에서 빌어먹을 푸른빛이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흡.”
화들짝 놀란 로베르트가 자신의 손목을 철썩 내리쳤다.
꿀꺽.
긴장한 나머지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그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푸른빛이 나타난다는 것은 내 말이 이루어진다는 신호고……. 그 의미에 의하면…….’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나를 좋아하게 된다고?
신이시여. 머리가 하얗게 비워진 로베르트가 이마를 짚었다.
한참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겨우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이건 너무 위험한 능력이라고.
그리고 만에 하나, 그래서는 안 되지만 이 힘에 의해서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건…….
너무 비참한 일이라고.
젠장. 그제야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는 유독 무르고, 그녀의 말이라면 믿으려 했으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너무나 뻔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후.”
한숨을 토해 낸 그가 창가를 서성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레헨트에서 그녀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을 때? 압생트를 마시다 눈물 흘리는 그녀를 봤을 때? 아니면.
<오, 로베르트. 내 사랑.>
그녀가 사고처럼 그의 인생에 끼어들었던 바로 그 순간?
“……미치겠군.”
로베르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가 뜨끈했다.
쿵, 또다시 가슴이 울렁이며 내려앉았다.
무슨 마법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라모나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던 들뜬 마음, 그녀 앞에서 유독 달라지는 자신의 감정 상태,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느끼던 위화감.
로베르트는 그제야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마법은 무슨, 이건…….’
젠장, 수치심이 몰려왔다.
라모나에게 했던 말들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예를 들면 ‘오 나의 사랑, 나의 천사.’ 같은 것들이었다.
그다음에는 꼴사납게 알폰조를 경계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의 가슴을 쿡, 하고 찌른 치명타는 바로 로지나의 제안에 혹해 넘어간 일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로베르트는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진짜 미치겠어.”
돌아 버릴 노릇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치졸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푸른빛이 떠올랐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쨌든 라모나는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미친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로베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괴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쯧, 혀를 찬 그가 중얼거렸다.
“……진짜 욕 나오네.”
스스로가 이렇게 최악으로 느껴질 수 있다니. 구겨진 로베르트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 * *
바로 그다음 날부터, 그의 라모나 피해 다니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사실 일부러 노력하는 것도 아니었다. 도저히 라모나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보니 자연히 그녀를 피해 다니게 됐다.
말에 힘을 가진 자신이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거라는 망언을 해 놓고 어찌 라모나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비록 쓰레기 짓을 하긴 했지만 그렇게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침 식사 시간. 라모나와 단둘이 식사하게 된 그는 시선을 접시에 고정하고는 빠르게 커틀러리를 움직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거의 마시듯이 식사를 마친 그는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로지나에게 공작저를 방문하지 말라 연락한 것은 물론이었다.
‘내가 미친 거지.’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요리조리 라모나를 잘 피해 다니던 그는 1주일이 되어 가던 날 라모나에게 잡힐 뻔했으나.
“각하, 잠시 저와 이야기 좀 하시죠.”
“로베르트?”
다행히도 때마침 나타난 유디트가 그를 구원해 주었다.
그 와중에 라모나의 입에서 나온 ‘각하’라는 호칭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약혼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각하라니. 로베르트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
침울해하는 로베르트의 얼굴을 보며 유디트가 피식 웃었다.
“어때, 늙은이 눈치가 아직 쓸 만하지?”
“할머님의 상황 파악 능력이야 언제나 제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만.”
“호오, 그래서 무슨 일이냐.”
“……별일 아닙니다.”
그의 대답에 유디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별일 아닌 걸로 치부하다가는 호되게 당할게다.”
유디트의 말에 로베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내 유디트가 무언가를 덧붙이려 했으나, 입술만 달싹이던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일에 집중하려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불쑥 그의 눈앞에 라모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럴 때면 그는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 보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구름을 바라보며 홀로 생각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나를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젠장. 좋아하게 만들면 되지.’
솔직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얼굴이면 얼굴, 몸이면 몸. 거기에 재산, 권력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고도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건지.
자신의 감정을 자각함과 동시에 그는 절대 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제 잘난 맛에 살던 로베르트 메닝엔은 자괴감의 터널에 들어섰다.
* * *
매일매일 생각했다.
왜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나를 안 좋아하지? 물론 내가 한 짓이 있지만, 그래도 나를 좀 좋아하면 안 되나?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하루에 백번이고 라모나를 찾아가 묻고 싶었다.
진짜 나를 안 좋아하는 거냐고.
그러니 도저히 라모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주둥이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아는 까닭에.
그리고 감정적 을로서 느끼는 푸른빛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하지만 그런 그가 라모나를 마냥 피할 수 없게 만든 사건이 있었으니.
똑똑똑.
“각하, 2황자 전하께서 공작저를 방문하셨습니다.”
“연락도 없이?”
알폰조가 당연히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한 로베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계를 살핀 그가 말했다.
“기다리시라 말씀드리도록.”
“외람되오나 각하를 뵈러 온 것이 아닙니다.”
“……뭐?”
“레이디의 손님으로 오셨습니다.”
이 미친놈이.
벌떡.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이를 꽉 깨문 채 브리튼에게 되물었다.
“지금 어떤 버러지가 누구를 만나러 내 저택에 왔다고?”
“버러지가 2황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2황자 전하께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만나러 공작저를 방문하셨습니다.”
뚝.
그 순간 로베르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굳은 얼굴로 문을 열고 나섰다.
단순한 질투 때문은 아니었다.
‘위험해.’
수상한 행적, 그리고 라모나를 향한 무리한 접근. 2황자 알폰조와 라모나를 단둘이 둘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도저히 알폰조의 속셈이 보이지 않았다.
황위를 노리는 것이라면 라모나가 아니라 자신에게 접근해야 했고,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면 요하네스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둘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정말 라모나를 향한 이성적인 관심인 걸까.
순간 로베르트는 레헨트에서 라모나가 쓰러지던 장면을 떠올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던 순간, 알폰조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그녀를 향한 걱정이 아니었다.
‘진짜 죽여 버릴까.’
이성의 끈을 간당간당하게 붙잡고 있는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응접실 앞, 로베르트는 괜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알폰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대를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
로베르트 메닝엔은 정말, 정말 기분이 더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