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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92화 (93/151)

#92화

유디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에밀리아는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갔다.

“오늘 초대는 감사했습니다. 공작 부인.”

다소곳한 에밀리아의 인사에 유디트가 흐뭇한 얼굴로 대답했다.

“늙은이의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네, 레이디 뷘터하이트. 또 보는 날을 기대하지.”

물론 돌아갈 때도 메닝엔 공작저의 마차를 탄 채였다.

사람들의 눈에 그건 분명 라모나를 향한 메닝엔 공작가의 지지로 비칠 것이다.

‘그 남자도 분명 그런 생각으로 한 행동이겠지.’

라모나가 얀닉인지 뭔지, 아무튼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고 있는 사이,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

“귀엽기도 하지. 어쩜 저렇게 말을 잘하는지 모르겠어.”

에밀리아를 향한 유디트의 칭찬에 라모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저런 증손녀가 있으면 참 행복하겠어.”

이어진 말에 라모나는 하마터면 마시지도 않은 홍차를 뿜을 뻔했다.

쿨, 럭.

간신히 기침을 참아 낸 라모나가 오늘은 더 이상 홍차를 마시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던 그때, 마침 재수 없게도 로베르트가 유디트를 찾아왔다.

“할머……. 라모나?”

놀란 척하는 로베르트의 얼굴이 어딘가 어색했지만, 그의 등장에 당황한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저 남자가 지금 왜 여기에 있어?’

일하러 간 거 아니었어?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얼굴을 찌푸리는 라모나를 본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노란 원피스가 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역시 옷을 갈아입을 걸 그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 부분을 가렸다.

그런 라모나를 힐끔 살핀 유디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로베르트를 한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로베르트. 헤센 백작이 네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한 것을 깜빡했구나.”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내 먼저 집무실로 가 있으마.”

유디트가 자리를 피해 주려는 것을 눈치챈 로베르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러나.

“그럼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세요.”

라모나는 자신이 빠져나갈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포착했다.

“에밀리아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공작 부인.”

유디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라모나가 얼른 자리를 떴다.

할머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은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건 너무 로베르트와 자신이 가족이 된 기분이 드니까.

아. 딱히 뭐, 그런 걸 의식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튼 아니었다.

* * *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피해 다닌 것에 이어, 이제는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피해 다닌 지 사흘이 되었다.

정말 웃긴 사실은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피하기 시작하자 로베르트가 그녀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어이없어.’

덕분에 라모나는 털을 잔뜩 곤두세운 새끼 고양이처럼 예민해졌다.

멀리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나면 귀신같이 발걸음을 틀었고, 정원에 산책을 나가다가도 검은 머리카락이 보이면 잽싸게 숨었다.

식사도 거르기 일쑤였다.

결국 어제부터는 그 사실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저택에서의 식사를 포기했다.

꼭 그녀가 밥을 거르지 않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웃기시네. 자기가 언제부터 나를 챙겼다고.’

라모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럴 때면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게 좋으련만, 황실 무도회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것도 애매했다.

벤은 라모나를 납치하려는 이들이 황실 무도회를 노린다고 했지만 함정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결국 가장 안전한 메닝엔 공작저에 틀어박혀 있는 게 최선이라는 뜻이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라모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든 게 다 그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혹 동정심에 만나는 것이라면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그때부터 로베르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이기 시작하더니, 뭐 하나 편한 게 없어졌다.

로베르트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귀로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평소에 잘 입고 다니던 옷도 혹시 그가 보기에 이상할까 싶어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최악이야.’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로베르트, 로베르트, 로베르트. 징글징글한 그 남자의 잔상이 하루 종일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도대체 왜?

라모나는 그녀의 음식에 로베르트가 각성제라도 탄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괴감이 밀려온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도리스의 편지가 도착했다. 라모나는 기분이나 조금 전환할 생각으로 도리스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라모나, 잘 지내고 있는 거예요? 그 날은 너무 갑자기 파하게 되어 아쉬웠어요.

레이디 정말이지가 제게 물을 퍼부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에요. 그 덕에 바네사 황녀님께 눈도장을 찍었으니 저로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죠.

바네사 황녀님은 어찌나 우아하고 멋있으시던지……. 하마터면 가서 청혼할 뻔했다니까요? 꿈에도 나올 정도였어요!

참, 그게 중요한 건 아닌데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네요. 제가 좀 이래요. 호호호.

다음번에는 우리 저택으로 초대할게요. 부디 라모나가 기쁘게 초대에 응해 줬으면 좋겠어요.>

어찌나 수다스러운 편지인지 글씨만 봐도 귀가 아픈 기분이었다.

역시 도리스. 감탄한 라모나가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사실 이렇게 편지를 보낸 건 별 대단한 용건 때문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제가 메닝엔 공작 각하께 연심을 표현하던 일을 혹시나 라모나가 마음에 담고 있을까 해서요.>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편지를 보내 준 도리스의 마음이 고마웠던 라모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공작 각하께서 아버지의 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파괴력 넘치는 미모를 가지고 계시기는 하잖아요?

권력이면 권력, 명예면 명예. 거기에 재산까지! 모든 걸 다 갖춘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시기도 하고요.>

로베르트를 향한 칭찬이 묘하게 라모나의 신경을 거스른 탓이었다.

“흠.”

라모나는 결국 읽던 편지를 내려놓은 채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로베르트 메닝엔이 그렇게 잘생겼나?’

솔직히 맞다.

‘그렇게 잘났고?’

이것도 솔직히 맞다.

‘다른 여자들 눈에도 다 이렇게 보이나?’

젠장 맞게도 솔직히 맞다.

“허.”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정말 짜증 나지만 그녀는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진짜…… 그놈의 주둥이는 왜 이렇게 잘난 거야?”

기분 전환을 하려고 했는데 기분만 더 나빠지고 말았다.

탁.

편지를 내려놓은 라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바람이라도 좀 쐬어야 할 것 같았다.

* * *

메닝엔 공작저의 정원에는 여름 수국이 한창 피어 있었다.

예쁘다. 그 사이를 한가롭게 거닐던 라모나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그래도 좀 낫네.’

이 꽃들은 예쁜데도 불구하고 누구처럼 헛소리도 안 하고 자기 자랑도 안 한다.

‘좋다, 최고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꽃을 구경하던 라모나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검은 머리.’

분명하다.

저건 로베르트 메닝엔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라모나가 황급히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라모나.”

로베르트가 그녀보다 빨리 라모나의 이름을 불렀다.

‘젠장.’

입술을 깨문 라모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각하?”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로베르트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가련해 보이기도 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시간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라모나는 다 큰 성인이었다.

그녀는 지성인답게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 *

로베르트의 집무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라모나.”

나긋하게 올라간 입술, 오른쪽 눈 아래에 콕 찍힌 눈물점까지. 정말 예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도리스의 편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파괴력 넘치는 미모. 그 표현이 정말 딱이었다.

아무튼 그런 파괴적인 미모의 소유자는 가련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과에 라모나는 코웃음 쳤다.

그녀는 더 이상 저 미소에 속지 않았다. 저 또라이는 못된 말을 하기 전이면 꼭 저렇게 예쁘게 웃었으니까.

라모나는 삐딱하게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잘나긴 했다. 잘생긴 얼굴, 탄탄한 허벅지, 만져 보고 싶은 가슴.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튼, 권력과 명예. 차고 넘치는 재산까지. 로베르트 메닝엔은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였다.

저 글러 먹은 인성만 빼고.

‘지금도 봐. 자기 잘생긴 거 알고 미인계 쓰는 거지.’

재수 없어. 빈정 상한 그녀는 속으로 괘씸죄를 추가했다.

저 얄밉게도 잘나긴 한 또라이가 오늘은 또 뭔 짓을 했기에 저러는 걸까.

털썩.

소파에 주저앉으며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저 또라이가 제대로 사고 쳤나 본데?”

“저…… 라모나? 방금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 같습니다만.”

“어머, 죄송해요.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절대 고의는 아니었어요.”

“이해합니다. 저도 고의는 아니었으니까요. 레이디께서도 저처럼 마음 넓게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로베르트가 틈새를 놓치지 않고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안하다더니? 라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들어 봐야 알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신데요?”

“제가 그만 말실수를 했는데 말입니다. 아, 하늘에 맹세코 정말, 정말로 아무 사심은 없었습니다. 오해는 말아 주시죠.”

“예에에, 어련하시겠…….”

‘잠깐만, 말실수?’

설마, 제발, 맙소사, 신이시여.

푸른빛을 떠올린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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