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다음 날 새벽 5시.
‘찝찝해.’
잠에서 깬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말이 깼다지 사실 잠들지 못했으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젯밤.
<그러나 혹 동정심에 만나는 것이라면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의도치 않게 클레멘스의 이야기를 엿들은 라모나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침실로 돌아왔다.
가족사를 논하는 중에 라모나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나머지 이유를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그녀의 심정이 너무 복잡했다.
동정심이라니.
그건 분명 클레멘스가 로베르트를 자극하기 위해 한 말일 것이다.
‘로베르트 메닝엔이 날 불쌍하게 여길 이유는 없지.’
지금의 라모나에게는 동정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혹시 그가 알폰조처럼 회귀자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라모나는 그가 회귀자일 리 없다고 확신했다.
불타는 레헨트를 그렇게 암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그녀에게 레헨트를 선물할 리는 없으리라.
‘그건…… 다행이네.’
정말 다행인가. 라모나는 습관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무튼 머릿속이 영 복잡해졌다.
“하아.”
라모나는 후회했다. 어젯밤 괜히 로베르트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그냥 깔끔하게 오늘 아침에 찾아갈 것을. 바네사 황녀 문제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괜한 말을 엿들은 덕분에 라모나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이건 계약이야, 필요에 의한 관계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듯 중얼거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창밖은 이미 환했다. 여름이 다가오며 해가 뜨는 시간이 부쩍 빨라졌다.
그래서일까.
‘……응?’
연무장으로 향하는 검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는 까닭은.
큰 키에 넓은 등. 자다 일어나 앞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미남일 것이 분명한 뒷모습을 본 순간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베르트?”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기 무섭게 로베르트가 이쪽을 홱, 하니 돌아보았다.
깜짝 놀란 라모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감췄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당황한 라모나의 귀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이 시간에 내 방 창문을 훔쳐봐, 변태야?
사실 관계를 따지자면 그를 먼저 훔쳐본 건 라모나였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라모나는 처음으로 저 재앙 같은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 * *
결국 라모나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아침 식사를 걸렀다.
‘오늘은 침실에만 있어야겠다.’
괜히 돌아다니다가 제 잘난 맛에 사는 재앙의 주둥이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 김에 밤새 못 잔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한 라모나가 다시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였다.
똑똑.
“아가씨!”
잔뜩 신난 목소리의 티아가 라모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티아?”
“에밀리아 아가씨가 오셨어요!”
“에밀리아가?”
그게 오늘이었나.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후, 황급히 단장한 라모나가 응접실로 향했다.
급하게 손질한 머리는 반만 묶어 자연스레 풀어 내리고, 하늘하늘한 소재의 레몬 빛이 도는 크림색 원피스를 입은 채였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좀 도리스 같은 발랄한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옷 같기도 하고.’
갈아입을까?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라모나가 고민하던 그 때였다.
“읏.”
난처한 신음이 라모나의 귓가에 울렸다.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로베르트 메닝엔이었다.
덩달아 놀란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외출하려던 찰나였나 보다.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다크 네이비 셔츠가 오늘따라 그를 더 고고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어깨가 넓어서 그런지 잘 어울리네.’
힐끔, 라모나는 자신의 원피스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다른 원피스를 입을 걸 그랬나. 동생 옷을 훔쳐 입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한번 옷차림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니 온갖 생각이 다 밀려왔다.
머리를 차라리 하나로 틀어 올릴걸, 이런 원피스에는 장신구를 좀 세게 할걸, 아니 애초에 그냥 다른 옷을 입을걸.
로베르트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기 시작한 라모나가 평소답지 않은 후회를 하는 사이, 그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흠흠, 몸은 좀 괜찮…….”
목소리를 가다듬은 로베르트가 예의상 인사를 건네던 때였다.
“가, 가자. 티아.”
당황한 라모나가 그를 보지 못한 척 발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란 티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이래 라모나! 너 미쳤어?’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자신에게 내적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이대로 돌아서 로베르트에게 인사하는 게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망했어.’
뭔지는 몰라도 일단 다 망했어. 아무튼 이번 생도 망했어.
입술을 깨문 라모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삐걱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로베르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등에 눈이 달리지 않은 라모나가 알 리 없었다.
* * *
라모나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겨우 진정시키며 들어선 메닝엔 공작저의 응접실.
연두색 원피스를 입은 양 갈래 소녀가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공작저의 하녀들은 모두 엄마 미소를 지은 채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를 발견한 라모나의 얼굴에도 하녀들과 똑같은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에밀리아! 세상에, 못 알아보겠다. 완전 레이디가 다 되었는걸?”
라모나의 칭찬에 에밀리아의 양 뺨이 발그레해졌다.
귀여워라. 에밀리아의 볼을 살짝 꼬집어 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라모나는 소파에 앉았다.
“이모님은?”
라모나의 질문에 에밀리아의 얼굴에 곤란한 빛이 떠올랐다.
“몸이 안 좋으셔서요.”
“어머, 정말?”
깜짝 놀란 라모나가 되묻자, 에밀리아가 조심스레 라모나의 귓가에 손나팔을 만들었다.
“으음, 이건 비밀인데요……. 어머니가 분명 말실수할 것 같다고 오지 않겠다 하셨어요.”
“아하.”
이모라면 그럴 수 있지. 뷘터하이트 자작 부인을 떠올린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아는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언니.”
이모, 대체 이 귀여운 꼬마에게 무슨 짐을 지워 주신 건가요.
라모나는 로베르트를 볼 때와는 다르게 아주 다정한 눈빛으로 에밀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걱정 마, 에밀리아. 그건 내가 잘 말씀드리도록 할게. 혼자 오느라 무서웠겠다.”
그러나 에밀리아는 야무지게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에요! 감사하게도 메닝엔 공작 각하께서 마차를 보내 주신 덕에 편하게 왔는걸요.”
“응? 공작 부인께서?”
“아니요, 메닝엔 공작 각하요.”
그 남자가?
“설마.”
“진짠데!”
에밀리아는 곤란한지 눈썹을 축 내려뜨렸다.
“그래? 웬일이람.”
그럴 리가 없는데.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에밀리아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물론 찻잔에는 홍차 대신 방금 짠 신선한 오렌지 주스가 담겨 있었다.
홀짝.
상큼 달콤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에밀리아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신이 났는지 엉덩이를 들썩인 에밀리아가 다시 찻잔을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엄마가 말했는데요.”
역시 우리 에밀리아는 너무 귀여워. 어머니에서 다시 엄마가 된 호칭에 라모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모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에밀리아는 다시 손나팔을 만들어 라모나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이게 다 공작 각하께서 언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래요.”
“어머,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아마 선대 공작 부인께서 보내신 걸 거야. 너를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 하셨거든.”
“진짜에요! 얀닉도 마를렌의 집에 삯마차를 보내 줬대요.”
“……얀닉이 누군데?”
“으음, 뷘터하이트 자작저의 사용인이요.”
“그럼 마를린은?”
라모나의 질문에 에밀리아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덩달아 목이 탄 라모나가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에밀리아는 주먹까지 꽉 쥐며 대답했다.
“얀닉이 사랑하는 여자예요.”
쿨럭.
사랑이라니, 사례 들린 라모나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에밀리아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언니! 흡. 맞다.”
예의를 아는 꼬마 레이디, 에밀리아는 얼른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라모나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레이디?”
그런 에밀리아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코가 너무 매웠다.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라모나는 겨우 기침을 가라앉혔다.
이내 그녀가 에밀리아의 말을 강하게 부인하려고 했으나, 그러기에는 에밀리아의 눈이 너무나도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하, 하, 하. 그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결국 라모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사랑?
누가? 로베르트 메닝엔이?
그럴 리 없지. 절대, 절대 그럴 리 없지.
‘분명 선대 공작 부인께서 시키신 일일 거야.’
이상한 일이었다.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가슴은 힘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역시 잠이 부족한 게 틀림없어.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그윽한 환청이 울려 퍼졌다.
나의 천사…….
나의 천사…….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빌어먹을 주둥이.’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