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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90화 (91/151)

#90화

“저런, 치마가 다 젖어 버렸군.”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도리스의 몰골에 바네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모나와 멜리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네사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바텐베르크의 딸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아이젠부르크의 딸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바네사는 멜리사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랜만이군, 레이디 바텐베르크. 후작께서는 평안하신가?”

“예.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멜리사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갑작스런 바네사 황녀의 등장에 당황한 레이디 블레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제가 칠칠치 못한 탓에…….”

“많이 놀랐겠어.”

바네사는 레이디 블레나를 나무라는 대신 도리스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가, 가, 감사합니다.”

감격한 도리스는 손수건을 손에 꼭 쥔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바네사 황녀는 그 누구보다 우아하고 귀족적인 황족이었다.

그 덕에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것은 물론이요, 사교계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만으로 레이디 블레나가 쩔쩔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내 바네사는 레이디 블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리스를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다정한 눈빛이었지만, 목소리는 확연히 달랐다.

“자네는 조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죄송합니다.”

“내게 사과할 일은 아니야.”

바네사의 말에 담긴 질책을 읽은 레이디 블레나가 황급히 도리스에게 사죄했다.

“정말 죄송해요, 레이디 오셀튼. 제 불찰이에요.”

바네사의 손수건을 꼭 쥔 도리스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머 어머 괜찮아요, 레이디 블레나. 실수였잖아요. 사고일 뿐인걸요. 별일 아니에요.”

도리스의 대답에 바네사는 빙긋 웃었다.

“오셀튼의 딸이라고 했나?”

“예, 예. 전하.”

“다정한 사람이로군. 그럼 황실 무도회에서 만나도록 하지.”

바네사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바네사가 티하우스를 나서자마자 레이디 블레나는 인사도 없이 후다닥 도망갔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도리스가 손수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쩜 바네사 황녀님은 저렇게 모든 행동이 다 우아하시지…….”

흠, 멜리사는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의외네요.”

“뭐가요?”

“바네사 황녀님이 누구에게 다정하다는 말을 하실 만한 분은 아니라서.”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도리스가 벅차오른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어머! 세상에, 그럼 저를 좋게 봐 주신 걸까요?”

멜리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지도.”

힐끔, 라모나의 안색을 살핀 그녀는 바네사가 라모나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은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도리스의 바네사 찬양이 이어졌지만 라모나는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분명 황녀도 나와 메닝엔 공작의 약혼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설마 그녀를 떠보러 온 걸까.

이번 사교 시즌이 평탄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라모나는 찝찝함을 덜어 내지 못한 채 메닝엔 공작저로 돌아왔다.

오늘도 그녀는 로베르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라모나를 피해 집무실에 틀어박힌 탓이었다.

‘이제 화도 안 난다.’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2황자가 나타나면 부리나케 달려오면서.’

이쯤 되면 베르나딘이 아니라 알폰조와 로베르트의 열애설이 터져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아, 그 열애설 내가 터뜨렸지.’

그럼 이것도 한번 터뜨려? 까지 생각한 라모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정신 차리자. 정신.

그녀는 이내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오늘 바네사 황녀를 만난 일을 로베르트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탓이었다.

분명 바네사 황녀가 그녀를 찾아온 것은 로베르트의 일 때문일 테니까.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네.’

로지나에 이어 바네사 황녀라니. 저 또라이는 왜 꼭 여자 문제도 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과 생기는 걸까.

“……티아.”

“네, 아가씨. 말씀하세요.”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을 봐야 할 때는 어떡하지?”

“으음, 왠지 그거 제가 잘 아는 분일 것 같은데요.”

“그래? 너도 그 사람이 꼴 보기 싫니?”

“아뇨! 큰일 날 말씀을!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그래도 만나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힐끔 라모나의 눈치를 살핀 티아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대화를 해 보면 그래도 왜 꼴 보기 싫어졌는지 이유라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다 더 싫어지면?”

“그럼 백 프로 그 사람 문제인 거죠 뭐.”

티아의 간단한 결론에 라모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민 끝에 라모나는 결국 로베르트를 찾아갔다.

늦은 밤 집무실 문 앞.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건가.’

망설이던 라모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지막으로 로베르트와 나누었던 대화가 또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저를 좋아합니까? 갑자기 제가 좋아졌습니까?>

<그, 그럴 리가요!>

<……다행이군요.>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이유 모를 화가 치솟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망설이던 그녀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려던 때, 안에서 클레멘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널 그렇게 키웠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응?’

심상찮은 내용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가족사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가 본데…….’

아무래도 타이밍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레헨트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입에 담던 로베르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처는 안 받았으면 좋겠네.’

한숨을 삼킨 라모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때, 또다시 격양된 클레멘스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나 혹 동정심에 만나는 것이라면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이건…….’

누가 들어도 내 얘기잖아. 당황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 * *

위치를 알 수 없는 어느 한적한 숲 속 오두막, 어두운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렸다.

“이쪽으로.”

데미안의 에스코트에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은 고개를 까딱했다.

데미안이 오두막의 문을 열기 전, 정체불명의 사람은 데미안을 향해 말했다.

“……레헨트에 갔던 게, 정말 라모나를 납치하기 위해서야?”

“이미 제게 사람을 붙여 확인하시지 않았습니까.”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약속해, 이 일은 전하께 비밀로 하겠다고. 물론 다 전하를 위한 일이지만.”

“예.”

데미안의 대답을 믿을 수 없었는지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망설이던 그녀가.

끼이익.

낡은 문을 열고 오두막에 들어섰다.

의자에 묶여 있던 소년, 벤은 깜짝 놀란 듯 외쳤다.

“으으읍!”

로브 사이로 언뜻 비치는 갈색 머리와 파란 눈 때문에 순간 그녀가 라모나라 착각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상한 점을 눈치챈 벤이 고개를 갸웃했다.

“으읍……?”

뭔가 조금 느낌이 다른데?

벤은 일단 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얌전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 * *

며칠 전, 침대에 드러누워 쉬고 있던 벤에게 갑자기 웬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벤은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쳤다.

저 멀리에 제법 큰 덩치의 사내가 보여 도움을 요청할 생각으로 큰 소리도 냈지만, 안타깝게도 사내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벤은 직감했다.

‘젠장, 아가씨와 내통 중인 걸 들켰구나.’

어쩌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소년을 엄습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서.’

미치겠네. 한참을 버둥거리던 벤은 결국 체념한 채 억센 손에 밀가루 포대처럼 질질 끌려갔다.

벤을 끌고 가던 괴한들은 곧 그의 눈을 가리고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이내.

퍽.

“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벤은 차가운 바닥에 던져졌다.

이제 정말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벤이 몸을 웅크렸다.

그곳에 도착하자 괴한들은 벤의 눈과 입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벤을 방치했다. 다행히 식사 때가 되면 음식을 안으로 던져 주는 정도의 아량은 베풀었다.

그러다 돌연 오늘, 그들은 벤의 몸을 일으켜 억지로 의자에 묶었다. 입에도 다시 재갈을 물렸다.

‘날 고문하려는 거구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벤이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의자에 묶인 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를 닮은 한 여자가 들어섰다.

벤을 감시하던 사내가 벤의 어깨를 꽉 붙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저분 앞에서 허튼짓 하면 진짜 죽을 줄 알아.”

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곱게는 안 죽인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사내는 다시 한번 벤을 협박하고 나서야 벤의 뒤로 물러섰다.

‘로브를 쓰고 있으니까 더 헷갈리네.’

그녀가 라모나인지, 아닌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던 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폈다.

그때였다.

짝.

매서운 손이 벤의 뺨을 강타했다.

“윽.”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는 벤의 뺨이 닿은 장갑이 더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벗어던졌다.

그리고 벤을 향해 말했다.

“어디 감히 천박한 핏줄이 내 얼굴을 살펴.”

“으, 으읍.”

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짜증스레 말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해. 안 그랬다가는 들개 밥으로 줘 버릴 테니까.”

그녀의 이야기에서 심상찮은 정황을 느낀 벤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 두 번 다시?’

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는 말했다.

“네가 레헨트의 지리를 잘 안다고?”

끄덕.

겁먹은 벤의 고갯짓에 여자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아이젠부르크 계집을 납치하는 일은 됐어. 네게 새 할 일을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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