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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89화 (90/151)

#89화

그녀가 황급히 다른 말로 둘러댔다.

“그, 그런 문제라면 저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2황자가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를 찾아오는데 당연히 이유가 있겠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나 로베르트는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한참 동안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라모나.”

“예, 예?”

“혹시 저를 좋아합니까? 갑자기 제가 좋아졌습니까?”

미쳤나 봐. 라모나는 경악했다.

생각해 보면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 남자는 항상 이랬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로베르트 메닝엔은 조금 이상했다.

분명 예쁜 미소를 짓고 있을 줄 알았던 그는 평소와 달리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나게 잘난 척을 하면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가 뭘까.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라모나의 귓불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미친 건 나인가 봐. 그녀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로베르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행이군요.”

그의 말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다행이라니? 뭐가? 당황한 라모나가 되물었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일이 바빠서 저는 이만.”

번개처럼 나타나 알폰조를 경계한 로베르트는, 이번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라모나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였다.

도대체 왜?

이건 또 무슨 새로운 또라이 짓인걸까.

이제 그를 조금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전혀 예측하지 못한 패턴이었다.

‘좀 열 받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사파이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왜 내가 자기를 안 좋아하는 게 다행이야? 내가 질척거리기라도 할까 봐?

‘어처구니가 없네, 정말.’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재앙 같은 남자는 기사단을 꾸릴 만큼 잔뜩 가져다줘도 사양이었다.

정말이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라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나는 내 살길이나 알아서 찾아야지.’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마음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허전했다.

* * *

벤트하임 공작저.

똑똑.

“아버지? 부르셨어요?”

미카엘라가 조심스레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자 곁에 선 벤트하임 공작 부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가 다시 노크하라며 문을 향해 눈짓했다.

한숨을 삼킨 미카엘라가 조심스레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미카엘라에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참 만에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너라.”

굳은 얼굴의 공작 부인이 미카엘라의 어깨를 꽉 붙잡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멍청한 짓해서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거라.”

“걱정 마세요.”

미카엘라의 대답에도 못 미더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그녀가 기척 없이 자리를 떴다.

말없이 공작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카엘라는 이윽고 문을 열고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집무실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미카엘라는 청소하는 하녀의 옷이 흐트러진 사실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저를 찾으셨다 들었어요.”

“그래.”

공작은 심기가 불편한 듯 눈썹을 까딱했다.

“아이젠부르크 일은 아직이냐?”

“그건…….”

당황한 미카엘라가 말끝을 흐리자 공작이 혀를 쯧쯧 찼다.

“황태자 전하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이상 무조건 그 계집을 넘겨 드려야 한다.”

“…….”

“심지어 내가 나선 것도 알고 계시니, 후우. 전하의 성정은 너도 알지 않느냐.”

“그럼요.”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네가 황후가 될 테고, 그 계집은 장난감에 불과할 테니까. 그러니 이 이상 시간을 끌지 말거라. 아니면…….”

벤트하임 공작은 태연하게 커프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비슷한 생김새의 계집을 하나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구나. 아마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이젠부르크 계집이 너와 닮아 관심을 가지게 되신 걸 테다.”

“아버지?”

“괜찮군, 뒤탈이 없게 평민 중에서 하나 찾아보도록 하지.”

공작의 말에 미카엘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모나도 모자라 이제는 평민이라니. 그녀의 콧대 높은 자존심이 와장창 깨졌다.

‘지긋지긋해.’

미카엘라의 화살은 또다시 라모나를 향했다.

고작 아이젠부르크 계집애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굳은 얼굴의 미카엘라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서는 자리를 떴다.

* * *

다음 날, 수도 번화가의 한 티 하우스.

‘저건…… 병아리?’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샛노란 무언가를 발견한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윽고 병아리, 아니 레이디 오셀튼이 활짝 웃으며 라모나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라모나! 기다렸어요!”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도리스.”

“어머나 어머나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라모나를 만나는 일은 항상 즐거운걸요. 저언혀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레이디 오셀튼, 도리스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친구라는 말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도리스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멜리사는 묘한 눈으로 그런 라모나를 살폈다.

이내 멜리사가 슈가 볼을 열어 각설탕을 하나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어제 2황자 전하께서 메닝엔 공작저에 왔다 가셨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요?”

“수도의 레이디라면 2황자 전하의 소식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한 멜리사가 스푼으로 차를 저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우리를 불러낸 거예요? 사교 시즌?”

“비슷해요.”

차마 사교 시즌을 무사히 보내기에 로베르트가 못 미더워서라고 말할 수 없었던 라모나가 입을 다물었다.

도리스가 대신 꺄하하 웃으며 입을 열었다.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나는 건 아니죠! 그냥 만나서 별일 없이 수다 떨고, 맛있는 것도 먹고. 어떻게 보면 이런 게 다 사교 시즌 준비 아니겠어요?”

멜리사가 헛웃음을 쳤다.

“긍정적이네요.”

“감사해요. 사실 제가 그런 말을 좀 많이 들어요.”

“칭찬 아니에요.”

“네에?”

멜리사의 말에 울상이 된 도리스를 보며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서로 일정을 미리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별 대단한 의도가 있던 건 아니에요.”

“아아.”

멜리사는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네요. 벤트하임 쪽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혼자보다는 둘이 낫죠.”

멜리사의 말에 도리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셋인데요?”

멜리사는 못 들은 척 입을 열었다.

“저는 아마 황실 무도회, 슈타이덴 백작가의 정찬, 오셀튼 백작가의 음악회 정도? 아, 클라이스트 백작가도 들릴지도.”

멜리사의 말에 도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밖에요?”

“쓸데없는 자리는 안 가요.”

“세상에…… 저는 황실 무도회 다음 날 점심은 헤센 백작가의 티파티, 그날 저녁은 뮐러 자작가의 음악회. 으으음, 그리고 그다음 날 점심에는 슈미트 자작가의 전시회, 저녁에는 호프만 자작가의 정찬.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도리스의 일정에 라모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전부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어요, 도리스.”

라모나의 말에 도리스가 배시시 웃었다.

“조금 많긴 하죠?”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함께 움직이면 좋을 자리를 정했다.

원래 계획보다 두 군데 정도를 더 들려야 하는 멜리사가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슈타이덴 백작가에 라모나와 동행한다는 사실에 만족해했다.

다만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라모나.”

“예?”

“클라이스트 백작가는 안 가요? 메닝엔의 가신이잖아요, 가는 게 나을 텐데?”

순간 로지나의 얼굴을 떠올린 라모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글쎄요. 제가 굳이 가야 할까 싶어서…….”

라모나가 말끝을 흐리던 때였다.

촤악.

누군가 도리스의 치맛자락에 차가운 물을 쏟았다.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도리스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꺅!”

“어머 어떡해.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

범인은 레이디 블레나였다.

일부러 물을 부은 것이 분명한 그녀가 살살 웃으며 도리스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죄송해서 어쩌죠, 레이디 오셀튼. 잔이 너무 무거워서 그만 물을 흘리고 말았네요.”

너무 뻔한 수법에 기가 찬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하. 레이디 블레나, 지금 이게 무슨…….”

그러나 라모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티 하우스에 나타난 불청객 때문이었다.

“괜찮은가?”

나긋한 목소리와 우아한 손짓. 불청객의 정체를 알아차린 레이디 블레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세상에.”

놀란 것은 도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벌떡.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오른 도리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오, 오셀튼의 딸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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