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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88화 (89/151)

#88화

Chapter 11. 사교 시즌의 시작

하늘이 유독 맑은 오후,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던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상한데.’

드레스를 가봉하던 그 날 이후로 벌써 1주일이 흘렀다.

그사이 소소한 일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유디트와 클레멘스가 메닝엔 공작저로 돌아왔다.

클레멘스가 많이 화났을 것이라는 로베르트의 말과는 달리 그는 태연했다.

그 점이 더 불안하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라모나는 폭풍 전야 같은 지금의 평화를 즐기기로 했다.

그다음으로는 에밀리아가 수도에 도착했다.

조만간 메닝엔 공작저를 방문하겠다는 에밀리아의 편지에 라모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기쁘게도 로베르트의 재앙의 주둥이는 얌전했고, 레헨트의 통제도 수월했다.

문자 그대로 평화로운 나날, 그러나 라모나는 찝찝한 기분을 져버릴 수 없었다.

범인은 뻔했다.

잘나디잘난 메닝엔 공작 로베르트 메닝엔. 쉴 새 없이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주둥이를 놀리던 그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무는 기행을 시작했다.

‘이상하다. 묘하게 나를 피하는 느낌이란 말이지…….’

마담 루의 드레스를 가봉하던 날, 아침 식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자리를 뜬 로베르트는 그 이후로 라모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항상 밖에서 식사 약속을 잡았으며, 저택에 들어와서는 클레멘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어제는 라모나가 저택을 나서려는 그를 겨우 붙잡았으나.

<로베르트?>

하필 유디트가 그때 로베르트를 찾는 바람에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왜지?

뭐지?

고민하던 라모나는 결국 또 한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로지나 클라이스트.

‘……설마.’

라모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곧 사교 시즌의 시작이었다.

그가 자신을 피하든 말든, 상의해야 할 내용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누구는 뭐 좋아서 쫓아다니는 줄 아나.’

하여간 처음부터 알아봤다. 바쁜 척이라면 제국 그 누구보다 잘하는 남자 아닌가.

‘재수 없어, 정말.’

푸른빛의 힘이 로베르트가 아닌 그녀에게 생겼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길 가다 넘어지기나 하라고 손목에 백번쯤 빌었을 것이다.

‘어디서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괜한 허전함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고 로베르트 메닝엔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정말로.

홀짝.

라모나가 홍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하지만 동방의 높은 산에서 겨우 채취했다는 귀한 홍차도, 섬세한 금빛 무늬가 잔뜩 그려진 찻잔도 오늘따라 별 감흥이 없었다.

달그락.

결국 라모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댄버스 부인.”

“예, 레이디.”

“각하께서는 지금 저택에 계신가?”

“예, 집무실에 계십니다.”

잠시 갈등하던 라모나는 결심했다.

‘그래,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비위 맞춰 주자.’

어쩌면 내가 실수한 게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잖아.

이건 비즈니스다. 절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열심히 스스로에게 되뇐 그녀가 로베르트를 찾아가려던 때였다.

똑똑.

“레이디.”

집사 브리튼이 그녀를 찾아왔다.

“브리튼? 무슨 일이지?”

“2황자 전하께서 레이디를 방문하셨습니다.”

알폰조가 메닝엔 저택을 찾아왔다는 소식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 * *

“공작저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나무람 같은 라모나의 인사에 알폰조는 어색하게 웃었다.

“꼭 메닝엔 공작처럼 말하는군.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예?”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알폰조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가 회귀 전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라모나는 습관처럼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내 알폰조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는 좀 생각해 봤나.”

“…….”

라모나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알폰조는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다행이야. 헛소리라 치부하지는 않는군.”

하아, 라모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2황자 전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알폰조는 퍽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조금 섭섭한 말이로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쭤보지 않을 수 없네요.”

“이해해.”

알폰조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대나 나나, 그런 일을 겪었으니……. 사람을 함부로 믿을 수 없겠지.”

또다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말에 라모나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알폰조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없다면 솔직히 거짓말이겠지. 나는 그자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 해.”

“그건 저도 원하는 바입니다만……. 고작 자작가의 여식에 불과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네요.”

“과소평가야. 나는 그 당시 그대가 보여 주었던 능력을 똑똑히 기억해.”

알폰조는 물끄러미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우직한 눈에 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대를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

그는 천천히, 그리고 진중하게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입에 담았다.

유독 큰 덩치 때문일까. 오늘따라 알폰조는 우뚝 선 산처럼 보였다.

그럴 때가 아닌데 이상하게 호흡이 편안했다.

라모나는 그 이유가 알폰조의 앞에서는 자신의 비밀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뭐랄까, 조금…… 부질없네.’

라모나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습관처럼 로베르트 메닝엔의 얼굴이 떠올랐다.

로베르트에게 비밀을 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의 죄책감이 느껴지는 당연한 일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죄책감이 두려움으로 서서히 변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모래 위에 쌓은 성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이제 그 날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쥐었다.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던 때였다.

“내 사랑? 나의 천사?”

그래, 저런 헛소리나 매일 들으면서.

‘응? 잠깐만.’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로베르트?”

저 남자가 왜 여기에? 라모나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로베르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매력적인 미소는 덤이었다.

‘설마 이거 또 꿈인가.’

1주일 동안 머리카락 한 올 보기도 힘들었던 로베르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라모나는 자신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그러나.

“윽.”

놀랍게도 꿈은 아니었다.

그제야 라모나는 깨달았다.

‘설마 지금 그거야?’

1주일간 얼굴 한 번 안 보여 주다가, 2황자가 나를 찾아왔다고 하니까 잽싸게 방해하러 온 거야?

‘기가 막혀서 정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 정도로 쉽게 물러설 로베르트가 아니었다.

“내 사랑? 무슨 문제라도?”

그가 알폰조 보란 듯이 라모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를 꽉 깨문 라모나가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로베르트?”

“그거야 당연히 당신이 보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애매하게 라모나의 눈을 피한 로베르트는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섭섭한 질문입니다.”

그의 목덜미가 은근하게 붉어졌지만,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 * *

불청객의 등장에 알폰조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모나는 어차피 그의 용건은 다 끝났을 것이라 짐작했다.

‘자꾸 나를 흔들려고 하네.’

의도가 뻔했다.

굳이 둘만 아는 이야기로 유대감을 형성하려 하고, 라모나의 성취에 대해 인정하는 뉘앙스를 잔뜩 풍기는 이유가 뭐겠는가.

‘나와 손을 잡으면 요하네스를 쳐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지.

지난번 레이먼이 흘리고 간 각성제 이야기를 떠올린 라모나가 생각에 잠겼다.

힐끔, 그런 그녀를 살핀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합니까.”

“별거 아니에요.”

“오, 더 궁금해지는군요.”

로베르트가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1주일간 그녀를 피해 다닌 주제에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그가 괘씸해진 라모나가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는 말했다.

“2황자 전하 생각이요.”

“…….”

로베르트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뭐야,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웃음을 삼킨 라모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이 티가 났나 봐요, 죄송해요.”

“……라모나.”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로베르트는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합니다만.”

습관처럼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2황자 알폰조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오해는 하지 마시고, 그가 수상한 의도를 가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라모나는 로베르트에게 그렇게 생각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영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예?”

“1주일간 얼굴도 안 보여 주고?”

아차.

말하고도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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