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다음 날 이른 아침, 마담 루가 라모나의 드레스를 가봉하기 위해 메닝엔 공작저를 찾았다.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핀 마담 루는 로지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그녀는 은근슬쩍 공작저의 하녀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레이디 클라이스트도 계신가요?”
“아니요. 아가씨께서만 계십니다.”
라모나를 당연하게 아가씨라 칭하는 공작저 하녀의 말에 마담 루의 눈이 커졌다.
이거 진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메닝엔 공작 부인이 되나 본데?
그렇다면 이건 보통 큰 손님이 아니다.
마담 루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활짝 웃으며 라모나에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어요, 레이디? 오늘은 가봉만 하는 거라 금방 끝날 거예요. 호호호.”
그러나 로지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라모나의 기분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심상치 않은 시간이 되겠구나! 직감한 마담 루가 조수에게 고갯짓을 했다.
‘최대한 빠르게.’
‘넵.’
고개를 끄덕인 조수는 얼른 드레스를 펼쳐 놓기 시작했다.
마담 루와 조수가 번개와도 같은 빠르기로 드레스를 입혀 주는 사이, 라모나는 생각에 잠겼다.
드레스 때문은 아니었다.
‘왜 또 말이 없어진 거야?’
재앙의 주둥이, 메닝엔의 공주님. 로베르트 메닝엔 때문이었다.
입을 다물어라 다물어라 노래를 부를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더니, 오늘 아침 로베르트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묘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던 그는 급기야 아침 식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삐걱거리듯 고장 나 있었다.
뭐지, 수상한데. 이상함을 포착한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레이디 클라이스트가 공작저에 오지 않았다.
‘분명 가봉 때도 와서 속을 긁을 거라 예상했는데……. 잠깐만, 설마?’
급하게 나간 로베르트와 나타나지 않은 로지나. 순식간에 라모나의 머릿속에 소설 한 편이 완성되었다.
에이 설마,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라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로베르트의 팔을 잡은 채 라모나를 향해 웃던 로지나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정신인가.”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마담 루의 조수가 저도 모르게 펜을 떨어뜨렸다.
툭.
기겁한 마담 루가 조수를 향해 소리 없이 외쳤다.
‘미쳤어?’
‘헉, 죄송해요!’
위기에 봉착한 마담 루는 황급히 영업용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어머나! 레이디. 너무나 아름다우세요! 세상에! 이렇게 우아하게 이 디자인을 소화하실 수 있는 분은 제국에 레이디밖에 없을 거예요.”
실크 장갑을 낀 마담 루의 손이 라모나의 등을 스치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라모나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마담 루가 긴장한 나머지 꿀꺽,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드레스는 어떠신가요? 아무래도 원단으로 볼 때랑 가봉된 상태는 차이가 있죠. 호호호.”
“괜찮아, 마음에 들어.”
라모나의 대답에 마담 루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혹시나 싶었던 마담 루는 드레스의 라인을 잡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레이디께서 노출이 너무 부담스러우시면 레이스를 덧댈 수도 있어요. 마침 노라이어에서 귀한 레이스가 들어왔거든요.”
“그래?”
“예, 그런데……. 웬만하면 이대로 가시는 걸 추천드려요. 등에서 허리로 떨어지는 라인이 워낙 예쁘셔서요. 이런 건 감추지 말고 과감하게 드러내야 하거든요.”
라모나의 곁을 지키던 티아가 마담 루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도한 마담 루가 라모나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저야 부자재를 추가하신다고 하면 솔직히 이득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예쁜 걸 가리기는 아까워서요.”
마담 루가 살며시 라모나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흠, 라모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지난 생이고 지금이고 시도해 본 적 없는 디자인이기는 했다.
데뷔탕트 치고는 너무 도발적이기도 했고.
‘그래도 예쁘기는 하네.’
어쩌지.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번 로지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춤을 추다 맨살이 손가락에 닿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이 무슨 상상을 할 수 있는지, 아세요?>
이런 말에 신경 쓰다니 최악이었다. 하지만…….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말과는 별개로 지금 딱 좋기는 해.’
로지나를 신경 쓰느라 맘에 드는 걸 굳이 바꾼다면 그건 더 우스운 일 아니겠는가.
어차피 사교계의 악녀가 되었는데 굳이 평판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라모나의 가봉을 돕던 티아도 한마디를 보탰다.
“제 눈에도 지금 너무 완벽하기는 해요. 완전 아가씨를 위한 드레스인걸요!”
“……그야 맞춤이니 당연하지.”
“아니요, 디자인이나 이 모든 게요. 역시 우리 아가씨는 제국의 보물! 미의…….”
“그만! 그만해 티아.”
로베르트에게 말버릇이 옮은 티아를 보며 라모나가 질색했다.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 둘러본 라모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레이스는…… 됐어. 이대로 할게.”
뭐 어때. 그냥 내 마음에 드는 드레스인데. 라모나는 그렇게 찝찝한 마음을 애써 덮었다.
절대로 로지나의 이야기를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절대.
* * *
슈타이덴 백작저.
창밖을 바라보던 알폰조는 황급히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알폰조? 알폰조!”
이상한 낌새에 레이디 슈타이덴이 그를 다급히 붙잡으려 했지만, 알폰조의 발걸음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알폰조는 짧은 인사와 함께 백작저를 나섰다.
문밖을 나선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긴 시간 동안 전장에서 단련된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는 얼마 전, 레헨트에서 마주쳤던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데미안 스펜서로군.’
스펜서 백작가의 사생아인 데미안은 요하네스의 오른팔로 유명했다.
그가 레헨트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알폰조는 당황했지만 이내 납득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를 미행하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데미안이 알폰조를 미행할 줄이야.
그건 결국 요하네스가 알폰조를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쯧.”
알폰조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황실 무도회의 일 때문에 벌이는 흔한 견제면 좋으련만.’
거기까지 생각한 알폰조가 입술을 깨물었다.
알폰조는 굳은 얼굴로 슈타이덴 백작저의 주변에 숨어 있던 미행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뒤늦게 그의 목적을 눈치챈 데미안의 수하들이 잽싸게 몸을 감추려 했지만, 알폰조는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추적했다.
‘뒷골목으로 숨지 않는 걸 보니 그쪽에 안전 가옥이 있는 모양이군.’
그들의 본거지를 짐작한 알폰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차피 다는 잡지 못해. 이쯤에서 한 놈만 잡는 게 좋겠어.’
그가 데미안의 수하들 중 가장 어리숙해 보이는 놈을 향해 방향을 전환하던 때였다.
퍽.
갑자기 웬 상인이 골목에서 튀어나오며 알폰조와 부딪혔다.
단단한 알폰조의 몸에 밀린 상인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흐억.”
바닥에 세게 부딪힌 상인이 허리를 붙들고 신음했다. 이내 분노한 상인이 알폰조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거,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
뒤늦게 알폰조를 알아본 상인의 눈이 커졌다.
마음이 조급해진 알폰조는 그를 거칠게 밀쳐 냈다.
“비켜.”
“히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2황자 전하.”
화들짝 놀란 상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사이, 데미안의 수하들은 알폰조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를 악문 알폰조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죄,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상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알폰조는 싸늘한 목소리로 상인에게 말했다.
“비키라 했을 텐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히익, 그, 그게 아니라.”
알폰조는 뒤늦게 그를 쫓아온 슈타이덴 백작저의 호위들을 향해 눈짓했다.
수상한 상인을 잡아 두라는 뜻이었다.
이내 알폰조는 그가 쫓던 데미안의 수하가 사라진 골목 사이로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미 미행들은 모두 꼬리를 숨긴 후였다.
“후우.”
이렇게 놓칠 줄이야.
‘……앞으로 더 번거로워지겠군.’
알폰조가 짜증스레 고개를 뒤로 젖히던 그때였다.
“으읍! 으으으읍!”
어린 소년의 비명이 골목 깊숙한 곳에서 들려왔다.
‘뭐지.’
심상찮은 예감에 알폰조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내 누군가를 떠올린 그의 눈이 커졌다. 그가 황급히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알폰조?”
익숙한 목소리가 알폰조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선 알폰조의 눈에 순간 살기가 감돌았다. 이를 악문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누구냐.”
주변을 싸늘하게 만드는 살벌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알폰조를 불러 세운 상대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수도에 왔다고는 들었다만……. 네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눈부신 금발과 하늘을 옮겨 담은 듯한 푸른 눈. 제국의 천사, 요하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