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다음 날, 얼마 전 새로 문을 연 티 하우스.
멍하니 생각에 빠진 라모나를 향해 멜리사가 말을 걸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요?”
“예, 예?”
라모나가 황급히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피식 웃은 멜리사가 각설탕을 하나 꺼내 차에 넣으며 말했다.
“자꾸 혼자 웃기에.”
레이디 오셀튼, 도리스가 좋은 일이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어머어머어머.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혹시 그 일일까요?”
그 일은 또 뭐야.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무, 무슨 말이에요?”
“공작 각하께서 이번 사교 시즌을 위해 새 마차를 준비하셨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놀란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에요, 그런 이야기는 하신 적이 없는데.”
“세상에. 그럼 서프라이즈인가 봐요. 로맨틱하시기도 해라! 역시 공작 각하는 제국에 몇 안 되는 진정한 사랑꾼이시라니까요.”
도리스의 호들갑에 멜리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말이 많은 남자 아닌가.”
아, 그냥 집에 가고 싶다. 라모나는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세 사람이 오늘 만나게 된 것은 다 사교 시즌의 일 때문이었다.
별 교류도 없다가 갑자기 셋이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겠냐는 도리스의 말에 약속을 잡아 함께 티 하우스에 왔건만…….
‘이렇게까지 안 맞을 줄이야.’
이래서야 혼자 다니는 것만 못 하겠는데. 라모나가 한숨을 삼키던 때였다.
“라모나?”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미카엘라였다.
“미카엘라?”
라모나가 사태를 파악하던 그 때, 도리스가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
미카엘라가 나타날 줄 알고 일부러 오늘 약속을 잡은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린 라모나는 태연하게 미카엘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미카엘라.”
그러고는 왼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로베르트와 함께 사러 갔던 사파이어 반지가 라모나의 손에서 반짝거렸다.
도리스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어머! 세상에, 눈부셔라. 라모나! 이게 설마설마 바로 그 소문의 반지인가요?”
도리스가 친근하게 라모나의 이름을 부르자 미카엘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라모나는 부끄럽다는 듯 도리스에게 손사래를 쳤다.
“맞아요, 도리스.”
라모나의 대답에 미카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멍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리스라고?”
그새를 놓치지 않은 멜리사가 비꼬듯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레이디 벤트하임?”
“예?”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한 미카엘라가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아니 꼭.”
피식. 멜리사의 입가에 특유의 비웃음이 걸렸다.
“꼭 도리스와 라모나가 격이 안 맞는 친구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어머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건 제 친구에 대한 모욕인지라.”
“비약이에요, 레이디 바텐베르크.”
미카엘라가 얼른 표정을 간수했다. 그때 도리스가 깜짝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흡. 어떻게 그런…… 그런 말을…….”
말이 길어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쏠렸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미카엘라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오해에요. 그냥 반가워서 그런 거죠.”
순해 보이게 눈을 내려뜨린 그녀가 얼른 자리를 떴다.
“그럼 저는 약속이 있어서 이만. 다음에 또 보자 라모나.”
“그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미카엘라를 퇴치한 라모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했다.
미카엘라가 자리를 뜨고, 티 하우스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와우.’
라모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런 방법으로도 미카엘라를 해치울 수 있다니.
이러면 안 맞는다는 말은 취소였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제법 괜찮은 사교계 동료를 만난 모양이었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멜리사가 설탕을 휘휘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멍청해서 그대로 갚아 줘도 모른다니까.”
도리스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먹을 꽉 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설탕을 듬뿍 넣은 차를 한 모금 홀짝인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어때요, 라모나?”
“예?”
“이 정도면 제법 쓸 만한 모임이죠?”
직설적인 멜리사의 질문에 라모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좋아요, 그럼 이제 이야기를 더 해 보죠. 다들 이번 사교 시즌 목표가 어떻게 되죠?”
이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모양이었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저는 방금 같은 상황이 자주 연출되면 좋겠네요.”
도리스도 얼른 입을 열었다.
“저는 사교 시즌을 무사히 잘 보내고 약혼하는 게 목표에요. 적어도 자작가 이상 되는 가문의 영식이랑요. 아! 키는 좀 컸으면 좋겠어요. 마른 것보다는 덩치 있는 편이 더 좋…….”
“저는 따로 원하는 게 있어요.”
도리스의 말이 길어지자 멜리사가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
“히잉.”
도리스가 속상한 듯 칭얼거렸지만 멜리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멜리사가 원하는 것을 짐작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무거운 입을 열었다.
“멜리사.”
“예?”
“혹시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는 건가요?”
“오.”
멜리사는 비릿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녀가 비단 같은 금발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가 원하는 게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면 미카엘라를 피해 멜리사의 손을 잡은 이유가 없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지.’
멜리사는 미카엘라보다 더 냉정하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고민하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요하네스 전하와 약혼하기 위해 제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글쎄요. 제가 아무리 메닝엔 공작 각하의 약혼녀라 한들 그만한 도움은 되지 못할 텐데요.”
명백한 거절의 표시였다. 그러나 멜리사는 개의치 않고 눈을 깜빡였다.
“알아요.”
“예?”
당황한 라모나가 되물었지만 멜리사는 태연하고도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아무튼 잘해 보자고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로베르트의 집무실.
피식.
자꾸 웃음을 흘리는 로베르트의 모습에 에드윈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츠 백작의 일, 격리를 가장한 레헨트의 빈민가 감시, 2황자 알폰조 미행까지.
웃을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시기에 저 행복해 보이는 광대는 뭐란 말인가.
‘뻔하지 뭐.’
그 사유를 짐작한 에드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만 불행하지 남들은 다 행복하고. 후우, 한숨을 내쉰 그가 중얼거렸다.
“일이나 하자…….”
그러나 로베르트가 그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에드윈.”
또 왜애애요. 에드윈은 투정 섞인 대답을 꿀꺽 삼키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예, 각하.”
다행히도 로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제법 멀쩡했다.
“레헨트는 조용한가?”
“아아, 예. 어제까지는 별일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각성제의 부작용이 꽤나 심한 모양입니다.”
“어떻기에.”
“자꾸 팔다리에 벌레가 기어 다닌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더군요.”
“환각이 보이는 모양이군. 수상한 사람은 없고?”
“예, 수상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사교 시즌을 코앞에 두고 휴양을 왔다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이 시기에? 누구지?”
“레이디 애커만입니다.”
에드윈의 대답에 상황을 파악한 로베르트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쯧, 미카엘라 벤트하임이군. 잘 감시해 둬.”
“옙.”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라모나에게 보고하도록.”
로베르트의 지시에 에드윈의 눈이 커졌다.
“예, 예?”
“문제 있나?”
그가 날카롭게 되묻자 에드윈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주제넘은 질문입니다만……. 레이디를 그만큼이나 신뢰하십니까.”
그의 질문에 로베르트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피식, 서늘한 웃음을 흘린 로베르트가 말했다.
“에드윈.”
“예.”
“그건 네가 확인할 사안이 아니지.”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내 판단이 우스운가? 아니면 네가 내 상관이라도 되는 건가?”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에드윈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정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벤트하임의 시녀를 그렇게까지 신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무엇을 약속했든 간에…….’
신뢰는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지금까지야 다 맞아떨어지긴 했다만, 뭐 별일 없었으면 좋겠군.’
에드윈은 한숨을 삼켰다.
로베르트는 에드윈을 더 책망하지 않았다. 다만 분위기가 날카로워진 탓에 에드윈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심란한 기분으로 일하기를 한참,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레이디가 각하께 푹 빠졌으면 다행일 것을…….”
“뭐?”
“헉,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로베르트는 못마땅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지.”
자존심이 상한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진짜 연애가 뜻대로 안 풀리시나 보네. 로지나 얘는 잘 하고 있는 거 맞아?’
동생을 믿지 못한 에드윈이 고개를 갸웃하던 때였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날 좋아하게 만드는 건 솔직히 일도 아니지 않…… 맙소사.”
또 다시 제 자랑을 늘어놓던 로베르트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게 가능하다고?”
그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에드윈은 ‘우리 각하, 또 시작이시구나.’ 하고는 흐린 눈으로 마저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