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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85화 (86/151)

#85화

* * *

다시 서부 경계로 떠나는 레이먼을 배웅하고 난 후, 두 사람은 정원을 걸었다.

레이먼의 앞에서 내내 과시하듯 라모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로베르트는 레이먼이 사라지고 나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

‘어색해.’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레이먼이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둘만 남으니 온 신경이 맞닿은 로베르트에게 쏠렸다.

군살 없이 단단한 팔뚝이며, 등 뒤에 닿는 굴곡이 오늘따라 아찔하다.

자꾸만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에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해. 나 진짜 변태가 되어 가나 봐.’

아직 해가 쨍쨍했다.

이 남자의 몸을 상상할 시간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물론 해가 없다고 해서 상상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아무튼 곤란하다 곤란해. 눈을 질끈 감은 라모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의 이상 행동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 무슨 일 있습니까?”

“음,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요.”

“눈물이요?”

“어, 음, 그러니까……. 레이먼을 보내고 나니 슬프네요.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라모나는 메마른 눈가를 소매로 찍었다.

로베르트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라모나.”

“예?”

“제가 떠나도 울어 줄 겁니까?”

순간 라모나는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또다시 지난 생의 그가 1년 후에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녀가 아무 대답도 못하자 오해한 로베르트가 입술을 삐죽였다.

“됐습니다.”

“아니, 왜 삐지고 그러세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요?”

라모나의 되물음에 로베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해 질 녘 노을이 그의 뒤로 펼쳐졌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검은 눈을 마주한 순간 라모나는 또다시 말을 잃고 말았다.

‘왜 저렇게 잘생…… 아니야, 아니야. 정신 차리자 라모나.’

찹찹! 가볍게 자신의 뺨을 두드린 그녀가 애써 태연하게 되물었다.

“……뭐가요?”

로베르트는 가련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젠장, 인정하기는 싫지만 라모나의 취향은 처연한 미남인 듯했다.

잔뜩 아래로 내린 검은 눈을 마주친 순간 갑자기 심장이 주책맞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게 저와 한집에 지내면서도 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제가 당신이었다면 펑펑 울다 못해 눈물이 강을 이룰 거라고 말했을 텐데.”

이어지는 로베르트의 말에 다행히도 라모나의 심장은 빠르게 제 속도를 되찾았다.

라모나는 흐린 눈으로 오랜만에 진가를 발휘한 주둥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싸늘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로베르트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억울할 지경입니다.”

네가 억울할 게 뭔데? 헛웃음을 친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요즘 조용하다 싶었다.”

“나의 천사?”

“어머! 죄송해요. 생각만 한다는 게.”

이제 성의조차 없는 그녀의 해명에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고의 같은데.”

“그럴 리가요! 각하. 정말 진지하게 묻는 건데요. 혹시 그 때 그 가루 드신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리고 각하가 아니라 로베르트.”

“하아, 그래요 로베르트. 하여간 고집만 세 가지고.”

그녀가 슬그머니 그의 팔을 밀어내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거죠?”

그의 팔을 밀어내는 라모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베르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

“거짓말하지 마세요.”

“진짠데.”

“그럼 그냥 말을 하지 마세요.”

“오, 짜…….”

“짜릿하다는 말도 하지 마시고요.”

그녀의 반응에 로베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다시 라모나의 곁으로 슬그머니 붙어 선 그가 입을 열었다.

“할머님과 할아버님이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화가 좀 누그러지셨을라나요.”

라모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로베르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별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에게는.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튼 저도 몇 가지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네? 뭐를요?”

“당신이 다른 남자와 춤추지 않을 방법 말입니다.”

설마 그가 진지하게 그 일을 고민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로베르트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황실 무도회만 참여하고 제가 수도를 잠시 비울까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닙니다. 마침 확인할 것도 좀 있는 탓에요. 어디를 좀 다녀올 예정입니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로베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라모나는 그의 얼굴에서 지난 생에 일어난 산사태를 떠올렸다. 갑자기 심장이 불길하게 뛰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 일이 일어나려면 아직 한참 멀었잖아.’

별일 아닐 거야. 그녀가 겨우 스스로를 다독이던 때였다.

피식.

로베르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각하?”

“오, 이런. 당신이 이렇게 능숙한 거짓말쟁이였을 줄이야.”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라모나가 습관처럼 미간을 찡그리자 로베르트가 다시 라모나의 어깨를 슬그머니 감싸 안았다.

“안 울 거라더니. 벌써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말입니다.”

톡.

장난스러운 그의 손가락이 라모나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대체 오늘 이 남자가 왜 이렇게 요망하게 구는 걸까. 귀가 벌겋게 달아오른 라모나가 화들짝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건 레, 레이먼 때문이라고 말했는데요.”

로베르트는 장난스럽게 눈썹을 까딱했다.

“제 앞에서 자꾸 다른 남자 이야기하면 서운합니다.”

그의 눈이 야살스레 휘어졌다. 사람하나 홀리기 딱 좋은 미소였다.

‘오, 안 돼.’

휘말리지 말자, 진짜 이 남자에게 휘말리지 말자.

열심히 다짐한 라모나는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서부 경계에 각성제가 도는 것 같다더라고요.”

각성제라는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심각해진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말했다.

“서부 경계라면…….”

뒷말을 짐작한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물으려 했다.

“라모나, 그렇다면 혹시…….”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그는 곤란한 얼굴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일까. 별것 아닌 그 모습이 라모나의 가슴을 쿵, 하고 떨어지게 만들었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로베르트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그 뺨이었다.

* * *

슈타이덴 백작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레이디 슈타이덴이 알폰조를 향해 툭 하니 말을 걸었다.

“알폰조.”

“예?”

“이번 황실 무도회에서는 폐하께서 널 두 번째로 소개하실 거야.”

“…….”

“그렇게 싫은 표정 지어도 할 수 없어. 나라고 좋아서 그 이야기를 듣고 온 줄 아니?”

한숨을 삼킨 레이디 슈타이덴이 알폰조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골치가 아파진 그녀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붉게 칠한 손톱이 오늘따라 날카로웠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네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신 모양이더구나.”

“그런…….”

알폰조는 당황스러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그가 중얼거렸다.

“없던 일입니다.”

“뭐?”

“……예상에 없던 일이라는 말입니다.”

“나라고 예상에 있었겠니. 하아.”

긴 한숨을 내쉰 레이디 슈타이덴이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황후가 또 한동안 피곤하게 굴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프구나.”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알폰조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응?”

“그 목걸이가 메닝엔 공작 부인과 맞췄다는 목걸이입니까?”

“……마리안느를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않으면 더 좋겠구나.”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죄송할 필요까지는 없고. 하아, 그래 맞아.”

목걸이를 바라보는 레이디 슈타이덴의 눈이 추억에 잠겼다.

“무슨 축제에 갔다가 산 싸구려 로켓이지. 똑같은 걸 하나씩 사서 나눴어. 마리안느가 그렇게 가지만 않았어도 진작 내다 버렸을 텐데 별수 있니.”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라도 마리안느를 기억해 줘야지. 그 아이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텐데.”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알폰조의 얼굴에 쉬이 읽을 수 없는 빛이 떠올랐다.

“……폐하를 뵈러 갈 때도 그 목걸이를 하고 가셨습니까?”

“어머나, 내 아들이 드디어 어미에게 보석 하나 장만해 줄 생각인가 보구나.”

과장스레 화제를 돌린 레이디 슈타이덴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나 알폰조는 화제 전환을 위한 그녀의 노력에 응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

“…….”

“황태자 쪽이 심상치 않습니다. 한동안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레이디 슈타이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야말로 당분간 몸을 좀 사리렴. 아예 서부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거다.”

“……아직 수도에 볼일이 남았습니다.”

“흐음?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장난스러운 레이디 슈타이덴의 물음에 알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물끄러미 창밖을 보던 알폰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택 근처를 얼쩡거리는 누군가를 발견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짓이기듯 중얼거렸다.

“……왔군.”

알폰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물 잔을 들던 레이디 슈타이덴이 되물었다.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알폰조가 말했다.

“약속이 있어서, 잠시 외출 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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