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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84화 (85/151)

#84화

여름이 다가옴과 동시에 사교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레오벤 제국의 사교 시즌은 황실 무도회로 그 시작을 열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황실 무도회는 단순히 먹고 마시며 즐기는 행사가 아니었다.

성년이 된 레이디들이 사교계에 자신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공식적인 자리이자, 치열한 권력 다툼의 장이었다.

특히나 현 황제 필리우스는 매년 자식들의 순서를 다르게 소개하곤 했는데,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으로 그가 아직도 후계자 자리를 놓고 저울질 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황제의 정부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매년 사교 시즌이 다가올 때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엘츠 백작저, 오랜만에 시가 모임에 참여한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참,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에요.”

“하여간 요즘 사람들은 일의 순서와 절차가 없다니까요.”

대화 주제는 역시 요즘 한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였다.

부인들은 사윗감으로 탐내던 메닝엔 공작을 고작 자작가에 뺏긴 것에 대한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요. 겁도 없이 2황자 전하와 메닝엔 공작을 양쪽에 끼고 다녔다면서요? 기가 차서, 원.”

“욕심도 많네요.”

“제가 아이젠부르크 자작 부인이라면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것 같아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물 잔을 들었다.

2황자 알폰조의 이름이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슈타이덴, 며칠 전에도 황제 폐하를 찾아갔다지?’

레이디 슈타이덴이 황제 폐하에게 관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척 턱을 치켜들고 다니지만 그녀는 알았다.

‘다 주목받기 위한 연기지.’

황제 폐하를 찾아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안 봐도 뻔했다.

분명 무도회를 앞두고 2황자 알폰조를 잘 봐달라고 얼굴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요망한 계집.’

레이디 슈타이덴을 떠올린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부인들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공작 각하도 참……. 이러시니까 자꾸 그 얘기가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어머, 무슨 이야기요?”

“사람들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아이젠부르크의 신데렐라’라고 부르더라고요.”

“세상에. 짓궂기도 해라.”

마리안느의 이야기가 나오자 부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 엘츠 백작 부인이 슬그머니 크레모라 백작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크레모라 백작 부인.”

그제야 정신을 차린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황급히 표정을 간수했다.

“예?”

“일전에는 감사했어요. 잘 소개해 주신 덕분에 남편의 사업이 큰 고비를 넘겼답니다.”

“아아. 별말씀을요.”

엘츠 백작 부인의 인사치레에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딸 바네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걱정 마세요. 다 오라버니께 힘이 되는 일이에요, 어머니.>

바네사는 엘츠 백작 부인이 곤란에 빠졌을 것이라며 부인에게 스펜서 백작가를 소개해 주라 말했다.

그게 왜 베르나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무튼 베르나딘에게 힘이 되는 일이라니 되었다.

‘엘츠 백작가를 포섭하려는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엘츠 백작 부인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사실 베르나딘의 생각이었답니다, 부인.”

그 일이 베르나딘의 생각이었다는 말에 엘츠 백작 부인의 얼굴에 당황이 스쳐 갔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노련하게 대꾸했다.

“어쩜, 3황자 전하께서는 정말 시야가 넓으시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저를 닮았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싱긋 웃은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폈다.

“다 폐하를 닮은 덕이죠.”

* * *

아이젠부르크 자작저, 자작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레이먼에게 물었다.

“짐은?”

“다 쌌어요.”

“쯧, 하필 일이 터져서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했구나.”

“에이, 제가 어린 애도 아닌데요, 뭘. 에밀리아는요?”

“내일 출발한다고 하더구나.”

“아쉽네요. 하루만 더 빨리 왔으면 얼굴이라도 보고 복귀했을 텐데.”

그러나 레이먼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뭐 이제 저도 제 조카가 생길 테니까요.”

조카라는 말에 자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내 자작이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흠흠, 그가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하고는 중얼거렸다.

“난 솔직히 라모나에게 메닝엔 공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신데렐라니 뭐니 떠드는 것은 뭘 몰라서 하는 말이지.”

“그 점은 저도 동의해요, 아버지.”

레이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모나가 어려서부터 워낙 똑똑했어야지.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라모나가 어렸을 때, 그 어린 애를 공화국 아카데미로 유학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었단다. 공화국에서는 여자들도 높은 자리에서 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요. 저는 누님처럼 멋지고 당차고 똑똑한 사람은 아직 못 봤다니까요.”

그 뒤로 라모나가 알았다면 수치사 했을 온갖 칭송이 이어졌다.

아무튼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그런데 메닝엔 공작이라니.”

“그런데 공작 각하라니.”

후우, 자작과 레이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한번 절레절레 저은 레이먼이 자작에게 물었다.

“아무튼 가는 길에 누님을 좀 뵙고 갈 건데, 아버지는 전할 말씀 없으세요?”

“라모나를?”

“예. 예전이랑 좀 달라 보여서…… 신경이 쓰이네요.”

레이먼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자작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심각해하는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그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레이먼.”

“예.”

“라모나에게 이것 좀 전해다오.”

무척이나 비장한 표정이었다.

* * *

그날 늦은 오후 메닝엔 공작저.

“뭐?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 맙소사.”

레이먼의 말에 라모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레이먼은 진지한 얼굴로 라모나에게 목걸이를 하나 전달했다.

“이게 바로 그 목걸이야, 누님.”

레이먼은 라모나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알겠지? 혹시 메닝엔 공작에게 협박당하고 있으면 이 목걸이를 흔들어.”

“그래, 그래.”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라니까. 라모나는 미소를 지은 채 레이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웃음도 잠시, 레이먼이 또다시 서부 경계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라모나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괜찮아, 이번 생은 이미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럼에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라모나의 어두워진 낯빛을 눈치챈 레이먼이 그녀를 불렀다.

“누님?”

“아, 미안 뭐 좀 생각하느라.”

“설마 진짜 메닝엔 공작이……?”

“아냐, 그런 거 아니야.”

“흠.”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레이먼이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변했어, 누님.”

“…….”

“예전이라면 나에게 그런 거 아니라고 버럭 화냈을 텐데. 이런 어른스러운 대처라니. 꼭 누님이 아닌 것 같아.”

자꾸 정곡을 찌르는 레이먼의 말에 라모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요즘 고민이 많아서 그래.”

“고민이?”

“별건 아니야.”

“말해 봐, 누님. 내가 다 들어 줄게.”

레이먼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서…….”

라모나가 어물쩍 말끝을 흐리자 레이먼이 속상한지 입술을 삐죽였다.

“공작 각하에게는 다 털어놨지?”

“응?”

여기서 갑자기 로베르트 이야기가 왜 나와? 당황한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레이먼?”

레이먼은 풀죽은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누님을 얼마나 생각하는데…… 역시 사랑 앞에 가족은 다 소용없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사실 난 메닝엔 공작 각하 별로야. 잘난 척이 너무 심하잖아. 잘난 건 맞지만.”

“그 말은 나도 공감해.”

“하지만 누님이 진짜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귀여운 조카나 기다리는 수밖에.”

조카 이야기에 라모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레, 레헨트에서 좀 위험한 물건을 발견했어.”

꿀꺽.

침을 한번 삼킨 라모나가 말을 이었다.

“일종의 각성제야. 먹으면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고, 잠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어.”

“어? 그거…….”

라모나의 설명에 레이먼의 눈이 커졌다. 이내 그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 이야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뭐?”

다급해진 라모나가 레이먼의 팔을 붙들었다.

“자세히 말해 봐.”

“아니, 별건 아니고. 그냥 훈련이 너무 힘들 때 약을 먹는 사람들이 몇 있더라고. 몸에 좋은 거라면서.”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하네스의 꿍꿍이인 줄 알았던 각성제가 서부 경계까지 퍼져 있을 줄이야.

심지어 서부 경계는 2황자 알폰조의 소관이 아닌가.

‘잠깐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폰조가 레헨트에 나타난 건 정말 라모나를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그녀에게 회귀 사실을 알려 주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설마……. 2황자가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라면…….’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려던 때였다.

“레이먼, 혹시 그 약…….”

똑똑.

“내 사랑?”

로베르트 메닝엔이 문을 두드렸다. 참 자기 욕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채는 남자였다.

“당신의 그이입니다.”

그의 달콤한 목소리에 레이먼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윽고 레이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튼 내 조카는 절대 메닝엔 공작 각하를 안 닮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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