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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83화 (84/151)

#83화

늦은 밤 로베르트의 집무실. 수하의 보고를 받은 에드윈이 급히 로베르트를 찾아왔다. 뒷골목의 일 때문이었다.

“각하.”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의 로베르트 메닝엔은 나사가 조금 나가 있었다.

그는 흡족한 듯 중얼거렸다.

“역시.”

또 뭐가 역시라는 걸까. 에드윈은 흐린 눈으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럴 줄 알았어. 하긴, 매일 내 얼굴을 보면서 다른 남자가 성에 찰 리 없지.”

로베르트의 헛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에드윈이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각하?”

“에드윈? 언제 왔지.”

아까요. 에드윈은 눈으로 대답했다.

그를 한번 훑은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자네가 나타난 건 좋은 소식은 아니겠군. 뒷골목의 일인가?”

“예, 그 소년과 접촉했습니다.”

라모나를 납치하려는 무리의 이야기에 로베르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가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말해 보도록.”

“황궁 무도회 날을 노리고 있다 하더군요. 다만 세부적인 계획이 확정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오합지졸에 가깝다 말했습니다.”

로베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함정인가.”

“그럴지도요.”

“수법이 더러운 게 딱 그 개자식의 짓이군.”

요하네스를 떠올린 로베르트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에드윈은 마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데미안 스펜서 말입니다.”

“그자가 아직도 납치 건에 관여 중인가?”

“예,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뭐가.”

“데미안 스펜서의 끄나풀들이 2황자 전하를 미행하는 듯합니다.”

“흠?”

그 둘이 손을 잡은 게 아니었나? 로베르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자세히 말해 보도록.”

“슈타이덴 백작저 근처에 데미안 스펜서의 수족들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감시하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확실히 2황자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고 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에드윈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2황자도 자신이 미행당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하다는 점입니다.”

로베르트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예감이 영 좋지 않은 탓이었다.

‘분명 뭔가를 놓치고 있군.’

로베르트는 이 일이 자신이 아직 알아내지 못한 사실과 관련 있으리라 짐작했다.

라모나와 알폰조가 공유하는 비밀.

결국 또다시 생각은 그 비밀로 치우쳤다.

“쯧.”

답답해진 그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지금이야 라모나를 믿고 기다린다지만, 이대로 그녀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

1년. 라모나가 증거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한 기한을 떠올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안에 그녀는 과연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을까.

로베르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푸른빛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이지.’

그런 짓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다.

눈에 보이는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젠장.’

역시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로베르트는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 * *

헤센 백작저.

유디트가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방에 홀로 남은 클레멘스는 연신 못마땅한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유디트는 그에게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며 메닝엔 공작저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녀가 이유를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사교 시즌의 일 때문이 분명했다.

샤프롱을 맡기로 한 것이나,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사촌 동생을 만나기로 약속한 일들 말이다.

그 점이 더 못마땅했던 클레멘스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때도 그랬다.

그의 장남, 리안드로가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때. 유디트는 그때도 마리안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지금처럼 움직였었다.

‘결국 다 부질없는 일이거늘.’

그는 첫 만남부터 자신을 할아버님이라 부르던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로베르트를 낳고 나서도 쩔쩔매며 그를 각하라 부르던 마리안느와는 영 딴판이었다.

“쯧, 되바라지기는.”

클레멘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혀를 찼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리안드로의 죽음은 마리안느의 탓이 아니다.

하지만 리안드로와 마리안느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은 도무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로베르트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레헨트를 선물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그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계약이니 뭐니 한다기에 제 아비와 다른 줄로만 알았더니.’

어쩐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향한 로베르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클레멘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못난 놈.”

믿었던 로베르트이기에 클레멘스의 충격이 더 컸다.

묻지 않아도 뻔했다. 영지 몰수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레헨트를 선물했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결국 여자에 눈이 머는 건 제 아비와 똑같군.’

행여나 또다시 비극이 반복되지는 않을까. 클레멘스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리안드로는 착각을 한 게 분명했다.

불쌍해서 눈이 간 것을 호감이라 착각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한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그건 리안드로뿐만 아니라, 로베르트라도 마찬가지였다.

‘로베르트, 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그때는 내가 나서야겠지.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앞이 뻔히 보이는 길을 가게 둘 수는 없었다.

* * *

며칠 후, 바텐베르크 후작저 앞.

‘여기를 와 보는 건 또 처음이네.’

꿀꺽.

긴장한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레이디 오셀튼, 혹은 멜리사의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시간을 질질 끌며 걱정만 늘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곧장 찾아오긴 했는데…….’

이거 잘하는 짓일까. 하마터면 습관처럼 이마를 짚을 뻔한 라모나가 조심스레 바텐베르크 후작저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후작저의 응접실에서는 레이디 오셀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꺄하하. 맞아요, 맞아요. 진짜 그 얘기 듣고 웃음 참느라 힘들었다니까요.”

멜리사는 하나도 안 웃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웃기네요.”

싸늘한 멜리사의 얼굴에 순간 레이디 오셀튼이 겁을 먹은 듯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라모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멜리사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재미없는 말을 재미있다고 해 준 것은 엄청난 호감 표현이었다.

‘저 둘이 원래 친했나?’

회귀 전을 생각해도, 회귀 후를 생각해도 아니었다. 라모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진짜 무슨 꿍꿍이기에.’

라모나는 일단 침착하게 눈인사를 건넸고, 그녀를 발견한 레이디 오셀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로베르트 못지않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한 목소리였다.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레이디 오셀튼이 쪼르르 그녀의 곁으로 달려와 살갑게 팔짱을 꼈다.

“기다렸어요. 혹시 안 오시는 걸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아아, 네.”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이러다 무도회 드레스의 팔을 다 잘라내게 생겼다니까요. 꺄하하. 그렇죠, 그렇죠?”

그녀는 웬일로 흰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노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포인트를 준 리본이며 부채는 온통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레이디 오셀튼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라모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멜리사는 그런 라모나를 향해 눈짓했다.

“앉으세요.”

당당한 멜리사의 태도를 보니 역시 레이디 오셀튼이 초대장을 보낸 것은 눈속임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라모나가 조심스레 착석하자 멜리사는 각설탕을 하나 꺼내 들어 찻잔에 넣었다.

티스푼으로 차를 저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예, 덕분에요.”

“제가 뭘 한 건 없는데.”

멜리사가 피식 웃었다.

이내 금발의 냉미녀, 멜리사가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돌려 말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말씀하세요.”

그녀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 예상한 라모나가 허리를 곧게 폈다.

그러나 멜리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라모나의 예상을 살짝 비껴가는 말이었다.

“별건 아니고 친목이나 도모해 보자고요.”

“……예?”

“설마 혼자서 미카엘라 벤트하임을 감당할 생각이에요? 사교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거 잘 알잖아요.”

멜리사의 말에 동의하듯 레이디 오셀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는 당당하게 라모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팽 당한 신세끼리 친구나 하죠, 우리.”

레이디 오셀튼도 얼른 라모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도리스라고 불러 줘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힐끔, 그런 레이디 오셀튼을 살핀 멜리사가 조용히 그녀를 나무랐다.

“도리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양손으로 악수를 할 수는 없잖아요.”

“어머! 맞아요, 그렇죠 그렇죠.”

레이디 오셀튼이 이번에는 잽싸게 손을 뒤로 뺐다.

이게 무슨 일이람.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멜리사는 피식 시니컬한 웃음을 흘렸다.

“이게 내 본론이에요. 별 대단한 의도는 없어요, 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차가운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난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마음에 안 들거든요.”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멜리사가 라모나를 향해 턱을 까딱했다.

그제야 라모나는 멜리사와 레이디 오셀튼이 왜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적의 적은 좋은 친구라 했던가.

흠, 잠시 고민하던 라모나는 흔쾌히 멜리사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멜리사.”

멜리사와 이런 관계가 될 줄이야. 이 역시도 지난 생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라면 대환영이지.’

라모나의 얼굴에 꼭 누구처럼 예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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