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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82화 (83/151)

#82화

바텐베르크 후작저.

오늘은 부드러운 레몬 크림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레이디 오셀튼이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잔뜩 긴장한 그녀는 추위를 타는 병아리처럼 오들오들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멜리사는 그런 레이디 오셀튼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달그락.

각설탕을 하나 꺼내 찻잔에 넣으며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잡아먹으려 부른 것도 아닌데.”

“……네, 네?”

긴장한 레이디 오셀튼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아. 호호호, 그렇죠. 그렇죠.”

“많이 긴장했나 봐요.”

“어…… 음…… 그게…… 조금……?”

“그 이후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연락을 주고받은 적 있어요?”

라모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레이디 오셀튼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아니요. 아무래도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 너무 걱정이에요. 레이디 바텐베르크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하필 그 날 제가 공작 각하의 이야기를…….”

레이디 오셀튼의 대답이 두서없이 길어지자 멜리사가 말을 끊었다.

“화가 난 건 아닐 것 같은데.”

“예?”

“아무튼 연락은 안 왔다는 소리죠?”

그녀의 눈치를 보던 레이디 오셀튼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무슨 꿍꿍이인 거지?’

생각에 잠긴 멜리사가 눈썹을 까딱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레헨트로 요양 갔다는 이야기에 영지 몰수 소문을 피해 도망간 줄 알았더니, 갑자기 메닝엔 공작이 그녀에게 레헨트령을 선물했다는 소식이 수도를 강타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멜리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까워라, 그런 날 벤트하임 얼굴 좀 구경해야 했는데.’

황태자비 자리 문제를 다 떠나더라도 멜리사는 미카엘라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맘에 안 들어.’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하고, 뒤돌아서는 음흉하게 일을 꾸미고. 그런 유형의 사람은 최악이었다.

‘차라리 앞에서 말을 하고 말지. 추잡스럽게 뭐하는 거야.’

아무튼 잘됐다.

미카엘라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사교계에 군림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렇게 시원하게 뒤통수를 쳐 주다니.

그것도 무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진짜 꼴좋네.’

멜리사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사실 멜리사는 요하네스의 약혼녀가 되기를 원한 적이 없었다.

그 흙탕물 싸움에 뛰어들면 요하네스의 체스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멜리사의 아버지인 바텐베르크 후작은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멜리사도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어차피 황후 폐하는 벤트하임을 버리지 못할 텐데.’

그녀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아버지라지만 헛된 욕심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긴, 헛된 욕심을 부리는 건 바텐베르크 후작만은 아니었다.

미카엘라 벤트하임. 멜리사의 눈에는 그녀가 황태자비를 노리는 것은 지나친 과욕이었다.

멜리사는 확신했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은 요하네스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절대, 절대로.

‘지금이야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있겠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미카엘라의 미래가 눈에 빤히 그려져서 멜리사는 혀를 찼다.

‘욕심 많은 게 멍청하기까지 하니까 항상 문제가 생기지.’

뭐, 덕분에 재수 없는 미카엘라의 속을 실컷 긁어 두었으니 됐다.

‘그래도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하단 말이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는 미카엘라의 뒤통수를 치기로 마음먹은 걸까.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 버리고 사랑을 택할 만큼 낭만적인 사람도 아닌데.’

애초에 그 여자, 메닝엔 공작을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나? 멜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흘러간 이상 가만히 앉아 있기는 너무 아까웠다.

‘이 기회에 미카엘라 벤트하임 코를 납작하게 눌러 둬야지.’

설탕을 넣은 차를 천천히 저으며 멜리사가 레이디 오셀튼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번 사교 시즌은 어쩔 작정이에요?”

“아…….”

사교 시즌이라는 말에 또다시 레이디 오셀튼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 게 말이에요. 사실 저희 가문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긴 했어요. 어…… 연주자도 섭외해 놓고, 물론 저희 주방장의 음식도 훌륭하고요. 음 또…….”

“그거 말고요.”

“예?”

“같이 다닐 무리는 좀 있냐는 말인데.”

레이디 오셀튼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다.

꾹 다문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에 멜리사가 미간을 찡그렸다.

“울지 마요. 우는 건 딱 질색이라.”

“……네, 안 울어요.”

“잘됐네요.”

“네?”

“마침 나도 이번 사교 시즌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레이디께서요……?”

“알잖아요. 황태자 전하께서 벤트하임의 손을 들어 준 거. 덕분에 저도 입지가 애매해졌으니까.”

의미심장한 멜리사의 말에 레이디 오셀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그락.

멜리사는 태연하게 찻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근데 둘은 좀 아쉽지 않나?”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레이디 오셀튼이 얼른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이 많기는 했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 * *

‘인생…….’

라모나는 오늘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왜 회귀 후의 삶이 이렇게 흘러가는 걸까.

‘내가 뭐 대단한 걸 욕심낸 것도 아닌데.’

허망하다. 라모나가 창밖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똑똑.

“아가씨.”

아침에 신나게 다이닝룸에서 도망간 티아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티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선 티아는 손에 웬 편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초대장이니?”

“음, 아뇨 편지라고 하는데요.”

“편지? 누구?”

“레이디 오셀튼이요.”

“아아.”

사죄의 의미려나. 라모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편지는 별 대단하지 않은 내용들로 가득했다.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느니, 상처를 준 것 같아 죄송하다느니.

구구절절 변명을 쭉 늘어놓은 편지의 끝, 마지막 문단에 쓰인 의미심장한 내용을 발견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응? 바텐베르크 후작저?”

라모나는 다시 한번 편지를 읽어 보았다.

<……그래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께서만 괜찮다면 본격적으로 사교 시즌이 시작하기 전, 티타임을 한번 가지면 어떨까 해요. 바텐베르크 후작저에서요.>

레이디 오셀튼이 라모나를 바텐베르크 후작저로 초대하다니.

어이가 없었던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딱 봐도 레이디 바텐베르크 작품이네.”

하여간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

* * *

수도의 뒷골목, 힐끔 주변을 살핀 벤이 조심스레 나무문을 열었다.

끼이익.

오래된 경첩에서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났다. 미간을 찡그린 벤이 얼른 문 안으로 들어섰다.

쾅.

낡은 문은 닫힐 때도 요란한 소리를 냈다. 벤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 이렇게 허술해.”

허술한 것은 안전 가옥만이 아니었다.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를 납치하겠다는 포부치고는 계획도 너무 허술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으, 으으.”

무리들이 아직도 각성제를 공급받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턱이 툭 튀어나온 남자는 이제 화낼 힘도 없는지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괜찮아요?”

벤이 물었지만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으으.”

신음을 흘린 남자가 팔을 벅벅 긁었다. 자꾸 벌레가 보인다고 하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벤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등을 한번 두드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래가지고 납치는 무슨.’

날짜야 정하기는 했다만 하나같이 다 엉망이었다.

이 정도면 굳이 벤이 몰래 스파이 짓을 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그냥 돌아갈까…….’

아, 가끔 그들을 찾아오는 그 남자는 조금 수상하긴 했다.

차림새를 봐서는 누가 봐도 귀족이 분명한데 눈빛만 봐서는 살인마가 따로 없는 남자였다.

‘이름도 안 알려 주고……. 확실히 중요한 사람이기는 한 것 같지.’

벤이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툭.

둔탁한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벤이 창문을 돌아보았다.

“뭐, 뭐야.”

소리의 정체는 돌멩이였다. 벤이 고개를 갸웃하며 창문을 바라보자.

툭.

다시 돌멩이가 하나 날아왔다.

잔뜩 긴장한 벤이 창문 앞으로 다가가자, 창문 틈으로 스윽 하고 쪽지가 하나 들어왔다.

<오늘 밤 9시, 지벤브로이에서.>

지벤브로이라면 요 앞 맥줏집 이름이었다.

‘누구지?’

심상치 않은 예감에 벤이 조심스레 창문을 열어 봤으나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쾅쾅.

무리 중 한 명이 요란하게 벤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이! 벤! 그분이 오셨다. 나와.”

“어어, 나가요.”

수상한 그 남자의 등장이었다.

벤은 얼른 종이를 구겨 침대 시트 밑으로 쑤셔 넣고는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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