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잘 준비를 마친 라모나는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잠이 잘 안 올 것 같다고 말하자, 티아가 꿀을 넣은 카밀레 차를 한 잔 타 주었다.
따뜻한 차에서 풍기는 은은한 꽃향기를 느끼며 라모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2황자 전하는 나와 같은 회귀자야.’
그는 그것이 꿈이라고 말했지만, 현실처럼 생생했다고 했다. 마치 죽었다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라모나도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회귀 전의 라모나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인 그녀가 요하네스의 정부였다니. 거짓으로 지어내기도 어려운 이야기다.
“하아.”
라모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폰조가 회귀했다는 사실에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문제는 그 시점이었다.
‘나와 같은 시점에 회귀했다기에는 꿈을 꿨다는 시기가 조금 늦어.’
게다가 라모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라모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목숨을 잃은 시기가 달라서 그런 걸까.’
라모나가 사형당하던 그때, 분명 레이디 슈타이덴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알폰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알폰조는 지난 생 레이디 슈타이덴이 의문의 죽임을 당했으며, 자신 또한 살해당했다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라모나보다 더 늦게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그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지.’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라진 현재. 그리고 또 한 명의 회귀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2황자와는 연락을 이어 나가는 수밖에 없겠네.’
이렇게 되면 정말 로베르트가 아닌 알폰조를 택하는 게 더 효율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푸른빛의 일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녀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졌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라모나는 문득 로베르트를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자존감 넘치는 남자의 뻔뻔한 발언에 기함하고, 지지 않고 한 마디를 톡 쏴 주고.
그러고 나서 말문이 막힌 그가 머쓱하게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면…….
‘그럼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모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뭐야. 이러면 내가 변태가 된 것 같잖아.”
이런 것도 옮는 걸까, 싶었다.
그러나 결국 라모나는 로베르트를 찾아가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이 숨겨 둔 이야기들은 전부 그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그를 속일 수 있을까.’
다 식은 찻잔을 손에 쥔 채, 라모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
잊고 있던 한 가지 문제점이 떠오른 탓이었다.
“……큰일 났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 * *
다음 날 아침.
달그락.
다이닝 룸에는 식기 움직이는 소리만이 흘렀다.
로베르트는 입을 꾹 다문 채 얌전히 시선을 접시에 고정하고 있었고, 라모나는 심각해하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에 사용인들은 힐끗 서로 눈치를 살폈다.
‘우리 각하 맞으시지?’
‘아마도?’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시지? 어디 아프신가?’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해.’
트레이에 식사를 싣고 간 하녀들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며 대화했다.
티아는 한숨을 삼켰다.
‘아가씨께 큰일이 있으신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레헨트에서는 분명 분위기가 좋았다. 아니 불과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두 분은 평소와 같이 사랑싸움을 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서먹해질 줄이야.
‘정말 연인 관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티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때였다.
“티아.”
라모나가 티아를 불렀다.
“예! 아가씨.”
“이리 와서 앉아 봐. 네가 해 줄 일이 있어.”
어라? 이거 좀 익숙한데. 고개를 갸웃한 티아가 자리에 앉았다.
“내 얘기를 잘 들어 봐.”
“음, 네.”
“곧 사교 시즌이란 말이지.”
“그렇죠?”
“그 말인즉슨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뜻이고.”
“맞죠?”
“그 건에 대해 로베르트 메닝엔 공작 각하의 의중이 궁금하구나.”
아가씨, 설마 또 그건가요. 티아는 한숨을 삼켰다.
‘새로 맞춘 드레스가 맘에 안 든다는 뜻인가? 아니면 드레스에 어울리는 장신구가 없다는 뜻? 아니면, 아!’
그거구나! 무언가를 깨달은 티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야 사랑의 비둘기. 뿌듯한 마음으로 라모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한 티아가 로베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각하.”
“무슨 일이지.”
“사교 시즌 관련해서 저희 아가씨가 고민이 있으신 듯합니다.”
“말해 보도록.”
“아무래도 레이디 클라이스트가 아가씨를 돕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티아의 말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가 티아를 향해 입술을 뻥긋했다.
‘아냐, 그거 아냐!’
‘아니에요?’
그럼 뭐지? 당황한 티아가 머리를 빠르게 굴리는 사이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내 생각이 짧았군.”
묘하게 입술을 씰룩거린 그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내 사랑이 이렇게 질투 많은 사람일 줄이야.”
그가 자존감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앞으로 그 부분은 신경 쓰겠다 말씀드리도록.”
“어…… 음…… 네.”
머리에 과부하가 온 티아가 라모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 아가씨. 공작 각하께서 앞으로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하셨는데요.”
“어머,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머리카락이 보이든 말든 나는 상관이 없는데 말이지. 그건 알아서 하시라고 하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사랑의 비둘기가 아니라 오해의 비둘기가 되어 버린 티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티아가 라모나의 말을 전달하기도 전에 로베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려 깊지 못한 내 행동에 죄송하다 전해 드리도록.”
“음, 아가씨 공작 각하께서…….”
라모나도 질세라 입을 열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내가 꼭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지 여부였는데, 오해가 있었나 보네.”
“저…… 각하 저희 아가씨께서…….”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디자이너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새로운 디자이너를 섭외하겠다고 전달드리도록.”
“아가…….”
“그게 곤란하시다면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지 여쭤봐 주겠니.”
“그건 절대 안 된다고 전달 드리도록.”
아니, 그냥 두 분이서 이야기하시면 안 될까요. 티아는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이젠부르크에서의 평화롭던 일상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하지만 맡은 일은 해야지’
체념한 티아가 라모나에게 다시 로베르트의 말을 전했다.
“아가씨, 무도회에는 꼭 참석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하아.”
라모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티아도 라모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문제가 아니라면 갑자기 왜 드레스가 싫다고 하시는 걸까.
게다가 무도회에 참여하지 않으시겠다니. 그럼 데뷔탕트의 의미가 뭐란 말인가.
‘많이 심란하신가. 그래도 무도회에는 참석하셔야 할 텐데…….’
티아가 걱정스레 라모나를 바라보던 때였다.
이마를 짚은 라모나가 티아의 이름을 불렀다.
“티아.”
“예?”
“잠시 나가 있어.”
드디어 자유를 얻은 티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의 곁을 지켰겠지만, 이런 사랑싸움에 끼는 거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넵.”
티아는 잽싸게 다이닝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티아는 자유의 몸이에요!’라고 속으로 부르짖으면서.
* * *
티아가 자리를 뜨고, 심상찮은 분위기에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예.”
로베르트의 질문에 라모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지난 생, 그녀는 요하네스의 집착에 시달리며 이성과 맨살이 닿는 것을 끔찍하게 혐오하게 됐다.
그 여파는 이번 생에도 지속됐다.
하지만 무도회란 어떤 자리인가. 한쪽 손을 잡고, 등에는 반대쪽 손을 올리고 하하 호호 웃으며 춤추는 곳이 아닌가.
‘절대 못 견뎌.’
도대체 왜 이 사실을 잊고 그런 드레스를 맞춘 걸까.
‘하아, 레이디 클라이스트에게 대체 왜 휘말린 거야.’
라모나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라모나?”
어두운 그녀의 안색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그러고도 아차 싶었는지 그가 양손을 들어 올리고 덧붙였다.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건 참 감사한 말씀이네요.”
그럼 이제 이 남자에게 뭐라 설명하는 게 좋을까. 고민 끝에 라모나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각하,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하세요.”
끄덕.
“전 무도회가 싫어요.”
갸웃.
저 자식은 고개로도 말을 하네.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에 헛웃음을 쳤다.
다시 그녀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남자가 제 등에 손을 올린다는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로베르트의 입술이 기분 나쁘게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라모나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그에게 물었다.
“각하아? 그 표정은 뭐죠?”
끄으덕. 도리도리.
“아무 일도 아니라고요?”
끄덕.
미치겠네. 답답해진 라모나가 이마를 짚었다.
마찬가지로 답답했던 로베르트가 결국 잘 참던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완벽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내 사랑.”
“……뭔데요?”
“간단합니다. 다른 남자 말고, 알폰조 말고, 저랑만 춤추면 되는 일 아닙니까.”
거기서 또 알폰조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걸까. 라모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 각하.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왜 말이 안 됩니까?”
그가 반문하던 때였다.
로베르트의 손에서 가느다란 푸른빛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푸른빛을 발견한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말 되는 소리가 되었군요.”
오랜만에 그의 얼굴에 유독 예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