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 이후로 대화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글쎄요…… 꿈 이야기라니. 조금 당황스럽긴 하네요.”
어색한 미소를 남긴 라모나는 급히 화제를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폰조는 그런 그녀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다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고 나를 찾아오게. 당분간 수도에 머무를 예정이니.”
“호의에 감사합니다.”
“아마 로베르트 메닝엔이 돕지 못하는 것을 내가 도울 수 있을 거야.”
다음 약속을 기약하며 여지를 남겼다.
껄끄러운 기분을 뒤로한 채 라모나는 슈타이덴 백작저의 응접실을 나섰다.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삐딱하게 서 있던 레이디 슈타이덴은 라모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그쪽 표정을 보니 다음에 또 볼 일이 있을 것 같네요.”
레이디 슈타이덴의 인사에 라모나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레이디 슈타이덴께서 또 초대해주신다면 영광이죠.”
“그래요?”
레이디 슈타이덴이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표정을 좀 관리하는 게 좋을 텐데.”
“……네?”
“그런 얼굴로 돌아다니면 그 누구도 그쪽이 약혼자에게 무려 레헨트를 선물 받은 사람이라고 믿지 않을 것 같네요.”
아, 젠장.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디 슈타이덴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했다.
“뭐, 나야 애초에 믿지 않았으니 상관없지만. 밖에서는 적어도 행복한 척을 하고 다니는 게 좋을 거라는 뜻이에요. 푼수처럼 떠벌리고 다니면 더 좋고.”
뼈가 있는 레이디 슈타이덴의 말에 라모나가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시죠?”
“어머, 미안해요. 아무래도 나는 마리안느를 곁에서 봤다 보니 공작가의 분위기를 대충 알아서.”
그녀가 눈썹을 까딱해 보였다.
“그쪽이 제일 잘 알 거 아니에요. 메닝엔 공작가가 그쪽을 정말로 받아들이는지, 아닌지.”
레이디 슈타이덴의 말에 라모나는 헤센 백작저로 가 버린 유디트와 클레멘스를 떠올렸다.
‘……머리 아파.’
두통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충고는 감사하지만, 제가 충고를 요청했던 기억은 딱히 없네요.”
“어머나. 그럼요, 그럼요. 아이젠부르크의 신데렐라는 그런 요청을 한 적이 없죠.”
라모나의 말에 레이디 슈타이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놈의 신데렐라 타령. 치솟는 짜증을 겨우 삼키던 라모나의 눈에 레이디 슈타이덴의 목에서 달랑거리는 목걸이가 들어왔다.
물끄러미 그 목걸이를 바라보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 슈타이덴.”
“예?”
“친구분을 정말 아끼시나 봐요.”
마리안느의 이야기에 처음으로 레이디 슈타이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럼 저는 이만.”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린 라모나가 자리를 뜨려던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레이디 슈타이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거예요. 난 누군가가 또 그 애처럼 되기를 원치 않거든요.”
멈칫한 라모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슈타이덴은 차갑게 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죠.”
“지금은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글쎄요. 적어도 지금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보다는 그쪽이 더 믿을 만한 것 같네요.”
“그들이 당신에게 하는 우호적인 말, 행동, 표정.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진심이라 생각해요? 순진하기도 하지.”
대답하지 못하는 라모나를 보며 레이디 슈타이덴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거 아나요?”
까드득.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그 사고가 있던 날, 적어도 마리안느만큼은 살릴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에요.”
친구의 이름을 입에 담는 그녀의 눈빛에는 오랜 원한이 서려 있었다.
* * *
해 질 무렵, 메닝엔 공작저의 정원.
티아는 안색이 너무 안 좋다며 바람을 쐬는 게 좋겠다고 라모나를 끌고 나왔다.
맥없이 끌려 나온 라모나는 벤치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거예요. 난 누군가가 또 그 애처럼 되기를 원치 않거든요.>
‘그건 무슨 의미지.’
알폰조의 이야기도 충격적이었지만 레이디 슈타이덴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더 머릿속에 꽂혔다.
단순히 메닝엔 공작가에서 마리안느가 받았던 홀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레이디 슈타이덴과 로베르트의 어머니가 절친한 친구였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디 슈타이덴이 메닝엔 공작저에 반감을 품은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뭔가…… 더 확실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설마 그녀는 마리안느의 죽음이 메닝엔 공작가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에 빠진 라모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어느새 정원으로 나온 로베르트가 슬그머니 그녀의 곁에 앉았다.
“라모……. 아, 부르지 말라고 했던가. 흠…….”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이내 라모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흔들.
“…….”
흔들흔들.
“…….”
그러나 깊은 생각에 빠진 라모나는 그의 부름을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로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나의 천사?”
그제야 라모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예?”
“역시.”
“뭐가요?”
“당신이 이 호칭을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아닌데요.”
간결한 라모나의 대답에 로베르트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약하군요.”
“예? 뭐가요?”
“더 진한 욕을 해 줄 줄 알았는데.”
이 자식이 또 시작인가. 라모나가 얼굴을 잔뜩 구겼다.
‘머리도 복잡한데 왜 저러는 거야.’
그러나 로베르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복잡한 머릿속이 말끔하게 비워졌다.
야살스레 휘어진 그의 눈을 보자 입술이 닿았던 그때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또다시 그에게서 익숙한 코롱 향이 풍겼다.
‘오, 안 돼.’
정신 차려 라모나. 잘 알잖아? 저건 그냥 주둥이일 뿐이야.
그리고 저 주둥이가 네 입술에 닿았…….
‘아니야, 그건 사고였잖아!’
라모나는 애써 달아오르는 귓불을 식혔다.
일단 저 끔찍한 입을 막는 게 먼저다. 그녀는 최대한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각하, 당분간 저와 대화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로베르트는 시무룩하게 입을 다무는 대신 특유의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턱을 치켜들고는 티아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영문 모를 부름에 티아가 황급히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그래. 나는 원래 혼잣말이 많은 편인데,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될 익명의 레이디께서 자꾸 입을 다물라고 하시더군. 정말 슬픈 일이야.”
“……저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라모나의 감탄 아닌 감탄에 로베르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다시 티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분이 오늘 티타임을 가지셨는데 어떤 시간이었는지 참 궁금하군, 네가 알아올 수 있겠나?”
“어, 음…… 네.”
떨떠름한 얼굴의 티아가 라모나에게 물었다.
“아가씨, 오늘 티타임이 어떠셨는지 공작 각하께서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요.”
기가 막혀서 정말. 코웃음을 친 라모나도 티아에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참 유익한 하루였으니까 신경 꺼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전해 주겠니?”
“으음, 네.”
티아가 로베르트에게 다시 라모나의 말을 전했다.
“아가씨께서는 오늘 무척 유익한 하루를 보내셨다고 하시는데요. 음……. 관심에 감사하다고 하시네요. 조금 곤란하신 모양이에요.”
“생각은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전해 드리도록.”
계속되는 말 심부름에 난감해진 티아는 그 사이에서 눈을 깜빡거렸다.
솔직히 ‘사랑싸움은 좀 둘이 알아서 하던가.’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티는 내지 못했다.
“어…… 아가씨. 공작 각하께서는 오늘의 구체적인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하시네요.”
라모나는 헛웃음을 쳤다.
‘저거 더 자세히 말하라는 뜻이지?’
내가 왜? 제가 뭔데? 못마땅한 라모나가 눈썹을 치켜떴다.
이내 라모나는 천천히 팔짱을 끼며 다시 티아를 불렀다. 그녀의 입가에 꼭 누구처럼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티아.”
“네! 아가씨.”
“알폰조 전하는 참 오늘도 잘생기셨더라. 왜 1등 신랑감으로 꼽히는지 알 것 같았어.”
순간 로베르트의 눈썹이 눈에 띄게 꿈틀했다.
그게 알폰조에 대한 질투라 예측한 라모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레이먼이 그렇게 알폰조 전하를 칭찬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니까. 그치?”
알폰조의 이야기가 나오자 급격하게 굳어진 로베르트의 얼굴을 보며 라모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자기는 나한테 레이디 클라이스트를 붙였으면서.’
입을 꾹 다문 로베르트를 비웃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티아. 이제 좀 쌀쌀하네.”
아무래도 큰 사건을 겪다 보니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렇게 자꾸 주둥이를 놀리려는 로베르트와 함께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근데 표정이 왜 저렇게 어두운 거지?’
로베르트답지 않게.
라모나는 로베르트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