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다음 날 아침, 라모나의 침실 앞.
똑똑.
“라모나?”
노크에도 대답이 없자 로베르트가 눈썹을 꿈틀했다.
‘아, 부르지 말랬지.’
흠흠, 헛기침한 그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당신의 그이입니다.”
여전히 방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잠이라도 자는 것일까?
로베르트가 고민에 빠진 사이 마침 그 뒤를 지나가던 댄버스 부인이 말했다.
“각하, 혹 레이디를 찾고 계신다면 이미 외출 중이시라는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라모나가 외출 중이라는 소식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아침부터?”
“벌써 11시가 다 되었습니다만.”
“허, 내게 말도 안 하고?”
“레이디께서 레이디 슈타이덴의 초대를 받았다는 말씀을 한 열 번 정도 드린 것 같습니다만.”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그게 벌써 오늘이었나.’
로베르트는 머쓱하게 혀를 찼다.
드레스는 잘 맞췄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하긴 그런 일이 터졌는데 드레스니 뭐니 이야기를 꺼내서 뭐 하겠는가.
로베르트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발 늦었군.”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고 판단한 댄버스 부인이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는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로베르트는 고뇌에 빠졌다.
‘역시 푸른빛 때문인가…….’
그는 푸른빛의 정체를 들켰던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글쎄요, 권력자에게 당연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저는 제법 좋은 패잖아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감사하다니,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왜 그녀는 자꾸 스스로를 누군가에 의해 이용당하는 역할로 놓는 것일까.
순간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라모나가 자신을 찾아왔던 그날, 그가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정말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에 로베르트는 결국 화가 나고 말았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멍청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려고 마음먹었건만.
‘그런 일이 생길 줄이야.’
입맞춤이라니, 함부로 입을 놀린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기껏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그녀와의 관계가 또다시 예측할 수 없이 튀어 올랐다.
“후.”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게다가 오늘의 행선지가 슈타이덴 백작저라니.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알폰조와 데미안이 눈빛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목격했다는 로지나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묻지 못했군.’
알폰조와 라모나가 공유하는 비밀이 분명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뭘까.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 *
한편 슈타이덴 백작저,
“어서 와요. 이렇게 따로 만나는 건 처음이죠.”
거의 엄지손톱만 한 큼지막한 진주를 주렁주렁 매단 귀걸이와 딱 붙는 레이스 블라우스.
오늘도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게 치장한 레이디 슈타이덴이 라모나를 맞이했다.
“초대에 감사합니다. 레이디 슈타이덴.”
라모나의 인사에 레이디 슈타이덴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내가 초대한 건 아니죠.”
“……예?”
“왜 초대장을 보냈는지 그쪽도 알 거 아니에요. 설마 내가 한가하게 그쪽이랑 차나 마실까 봐?”
당황한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반응에 레이디 슈타이덴이 피식, 하고 웃었다.
“뭐, 이번 신데렐라가 궁금하기는 했죠. 아! 오해하지는 마요. 비꼬는 건 아니니까.”
‘뭐지.’
라모나는 레이디 슈타이덴이 풍기는 미묘하게 날 선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러나 레이디 슈타이덴은 보란 듯이 활짝 웃었다.
“걱정돼서 그런 것뿐이니까.”
과장스러운 미소였다.
이내 레이디 슈타이덴이 집사에게 고개를 까딱하자,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응접실 안에는 레이디 슈타이덴과 라모나의 대화를 들은 알폰조가 곤란한 듯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럼 편히 이야기 나눠 보도록 해요.”
그녀가 라모나의 어깨를 살며시 붙들고는 속삭였다.
“내 아들도 제법 나쁘지 않다는 점을 참고해 주면 고맙겠어요.”
블라우스 아래에 숨겨 두었지만, 살짝 삐져나온 로켓 목걸이에 라모나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라모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레이디 슈타이덴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대낮부터 이런 얘기 좀 그렇지만 몸 좋은 남자는 쓸 데가 많거든요.”
“어머니!”
얼굴이 벌게진 알폰조의 외침에 레이디 슈타이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만.”
달칵.
레이디 슈타이덴이 자리를 뜨고, 응접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아침이었다.
심란한 마음에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라모나는 침묵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의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먼의 편지 일은 감사해요, 황자 전하.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레이먼의 부탁이니 그대가 감사할 필요는 없지.”
알폰조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었다.
“감사받을 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 모습에서 레이먼을 겹쳐 본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의외의 일이었다.
제 할 말만 하고 홀연히 떠나 버린 알폰조가 레헨트에 나타난 것도, 그리고 갑자기 돌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 것도.
‘대체 뭘까.’
생각에 빠져 있던 라모나의 시선에 긴장한 듯 꽉 쥔 알폰조의 주먹이 들어왔다.
‘수상한데.’
확실히 그는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알폰조를 유심히 살피며 라모나는 찻잔을 홀짝였다.
“……몸은 좀 괜찮은가?”
“예, 몸이 쇠약해져 있어 지쳤을 뿐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폰조는 대답 대신 잠시 라모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불편했던 라모나가 시선을 찻잔으로 내리깔았다.
이내 알폰조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을 돌려 하는 법을 알지 못하네. 군인에게 그것은 시간 낭비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시는지 조금 두려워지려 하네요.”
“얼마 전, 나와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일을 기억하는가? 레이먼의 편지를 그대에게 전해 준 그날.”
알폰조의 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해졌다.
“그날부터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네.”
꿈이라는 말에 라모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끔찍하리만큼 생생해서, 도무지 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꿈 말일세. 그 꿈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의 날부터 시작해.”
“……그런가요.”
“꿈에서 나는 누군가가 부대의 편지를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네. 그대 동생, 레이먼의 편지 말이지. 그 일이 있은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페하께서 돌아가시네. 그리고 요하네스가 황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어머니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셨지.”
라모나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나 손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젠장.’
결국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알폰조는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듯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나는 여전히 서부에 있었네. 그러다 어느 날, 환수의 일로 혼란하던 틈을 타 침입한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했지.”
이건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건 그녀가 죽은 이후의 이야기였으니까.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럽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지금 찻잔을 들었다가는 분명 손의 떨림을 들킬 것 같았다.
“항상 내내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에 꿈에서 깨어나곤 해. 뒤에서 나를 칼로 찌르던 통증이 이렇게 생생한데 꿈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더군.”
“……단순한 꿈일 뿐입니다. 흔히들 꿈은 반대라 말하곤 하죠.”
“그런가.”
작게 웃은 알폰조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 꿈이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의 날부터 시작한다고 말했지.”
“예.”
“그런데 그날의 나는 꿈과 다르게 움직였네. 편지가 사라진 일을 무시했던 꿈과 다르게 그 편지를 그대에게 직접 전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지.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글쎄요.”
“솔직히 궁금했거든. 도대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누구이기에 수도가 그렇게 떠들썩한 건지. 나답지 않은 일이었지.”
순간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꿈의 많은 부분이 현실과 맞아떨어져. 하지만 유독 그 꿈과 유별나게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알폰조는 물끄러미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사교계의 숨은 계략가, 요하네스의 정부, 황후를 시해하려던 사형수.”
“……!”
“그게 바로 내 꿈속의 그대일세. 지금의 그대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지.”
라모나는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알폰조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를 불러내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나는 혼란스럽네. 이게 정말 꿈에 불과한 일인지 모르겠어. 왜냐하면, 그렇게 넘기기에…….”
그는 말끝을 흐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마치 내가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느껴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