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78화 (79/151)

#78화

그날 오후.

‘오!’

홀로 여유롭게 티타임을 가지던 라모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찻잔이며, 차 맛이며, 티푸드까지. 오늘따라 티타임의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네.’

라모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포크를 들어 파운드케이크를 갈랐다.

묵직하게 포크에 와 닿는 빵의 감촉에 이어 부드러운 바닐라 향이 퍼져 나갔다.

버터를 충분히 휘저어 만든 파운드케이크가 포슬포슬 부드럽게 입 안에 퍼졌다.

‘이런 게 행복이지.’

홍차를 한 모금 머금어 입가심하는 라모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제 일은 그냥 사고였다.

그녀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다 있는 법이었고, 그 정도 사고는 별로 중요한 일 축에도 끼지 못한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고 전부 입맞춤이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라모나가 그 일을 단순한 사고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그걸 눈치채기에는 라모나의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내일은 슈타이덴 백작저를 방문해야 해.’

지난번, 알폰조가 남기고 간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린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정말 회귀자일까?

그렇다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라모나에게 접근한 것일까.

지난 생에는 전혀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알폰조이기에 속내가 더 짐작 가지 않았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라모나는 고민에 빠졌다.

‘차라리 이 일을 각하와 상의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려면 결국 그녀가 시간을 되돌아오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일단 정말 2황자 전하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이번 생의 그는 요하네스와 손을 잡았을까?

역시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톡, 토독.

생각에 빠진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티아는 그런 그녀의 테이블에 말없이 편지 한 장과 페이퍼 나이프를 스윽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슈타이덴 백작저에서 왔니?”

“아가씨께서 좋아하실 만한 편지에요.”

뭐지?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가 조심스레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편지 봉투를 갈랐다.

이내 발신인을 확인한 라모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에밀리아구나!”

제국 최고의 꼬마 레이디. 에밀리아를 떠올린 라모나는 기쁘게 편지를 읽어 보았다.

특별한 내용은 없는 편지였다.

곧 수도로 올라올 것이며, 오랜만에 라모나를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다는 말을 꼼꼼히 읽은 라모나가 흐뭇한 얼굴로 편지지를 내려놓았다.

“있잖아, 티아.”

“네, 아가씨!”

“에밀리아 생각을 할 때면 마음속에 따뜻한 무언가가 샘솟는 기분이 들어.”

그 변태 쓰, 아니 로베르트 생각을 할 때면 마음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샘솟는 것과는 상반된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모나가 헛웃음을 삼켰다.

에밀리아의 이야기에 티아도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에밀리아 아가씨는 정말 너무 사랑스러운 분이시죠. 다정하시고요.”

“세상 사람들이 다 에밀리아 같다면 참 좋을 텐데.”

“그건 정말 훈훈한 세상이네요.”

“그렇지? 에밀리아가 얼른 수도에 왔으면 좋겠어.”

“저도요!”

두 사람이 즐겁게 에밀리아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때였다.

“흠흠.”

문밖에서 불청객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아.”

귓불이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네, 네?”

“우리 산책 좀 다녀올까?”

“지금요?”

당황한 티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지금. 당장.”

힐끔, 티 테이블을 살핀 티아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물었다.

“어으으음. 남은 차는 어떡하죠?”

“버려야지, 뭐. 이상하게 갑자기 바람이 쐬고 싶네.”

이상하게 지금은 로베르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허둥지둥 산책 준비를 하는 라모나를 보며 티아는 생각했다.

‘어떡해! 아가씨는 공작 각하가 꼴도 보기 싫으신가 봐.’

이거 이거 생각보다 훨씬 큰일이 났구나!

티아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물론 손은 라모나가 시킨 일을 착실히 해내는 중이었다.

* * *

오셀튼 백작저. 울상이 된 레이디 오셀튼과 백작 부인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티파티 이후로 오셀튼 백작저를 찾아오는 손님이 뚝 끊겼다.

다들 벤트하임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기 때문이었다.

백작 부인이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를 어쩌면 좋니. 이번 사교 시즌을 위해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도 힘들게 섭외해 뒀는데.”

뻔히 손님이 오지 않을 파티를 여는 것도, 그렇다고 준비한 파티를 취소하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었다.

오늘도 노란 옷을 차려입은 레이디 오셀튼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카엘라를 공격할 생각으로 만든 자리가 맞았으니까.

‘그래도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까지 공격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필 거기서 미카엘라가 아이젠부르크의 영지 문제를 터뜨리는 바람에 벤트하임과 메닝엔, 둘 모두의 눈치를 보게 됐다.

“난 망했어…….”

레이디 오셀튼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울먹였다.

“아이고.”

백작 부인은 별 말없이 딸의 어깨를 토닥였다. 뭐라 위로해 줄 말도 없는 탓이었다.

그때였다.

“저…… 아가씨…… 초대장이 하나 왔는데요.”

하녀의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진 레이디 오셀튼과 백작 부인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하녀에게로 달려갔다.

“이리, 이리 얼른 줘 보렴.”

“줘 봐! 봐 볼게.”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 망설이던 하녀는 잽싸게 오셀튼 백작 부인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내 초대장을 보낸 이를 확인한 오셀튼 백작 부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세상에! 너무 다행이야. 역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사실 그동안 밤에 한숨도 못 잤어, 얘. 좀 자려고 눈을 감으면 걱정이 떠오르고, 그래도 자야지 하고 또 눈을 감으면 또 걱정이 떠오르지 뭐니.”

참고로 레이디 오셀튼의 수다는 유전이었다.

무슨 초대장인지도 모르게 주저리주저리 혼자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백작 부인을 향해 레이디 오셀튼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어머니. 네?”

“이거 보렴.”

활짝 웃은 백작 부인이 레이디 오셀튼에게 발신인을 보여 주었다.

“바텐베르크 후작가에서 초대장이 왔어.”

* * *

“에드윈.”

오랜만에 클럽을 방문한 로베르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에드윈을 찾았다.

또 무슨 일이 났나 싶어 긴장한 에드윈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

로베르트가 말없이 위스키 잔을 들자 에드윈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레헨트 일 때문입니까?”

“말할 수 없어.”

이럴 수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악한 에드윈이 저도 모르게 술잔을 찾았다.

“혹시…… 그자의 일입니까?”

에드윈이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로베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의 일이지.”

그건 또 누구지? 에드윈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로지나에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들었다.

2황자 알폰조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접근 중이며, 요하네스의 수족 데미안 스펜서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미행 중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는 것을 로지나가 목격했다는 것까지.

‘데미안 스펜서를 뒤쫓았지만 결국 놓쳤다고 했지.’

하지만 이 중에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던가.

‘아, 혹시 그건가?’

대충 감을 잡았다고 생각한 에드윈이 로베르트에게 물었다.

“각하, 혹시 레이디께서 로지나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하셨나요?”

그러나 그의 질문에 로베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지. 혹시 자네 요즘 일이 너무 편한가?”

그럴 리가요. 에드윈은 썩어가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의 정체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중요한 사람이면 나중에 언급하시겠지, 뭐.’

그보다 더 궁금한 일이 있었던 에드윈이 은근슬쩍 그에게 물었다.

“휴가는 어떠셨습니까? 레이디가 좋아하시던가요?”

“그야 물론 라모…….”

까지 말한 로베르트가 다시 침통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다시 위스키 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에드윈.”

“예, 각하.”

“그 일 말인데. 로지나가 보았다던 그 사람들.”

알폰조와 데미안의 이야기였다.

알아들은 에드윈의 눈빛이 바뀌었다.

“예, 사람을 좀 붙일까요?”

“그래, 둘 다에게 붙일 필요는 없고.”

눈치 빠른 에드윈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2황자에게 사람을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로베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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