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쪽.
아니, 쿵에 가까운 입맞춤. 머리가 하얗게 되는 충돌 사고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얼른 서로를 밀어냈다.
“미, 미, 미쳤어요? 왜 거기서 고개를 숙여요?”
“저는 그냥 당신이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라모나가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아직도 입술에 닿았던 강렬한 감촉이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로베르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던 라모나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당황한 건 로베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목이 탄 손을 뻗어 물 잔을 들었다. 그러나.
툭.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가 그만 물 잔을 놓치고 말았다.
졸지에 등에 찬물을 뒤집어쓰게 된 라모나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꺄, 읍.”
“쉿! 너무 늦은 밤입니다.”
로베르트가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
또다시 로베르트의 향기가 가까워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상큼한 코롱 향기, 그리고 묘하게 뒤섞인 비누 냄새.
거기에 뒤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온기까지.
‘이,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른 라모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으읍 으으읍 으으읍으으으?”
손바닥 아래에서 라모나의 입술이 꿈틀거리자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혹시 이것도 푸른빛이냐 묻는 겁니까?”
“으으읍.”
끄덕.
여전히 그에게 입을 막힌 라모나가 뒤를 돌아보며 용케 잘 알아들은 그를 노려보았다.
“…….”
지은 죄가 있는 로베르트는 차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신이시여, 설마, 제발. 저 남자가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니겠지요?’
진정했지만, 서서히 분노 중인 라모나가 그의 팔을 거세게 툭툭 쳤다. 로베르트는 슬그머니 그녀를 놓아주었다.
“대답하세요.”
로베르트는 입을 다문 채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목덜미부터 시작된 붉은 기운은 어느새 그의 귀까지 벌겋게 물들였다.
“각하?”
“…….”
“대답하시라고요. 이것도 푸른빛이에요?”
끄…… 덕.
“이 변…….”
태 XX가.
라모나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 버릴 뻔한 욕설을 겨우 꿀꺽 삼켰다.
그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싶기는 했지만, 절대 이렇게는 아니었다.
게다가 입맞춤은 또 뭐람!
점점 라모나가 생각하는 로베르트의 이미지가 시궁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저 또라이 입을 막아야 해.’
입만 열면 자기 자랑뿐인 자존감 과잉남에서 언제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 버린 재앙의 주둥이.
‘저 새X를 진짜 어쩌면 좋지.’
신이시여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습니다.
제가 시간을 거슬러 온 까닭은 혹시 저 남자를 처리하기 위해서인가요?
절망에 빠진 라모나가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자신이 푸른빛의 심각성에 대해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정말 위험한 힘이었다.
지금이야 입맞, 아니 추돌 사고 정도로 끝났지만 정말 누군가의 뺨을 마구 치고 다니기라도 한다면.
혹은 로베르트가 그녀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돌아 버리겠다, 진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모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요하네스가 아닌 로베르트에게 이런 힘이 생겼다는 사실도, 그리고 로베르트가 그녀를 믿어 주고 있다는 사실도.
“하아.”
라모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로베르트의 어깨를 꼭 붙들고는 애원하듯 입을 열었다.
“똑똑히 잘 들으세요.”
끄덕.
“앞으로 절대, 절대 저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건강하다.’ 이런 것도 하지 마세요.”
끄덕.
“그냥 저에 대한 얘기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제 이름을 부르지도 마세요. 그리고 저랑 함께 있을 때도, 즈블.”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발 그 재앙 같은 주둥이 좀 다무세요. 알겠죠?”
너무합니다.
로베르트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분노한 라모나는 양 주먹을 꽉 쥔 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시 한 번 말할게요.”
그녀의 이마에 선 힘줄이 꿈틀거렸다.
“각하,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 네?”
결국 로베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덜미는 여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 * *
다음 날 아침.
‘이상하군.’
메닝엔 공작저의 실세, 유서 깊은 저택의 수호자, 댄버스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각하가 이렇게 조용하실 리가 없는데?’
오늘 아침의 로베르트는 정말 이상했다.
갑자기 묵언 수행을 하는 수도자라도 된 듯 입을 다물어 버린 그를 보며 댄버스 부인은 팔짱을 꼈다.
‘각하께서 성인이 되신 후 이런 일은 처음이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아니 이게 아니라.
‘이건 꼭 그 때 같군.’
7년 전, 리안드로와 마리안느의 장례식 이후 로베르트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슬픔을 극복해 내기는 했지만, 댄버스 부인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렇게 큰일은 아닐 것이다.
‘각하도 7년간 성장하셨으니.’
댄버스 부인은 말없이 고요한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흠흠.”
“각하?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댄버스 부인의 말에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라모, 아니 손님방에 계신 그분은 아침 식사를 하지 않기로 했나?”
이상한 호칭에 댄버스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이디께서는 오늘 침실에서 가볍게 아침을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역시 그건가.’
침묵의 실마리를 찾은 댄버스 부인이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잠시 후.
“티아.”
댄버스 부인은 라모나의 침실에서 식기를 들고나오는 티아를 조용히 불렀다.
“예, 부인.”
“레이디께서는 별일 없으신가?”
댄버스 부인이 라모나가 저녁을 거른 일을 걱정하고 있다고 짐작한 티아가 대답했다.
“아아, 네! 저희 아가씨야 뭐.”
말끝을 흐린 티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티아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어제 일로 조금 기분이 상하신 것 같기는 한데……. 딱히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으셔서요. 워낙 어른스러운 분이시잖아요.”
역시.
댄버스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제 오후, 마담 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댄버스 부인을 찾아왔다.
<어후…… 정말…… 이런 자리는 너무 힘드네요. 대체 왜 두 분이 함께 계시는 거예요?>
그녀는 오늘 일로 10년은 수명이 줄어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고는 공작저를 나섰다.
‘분명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일로 문제가 생겼군.’
같은 생각을 한 티아와 댄버스 부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도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뷘터하이트 자작저.
“어머나.”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예쁘게 반으로 묶고 하늘색 리본 핀을 꽂은 소녀가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메닝엔 공작 부인께서 저를 초대하셨다고요?”
“그래! 에밀리아. 사교 시즌에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에서 머무를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셨대. 여기, 여기 레이먼이 보낸 편지를 봐봐. 응?”
잔뜩 신이 난 뷘터하이트 자작 부인이 편지를 마구 흔들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소녀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조금만 진정하세요.”
“꺄아아!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가문의 영광이야, 그렇지?”
그제야 에밀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영광인 것은 맞지요.”
아이젠부르크 자작 부인의 여동생, 뷘터하이트 자작 부인은 자신과는 달리 너무나 침착한 딸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내 보물, 에밀리아. 어떻게 내 배에서 이런 우아한 레이디가 태어났을까? 응?”
“그런 말씀 마세요. 다 어머니가 저를 잘 키워 주신 덕분인걸요.”
“역시 내가 가정 교사를 잘 들인 것 같아.”
“으음, 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자작 부인의 호들갑에 에밀리아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수도의 소식이 한 박자 늦게 전해지는 이곳에서도 라모나의 이야기는 한동안 자자했다.
약혼자가 있는데도 공작과 동거를 시작했다느니, 그에 항의하는 약혼자의 뺨을 내리쳤다느니.
연일 이어지는 자극적인 소문에 애꿎은 뷘터하이트 자작 부인만 온갖 곳에 불려 다니기 바빴다.
‘그래도 에밀리아까지 초대한 걸 보면 잘 지내는 모양이지.’
역시 소문은 소문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래, 똑똑한 내 조카가 그럴 리 없지!’
자작 부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부인의 표정에 에밀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응?”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어머, 내 표정이 또 음흉했니?”
“음, 약간은요?”
“어쩔 수 없지 뭐!”
뷘트하이트 자작 부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수도로 올라갈 짐을 싸야겠다, 그치?”
라모나에 대한 소문이 아직도 요란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번 사교 시즌이 제법 괜찮을 것 같은 예감에 그녀는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