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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76화 (77/151)

#76화

우여곡절 끝에 드레스를 맞추고, 기운이 다 빠져 버린 라모나는 저녁도 필요 없다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녀는 누운 채 레이디 슈타이덴의 초대장을 펼쳐 보았다.

“내일모레네.”

다급한 감이 없지 않은 초대였지만 이쪽에서도 오히려 이게 편했다.

알폰조가 남긴 말을 혼자 헤아린다고 해서 알아차릴 것도 없는 탓이었다.

그나저나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벌떡.

분노한 그녀가 일어나 앉았다.

로베르트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로지나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더 화가 나는 건 그런 그녀를 자신에게 붙여 준 로베르트였다.

“그 남자는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잘난 머리는 장식이야? 어? 관상용이냐고!

생각해 보면 관상용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기는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됐다.

열 받은 라모나는 로베르트 대신 이불을 한 번 걷어찼다.

로지나가 뭐라 하건 말건 라모나는 본인의 뜻대로 가슴이 다 막힌 드레스를 골랐다.

목을 반쯤 덮는 단아한 드레스였다.

반전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지금 라모나의 마음 상태를 정리해 보자면 아래와 같았다.

우연히 상대방이 자신에게 100짜리 잘못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자신은 상대에게 200짜리 잘못을 한 상황.

그녀는 상대방의 100짜리 잘못을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갔다.

아직도 200짜리 잘못을 고백하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다 해결되기도 전에 상대방이 10짜리 잘못을 더 저질렀다.

100짜리도 이해했는데 10짜리를 용서하는 건 간단한 문제 아니냐고?

아니.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눈앞에 벌어진 10짜리 잘못은 이미 이해하고 넘어갔던 100짜리 잘못을 다시 불러온다.

이쯤 되면 내 200짜리 잘못이고 뭐고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건 여자 문제 아닌가.

‘어이없어, 정말.’

기가 찬 그녀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이내 라모나는 하나의 질문을 마주했다.

‘이걸…… 그 남자의 잘못이라 할 수 있나?’

물 잔을 내려놓으려던 그녀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로지나는 ‘무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로베르트의 믿을 만한 수하였고, 또 사교계의 트렌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레이디였다.

그런 그녀에게 라모나의 드레스를 부탁한 게 정말 잘못일까?

‘하지만 내 기분이 어떨지를 생각해야지!’

그렇지만 그가 왜 그래야 할까? 진짜 연인 사이도 아닌데.

아니, 애초에 왜 라모나는 로지나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일까? 진짜 연인 사이도 아닌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라모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 일 때문인 게 분명해.”

그녀는 생각했다.

푸른빛의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화가 난 게 분명하다고.

“역시 짚고 넘어가는 게 낫겠다.”

라모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곧장 로베르트를 찾아 나섰다.

확실히 이렇게 대충 넘어가기엔 너무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 * *

잠시 후, 로베르트의 집무실.

똑똑.

“들어오시죠.”

그녀가 올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로베르트의 목소리에 라모나는 또다시 올라오는 화를 삼켜야 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마주한 집무실의 정신없는 풍경에 올라오던 화가 쏙, 하고 들어갔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아무래도 빈민가를 통째로 격리하려면 손이 많이 가긴 합니다. 밀린 일도 좀 있고요.”

라모나는 다시 한번 그가 메닝엔 공작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냥 돌아갈까.’

그녀가 고민하는 것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피식 웃으며 소파를 향해 고갯짓했다.

“앉으시죠.”

“아니에요, 급한 일은 아니라서요. 다음에 이야기해요.”

라모나의 이야기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게 급한 일이 아니면 뭐가 급한 일입니까.”

“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닙니다. 앉으시죠.”

로베르트는 보던 서류를 대충 옆으로 밀어 놓고는 라모나의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털썩.

자리에 앉은 그가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다시 한번 사과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을 속였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상보다 진지한 그의 태도에 라모나가 입을 다물었다.

로베르트는 마저 말을 이었다.

“제 의도로 생겨난 현상은 아닙니다만, 분명 제 책임이 있습니다. 혹시 원하는 보상이 있으시면 최대한 고려해 보도록 하죠.”

보상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라모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갑자기 로지나의 일로 열을 내던 일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 고민해 보고 말씀 주시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혹시 각하가 하신 말 중에, 그러니까 푸른빛이 나타났던 말 중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나요?”

“음.”

생각에 잠긴 로베르트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무언가 떠오른 그의 눈에 곤란한 빛이 떠올랐다.

“그게…….”

도르르 눈을 굴린 로베르트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음, 당신이 뺨을 때린다고 했습니다.”

“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내용에 라모나가 기겁했다.

“제가요? 뺨을요? 아! 설마?”

어쩐지 자꾸 할아버님이니 할머님이니 뺨 때리지 말라더니?

순간 파바박 하고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에 라모나가 황급히 로베르트의 팔을 붙들었다.

“잠깐만요. 그럼 혹시 제가 요아힘의 뺨을 때린다고 말한 적도 있나요?”

로베르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미친 거 아냐?

이러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 라모나는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이 남자. 대체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이제야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왜 그렇게 쩔쩔맸는지를 슬슬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아, 그럼 혹시 이번에도 누구라고 지정했나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

힐끔.

라모나의 얼굴을 살핀 로베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면 차라리 그냥 제 뺨을 지금 때리시는 건……?”

“미쳤어요?”

“아닙니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푸른빛이 나타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곧 사교 시즌이 시작되는데 사고라도 생기면, 흡.”

로베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두 사람의 손목에서 가느다란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경악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진짜 미쳤나 봐.”

미쳤나 봐 말고 다른 말을 좀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자꾸 라모나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정말 이 상황은 미친 것 같았으니까.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푸른빛.

뺨.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래.’

이내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라모나?”

심상치 않은 예감에 로베르트가 그녀를 불렀다.

“뺨 대 보실래요?”

“예?”

“아니 그렇잖아요. 진짜 각하 말 대로 사교 시즌에 그런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큰일이에요!”

“그렇기는 합…….”

“말하지 마세요!”

라모나의 외침에 로베르트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잘 들으세요. 일단 각하는 당분간 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해요. 알겠죠?”

로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대화도 최대한 자제하죠. 정 해야 하는 말이 있으면 편지를 써 주세요.”

로베르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당장 문제가 되는 재앙의 주둥이는 차단했고.

허리에 팔을 올린 라모나가 그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물었다.

“자, 그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요.”

끄덕.

“죄송하지만 일단 뺨을 대 주실래요?”

로베르트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살며시 라모나 쪽으로 뺨을 들이밀었다.

흐읍.

비장하게 숨을 들이마신 라모나가 손을 들어올렸다.

“걱정 마세요. 살살 할 테니까.”

그새를 못 참은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짜릿하겠군요.”

“입 다무시라니까요!”

박력 넘치는 라모나의 외침에 로베르트는 다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다시 천천히 숨을 고른 라모나가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었다.

“가만히 있으셔야 해요. 돌리면 다쳐요.”

그리고 그의 뺨에 손을 대려는 순간,

“꺅!”

무언가가 라모나의 발목을 휙, 하니 잡아당겼다.

균형을 잃은 라모나는 기우뚱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라모나!”

넘어진 라모나는 그대로 테이블 너머에 있는 로베르트의 품에 안기듯 넘어졌다.

“괜찮습니까?”

깜짝 놀란 로베르트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에 못지않게 놀란 라모나도 황급히 고개를 들었고.

“각하! 방금 뭔가가 제 발목, 읍.”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로베르트와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입술로.

입을 맞춘 채 휘둥그레진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라모나의 손목 위를 장난스럽게 뛰놀던 푸른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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